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비 (문단 편집) == 기타 == * 서민에게 친근한 이미지 덕분인지 [[삼국지]]가 [[연극]]으로 공연되기 시작하던 [[송나라]], [[원나라]] 시대에는 장비가 [[주인공]]이었으며, 현대에도 장비는 중국인들이 매우 좋아하는 삼국지의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그래서 장비가 관련된 민간 설화나 [[야사(역사)|야사]] 또한 굉장히 많은 편이다. 호즙주에 관련된 이야기[* [[방통]]이 뇌양현 현령으로 임명된 후 아무 업무도 하지 않고 놀고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비가 감독관을 보내려 했는데, 뇌양현에 호즙주라는 명주가 있다는 걸 알고있던 장비가 자처해서 감독으로 떠난다. 당연히 뇌양현에 도착해 호즙주로 거하게 취하려고 술집부터 찾았지만 모든 술집에서 물을 타 밍밍한 호즙주를 팔고 있었는데, 방통이 애주가 장비가 온다는 것을 알고 마을의 모든 주점에 장팔사모를 든 사내가 오거든 호즙주에 물을 타서 내놓으라고 지시했다는 이야기. 이후엔 연의의 그 이야기로 진행되며, 장비도 모든 사건이 해결된 후 진짜 호즙주를 마시고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라든가, 적장과 지혜를 겨루기 위해 한 벙어리 문답[* 헌데 이런 부분은 [[착각물]] 스럽게 상대방이 진지한 질문을 던짐 - 장비는 상대적으로 유치한(시세를 논한건데 먹을거 얘기인줄 안다든가...) 질문으로 여김 - 장비가 대답함 - 그런데 상대방은 진지한 대답으로 착각 - 이하반복 - 상대방이 장비에게 놀라며 이야기 끝으로 흘러간다.] 등이 유명하다. * 장비가 서화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설이 있는데, 명나라 탁이창(卓爾昌)의 <화수원전(畫髓元詮)>과 청나라 <역대화정록(曆代畫征綠)>에서는 장비를 아름다운 사람을 그리기를 좋아한다고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 <탁주고루(涿州鼓樓)>의 북벽 상에 쓰인 <여와보천도(女媧補千圖)>와 장비의 고향부근 방수촌 만불각의 벽화에서는 모두 장비의 손재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청나라 때 <역대화기록(歷代畵記綠)>에 보면 장비는 줘저우인으로 미인도를 잘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줘저우에서는 "줘저우 시내 고성(古城)의 성벽이나 이웃마을 팡수(房樹)촌의 만물각(萬佛閣)에 그려진 벽화는 장비의 서화 솜씨를 후대 사람들이 그대로 모방해 그린 것"이라고 한다. 또 장비는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13살 때 이미 [[춘추]]를 깨우치고 [[손자병법]]에 능했다고 한다. 원나라 오진의 <장익덕사(張益德詞)> 서문에서는 '관후가 풍자하여 말하길 장비는 문예에 더 소질이 있다고 하였다. 문과 무의 운치는 다르지만, 옛사람들은 항상 여유를 두었다. 창을 휘두르는 힘이 손목에 들어가 붓을 휘두르는데 위나라의 종요와 오나라의 황상의 실력도 이보다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1961년 류보경이 편집하고 북경출판사가 충판한 글자 배우기의 부록 <정해 서예명가의 약력과 이력>에서는 '중국서예가들은 문인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무장 중에서도 적지않은 사람들이 있다. 장비와 [[악비]] 등이 그러하다.'라고 하였다. [[파일:20110921000080_0 (1).jpg]] 정딩(正定)현 조자룡 사당에 있는 장비가 썼다는 비문 '장비입마명'의 탁본. * 서화에 능했다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장비의 글이나 그림은 없다. 남북조 양나라 시기의 인물 [[도홍경]]의 <도검록(刀劍錄)>에는 신정후 촉대장이라고 도검에 쓴 글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나라 장군직을 했던 장비가 스스로 촉대장이라고 할 리 없다는게 중론이다. 노필이 살피길 '익덕이 칼을 만들어 새겼으면, 마땅히 스스로 한장(漢將)이라고 적었을 테지, 필시 촉장(蜀將)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은, 몽산(濛山)에서 돌에 새기며 스스로 한장이라 썼으므로,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제갈량이 처음 입촉해서 법률을 지을때 '한과'가 아닌 '촉과'로 지었다는 이유로 장비 역시 촉대장이라고 자칭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노필의 주장을 반박하는 설도 있지만, 촉과는 촉 자역을 다스리는 법이라는 의미에서 촉과라고 하는 것이지 유비의 정권 전체를 아우르는 법이 아니다.] 명나라 때 쓰여진 <태평청화> 등의 역사서에는 실제로 쓰촨성 류장(流江)현에서 장비가 절벽에 새긴 입마명이 발견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를 <장비입마명(張飛立馬銘)> 또는 <팔몽마애명(八濛摩崖銘)>이라고 부른다. 청나라의 문학가 기효람은 '어찌 누가 글자를 절벽에 새길줄 알았겠는가 거기장군 장비가 직접 쓴 글씨였다.' 라고 하며 장비를 칭찬하였다. 이 서예는 단정하고 소박하면서도 고풍스러웠으며 호방하고 생동감이 넘쳤으며 힘이 넘치는 필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한편의 우수한 서예 작품 못지 않았다. 다만, 장비입마명은 후대의 위작이라는 논란이 있는 만큼 주의가 요구된다. 입마명은 위작이며 장비는 미남이 아니다라는 글도 중국웹 상에 많이 퍼져있다. 일각에서는 실제 장비의 외모가 출중했다, 당대의 꽃미남이었다는 식의 이야기도 돌고 있는데, 딱히 근거는 없다. 애초에 장비의 외모를 묘사한 기록이 없고, 삼국지에서는 그저 '웅장위맹'하다고만 언급하고 있다. * [[사천 요리]] 중에선 장비가 만들었다는 장비우육이라는 요리도 있다. 다만 실제 장비가 만든거라고 볼 순 없고 후세에 덧붙인 것이다. 또 다른 관련 요리로는 쥔뚠쿼쿠이라고 자기가 쓰던 투구를 솥 대용으로 활용해 만들어먹었다는 전설이 붙은 페이스트리와 흡사한 튀김빵도 있다. 사천에는 취운랑(翠雲廊)이라는 곳도 있는데 고촉도(古蜀道)라는 옛 길에 속하는 검문촉도(劍門蜀道)의 일부구간으로서, 길가에 가로수 모양으로 3백리에 달하는 오래된 [[측백나무]]를 심어놓은 길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뜻은 푸른 빛 구름 같은 측백나무 숲길, 이쯤 되겠다. 서로는 재동(梓潼), 북으로는 소화, 남으로는 랑중으로 이어지는 세갈래 길인데, 이 길은 장비가 만든것으로서 장비가 파서태수를 지낼 때 랑중에서 소화에 이르는 구간을 산을 깍아 석판대로를 만들고 길 양편으로 측백나무를 심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측백길은 군대 행군 뿐 아니라 상인들과 백성들도 다니기 편리했다. 그래서 이 길을 장비백(張飛柏)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장비가 타고 다니는 말의 이름은 표월오(豹月烏)라고 한다. * [[임진왜란]] 당시의 민간 야사에 의하면 [[선조(조선)|선조]]는 장비의 환생이며, 전란 중 관우가 도와주었다고 한다. 참고로 [[만력제]]는 유비라서 [[임진록#s-1|임진록]]에는 만력제의 꿈에 관우가 나와서 선조가 장비의 환생이라며 파병을 역설하는 장면이 있다. 서민들 사이에서 장비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 [[명나라]] 시대의 소부에 따르면 [[양귀비]]와 장비가 등장하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들판의 해골을 수습해줬는데 그날 밤 "비요. 비요."라는 말을 듣고 문을 열어주니 양귀비의 혼령이 와서 고맙다면서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사람이 흑심을 품고 들판의 해골을 수습했는데 다시 그날 밤 "비요, 비요."라는 말을 듣고 문을 열어주니 장비가 나타나서 '내가 시원하게 바람을 쐬면서 누워 있었는데, 왜 함부로 너희 집으로 들여놓은것이냐?'하면서 호통을 쳤고, 흑심을 품었던 사람은 겁을 먹고 다음날 유해를 원래 있던곳에 되돌려 놓았다는 이야기다. 좀더 [[섹드립]]성이 강한 이야기로는, 장비가 항문을 들이대라고 요구하는 이야기도 있다. 흥부전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 놀부가 박을 타다가 안에서 "비로라" 소리를 듣고 동생 흥부가 양귀비를 첩으로 삼았던 것을 떠올려 양귀비냐고 물었다가 자기는 장비 장군으로 박 안타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해서 꺼내주는 대목으로 나온다. 당연히 꺼내준 뒤에는 놀부를 가지고 공기놀이를 했다. * 관제묘에 관우의 좌우를 보좌하는 관평과 주창이 있다면, 장비묘에는 장비의 좌우를 보좌하는 인물로 [[장포]]와 [[마제(삼국지)|마제]]가 있다. * [[청두 유비혜릉]]에는 장비의 상이 관우, 제갈량의 상과 같이 모셔져 있다. * 속담에서는 큰 소리로 몹시 야단스럽게 꾸짖음을 이르는 말로 '장비 호통이라', 상대편이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이쪽에서 상대하지 아니하면 싸움은 일어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로 '장비하고 쌈 안 하면 그만이지', 몹시 급하게 서두르는 일을 이르는 말로 '장비 군령이라'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 민담의 영향을 받아 [[삼국지평화]]의 주인공이다. 여포가 장비와 싸우다 겁에 질려 도망가니 말 다 했다. 본격 장비 헌사 소설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장비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민중들을 위해 장비의 활약이 많이 과장되어 있다. 여포에게 포위되자 조조에게 도움을 청하기위해 왕복해서 총 6번이나 여포의 포위망을 뚫질 않나, 장판파에서 고함소리로 장판교를 끊어버리질 않나, 손부인이 아두를 데리고 오나라로 가려할때 장비가 고함을 지르자 손부인이 수치심에 자살을 하질 않나 한마디로 장비가 나서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 망탕산에 들어가 있을 때는 황제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연호가 쾌활이었다. 유비와 재회하자 황제 자리를 유비에게 준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를 하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장비에 대해 일본 학자 이나미 리츠코는 이 작품이 민중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다보니 폭발적인 활력을 가진 장비의 매력에 중점을 두어서 파천황적인 재미가 있다고 얘기했다. 삼국지평화에서 술주정뱅이에 다소 거친 캐릭터상이 이미 완성되지만 민중들이 즐기는 평화에선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유교의 영향으로 주인공의 위치는 유비, 제갈량에게 뺏기면서 거친 이미지만 남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