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쉐밍 (문단 편집) == 생애 == 1908년 봉천성에서 장쭤린과 그의 첫째부인 조귀계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쭤린은 장쉐밍이 자신이 이전에 쏘아 죽인 일이 있던 라마승의 환생이라 여겨서 장쉐밍을 좋아하지 않았다. 동북강무당을 졸업했으며 1928년 [[일본 제국]]에서 장쭤린에게 아들 한명을 유학보내라고 제의하자 장쭤린은 장쉐밍을 보내기로 결정,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시켰다. 형이자 동기인 [[장쉐량]]과 사이가 좋아 장쉐량과 자주 편지 교환을 했는데 그 중 하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생이 이국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라에 수치가 없도록 처신하고 부형의 얼굴에 체면을 깎지 않아 형은 매우 기쁘다. 동영의 인사들은 모두 장래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중국의 군벌이나 관료처럼 마작이나 아편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동생은 이러한 것들을 꼭 지키기 바란다. 형은 동생의 지식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장래 학업을 성취한 후 귀국하여 구관료들의 악습을 밟지 않기 바란다.|| 1928년 장쭤린이 [[황고둔 사건]]으로 사망하고 [[동북역치]]가 선포되어 동북이 [[국민정부]]에 합류한 이후 장쉐밍은 학업을 마치고 1929년 귀국했다. 처음 동북군에 입대하여 장교로 활동하다가 [[중원대전]]으로 하북성이 봉천군벌의 영향권에 들어오자 1930년 10월 텐진시 시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동삼성 공안국장, 동북 정무위원회 위원, 동북 재정위원회 위원을 역임했고 요씨와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1933년 톈진시 시장을 사직하고 유럽과 미국으로 외유를 떠났다. 독일에서 전 국무총리 [[주계검]]의 딸 주락균을 만나 결혼했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유럽에 거주하다가 1943년 [[영국령 홍콩]]을 경유하여 귀국해서 텐진에 살았다. 1943년 [[왕징웨이 정권]]의 군사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나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에 국민정부에 중용되어 동북 보안사령부 중장 참의, 동북 행영 참의실 부주임 겸 중장 총참의 등의 요직을 지냈다. 요심전역에서 국민정부군이 패배하자 1949년 1월 가족을 거느려 텐진으로 돌아왔고 [[푸쭤이]]의 항복으로 베이핑이 함락된 이후 [[중국 공산당]]에 합류했다. 1950년 화북 혁명대학에서 공부, 졸업 후 톈진시 건설국 원림처 인민공원 관리소 부소장이 되었으며 1959년 4월 정협 전국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이후 텐진시 건설국 부국장, 텐진시 고문, 톈진시 정협 상무위원,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톈진시 위원회 주임위원, 국민당 혁명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문화대혁명]] 중에 박해를 받았으나 살아남는데 성공, [[덩샤오핑]]의 집권까지 보다가 1983년 4월 9일 75세로 사망했는데 차남 장붕거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 일생에 오직 한스러운 게 하나 있다면 [[장쉐량|형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장래에 기회가 생긴다면 네가 꼭 나의 이 말을 형님께 전해다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