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보고 (문단 편집) === 신라로 귀국, 청해진 대사가 되어 동북아의 해상 패권을 장악하다 === >828년 여름 4월, 청해대사(淸海大使) 궁복(弓福)은 성이 장씨인데,,【일명 보고(保臯)라고도 한다.】,, 당나라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후에 귀국하여 임금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으로 청해진(淸海鎭),,【청해는 지금의 완도(莞島)이다.】,,을 지키게 되었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13&ref=y&cid=ㄴ49625&categoryId=49798|《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제10 흥덕왕]]'''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는 곧바로 서라벌로 가서 당시 [[임금]]이었던 [[흥덕왕]]에게 "당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자꾸 잡아가 노비로 삼으니 저에게 군사 1만을 주시면 제가 당의 해적들을 막겠다."고 자신의 뜻을 밝혔고, 흥덕왕은 즉각 이를 허락한 뒤 [[대사]](大使)라는 특별 관직까지 제수해주었다. 이에 장보고는 한반도 서남부 앞바다, 지금의 [[완도]]의 장좌리, 죽청리, 대야리, 그리고 부속섬 장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이를 기점으로 서남해안의 상권 및 무역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장보고가 귀국하기 6년 전인 822년에 신라에서는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던 대사건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비록 이 시기의 신라는 후삼국시대 때와 달리 전국적인 반란을 제압할 만큼의 능력은 있었지만 왕위 계승을 둘러싼 진골 귀족들 간의 피튀기는 싸움으로 인해 왕권과 지방 통제력이 자연스레 무너지면서 큰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일각에선 828년 당시 [[통일신라]]의 형편상 1만의 군사를 내어 주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김헌창의 난]]이나 나중에 김우징의 쿠데타 때 병력을 보면 밑천 긁으면 가능하겠지만 쉽게 대뜸 내어줄 정도는 아니다.] 따라서 10,000명의 군사라는 것은 신라 정부의 일부 군사들과 추가로 장보고의 '''사병'''이지 않느냐는 추측도 있다. 만약 사병이 맞다면 장보고는 서양의 [[사략선]]처럼 진짜로 정부의 허가만 받았지 제멋대로 해적질을 한 셈이다. 물론 반대급부로 해적들을 아예 때려잡긴 했지만 앞의 설이 맞다는 가정 하에서는 단순히 불법 군사 조직일 뿐이다. 이후 장보고의 행보를 보면 정말 해상 마피아가 따로 없을 정도. 그러나 10,000명의 병력이 원래 사병이라는건 학계의 통설이 아닌데, 무엇보다 이 병력을 사병이라고 적은 역사적 기록이 일절 없다는 것이 크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사서의 기록에 보면 장보고가 정식으로 신라왕([[흥덕왕]])을 찾아가서 병력을 받아냈다는 것 밖에 나와있지 않는데[* 대왕이 장보고에게 1만 명을 주었다.(大王與保臯萬人) 삼국사기 권 44 열전 4 장보고, 정년] 그 병력이 사병이지 않냐는 것은 그냥 후대 사람들의 추측일 뿐이다. 사병을 먹이고, 입히는데는 엄청난 재원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이 때 신라는 [[후삼국시대]]처럼 막장까지 치닫진 않은 상황이었다. 세금 받아 재원을 마련하는 국가인 신라가 형편상 10,000명의 군사를 내주기 어려웠다면 대체 일개 개인인 장보고가 무슨 수로 사병을 10,000명이나 거느렸다는 말인가? 서남해를 지배했다는 수달([[능창]])이 동원한 사병의 규모조차 겨우 500명에 불과했으며 [[규슈]]지역을 잔뜩 헤집어놓은 [[현춘]]의 [[신라구]] 해적함대가 2,500명[* 사료상 기록으로 현춘의 해적함대는 왕명에 의해 조직된 것이므로 사병이 아니라 그냥 신라 해군이었을 가능성도 많다. 근대 이전에는 사략함대와 해군은 엄밀히 구분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 한반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병집단인 [[태조(조선)|이성계]]의 가별초가 1,000명~2,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성계는 1361년 독로강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친병 1,500명을 동원했고, 1362년의 홍건적의 침입으로 함락된 개경을 탈환하는데 친병 2,000명을 동원했으며, 1364년에는 [[기황후]]가 보낸 최유의 병력 10,000명을 토벌하는데 친병 1,000명을, 1370년 [[제1차 요동정벌]]때는 친병 1,600명을 동원했다. 이는 전부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치른 수 많은 전투 중 한번도 사병을 2,000명 이상 동원한 기록이 없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가별초의 병력을 1,000~2,000명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참고로 [[조사의의 난]] 때는 반란군이 10,000여 명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태조(조선)|이성계]]는 일개 고려의 지방호족이 아니라 조선의 [[태상왕]]이라 사병이 아닌 군대를 동원할 권력이 있었다.] 그나마 이성계는 동북면([[함경도]])을 영주나 다름없이 지배했기 때문에 이 정도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사병도 아닌 [[후고구려]]군의 나주 공략시 병력이 2,500명, [[후백제]]군의 나주 탈환전(910년)시 병력이 3,000명이다.[* 후백제와 고려의 병력은 나라의 기틀이 잡히면서 점점 늘어나 920년 이후에는 만 단위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 청해진을 설치하기도 전에 가지고 있던 사병의 수가 10,000명을 족히 넘었다면 장보고가 임금과도 견줄 수 있는 대호족 출신이란 말인데, 정작 사서인 [[삼국사기]]에 장보고의 고향과 아버지 및 조상에 대해 알 수 없다고 기록한 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장보고와 정연은 모두 신라 사람이지만, 그들의 고향과 아버지, 할아버지는 알 수 없다.(張保臯【羅紀作弓福】⋅鄭年【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郷邑父祖) 삼국사기 권 44 열전 4 장보고, 정년] 오히려 [[삼국유사]](권2 기이편 신무대왕 염장 궁파조)에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 것에 대해 신하들이 미천한 신분이라며 반대했다는 기록만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현재 학계의 입장은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이후 교역을 통해 재원을 충당하였고 그 영향으로 10,000명의 병사들이 점차 사병집단화 되었다는 점은 통설로써 받아들이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사병 조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0c7e0585c1f9949ea4b09289519ef7a3.jpg|width=100%]]|| ||해적들을 소탕한 장보고의 함대[* 1975년에 박광진이 그린 장보고의 해상 활동을 그린 민족기록화이다. 물론 그림 속의 갑주들은 모두 [[조선시대]]의 것으로 고증에 맞지 않다.]|| 아무튼 해로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원래의 취지였던 해적 소탕에도 열을 올려 [[삼국사기]]에 장보고의 활약으로 신라인 노예 매매가 거의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청해진은 사실상 당대 최고의 해상 무력 집단으로까지 발전해 동아시아 지역에서 엄청난 위세를 떨치게 된다. 838년 당시 [[일본]] 최고의 승려로 꼽히던 [[엔닌]](圓仁)[* [[천태종]] 승려로, 일본에서는 지가쿠 다이시(慈覺大師)로 더 잘 알려져있다고 한다.]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는 일본인이 신라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 가는데도 신라어 통역 김정남(金正南), 박정장(朴正長) 등을 고용하여 배마다 배치해 동행시킬 정도로 신라의 해상 영향력이 커져 있었다. 이 시기 중국 해안가도 대부분 신라인 집단들이 대거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엔닌은 당나라 활동 중 무사히 일정을 마칠 수 있도록 장보고에게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또 장보고는 [[산둥 반도]]에 적산법화원이라는 절을 세웠고 이 곳에서 신라, 일본 등에서 건너온 승려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엔닌이 있다.] 이 적산법화원은 [[장영]] 등 신라인들이 운영했고 정기적으로 강경법회를 열어 재당 신라인의 결집을 맡았다고 전한다. 현대 [[코리아타운]]의 [[한인교회]]와 비슷한 역할을 맡았던 셈. 적산법화원은 [[무종(당)|당무종]] 시대의 대대적인 불교 탄압 때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복원되어 중국에 남아 있다. 한편 장보고는 [[청해진]]과 제주 [[서귀포시]] 하원동에도 법화원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어떤 불교의식이 거행되었는지는 기록이 자세하지 못해 알 수 없지만 [[아미타]]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면 [[관세음보살]] 신앙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방 사회 구성원은 거의 바다와 관계가 깊은 직업이었고, 당시 바닷사람과 관세음보살 신앙의 관계는 [[삼국유사]] 민장사 항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상술한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 미국의 역사학자 라이샤워가 《[[동방견문록]]》, 《[[대당서역기]]》와 함께 [[세계 3대]] 기행문으로 생각한다는 책인데, 어디까지나 일본과 라이샤워 교수 본인의 개인적인 주장일 뿐이고, 한국에서는 입당구법순례행기 대신에 《[[왕오천축국전]]》 또는 《[[표해록]]》을 넣는 견해도 있다.]라는 여행기에 장보고의 도움을 정확히 기록해 놓았다. 덕분에 장보고의 활을 든 영정이 지금도 [[일본]] [[교토]] 히에이 산 적산선원에 있다. 행적과 명성이 [[한중일]]을 넘나들어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매우 국제적인 인물이었던 셈. 장보고는 [[교관선]]을 당나라에 수시로 파견했고, 당나라 동해안의 [[신라방]] 사회를 원격 통제하고 이를 활용해 막대한 무역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엔닌의 일기에 의하면 839년 6월 27일에 장보고가 보낸 두 척의 교관선이 적산포에 도착했는데, 청해진 병마사라는 직함을 가진 최훈십이랑이란 인물이 매물사[* 교관 선단의 우두머리.]로 수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최훈의 일정은 적산법화원[* 지금도 중국 산동성의 장보고와 관련된 유명 관광지이다.]에 들러 장보고를 대리해 이를 관리하던 장영 등을 위로하고, 7개월 반 동안 중국 동해안의 주요 항구 유산포, 해주, 초주, 양주 등을 들러 무역 활동을 한 뒤 다시 적산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적산포는 장보고 무역선의 중국 측 주요 거점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장보고는 동쪽의 [[일본]]에도 회역사라는 무역 선단을 주기적으로 파견했는데, 회역사는 어디까지나 장보고가 사적으로 보낸 무역 선단에 불과했지만 그 규모가 지나치게 커서 공식 사신단을 방불케 했을 정도였기에 당시 일본의 공식 대외 교역 창구 역할을 하던 [[규슈]]의 [[다자이후]][* 고대 일본에서는 제2의 수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후쿠오카]] 근교의 관광지로 유명하다.]에서는 회역사를 받지 말고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