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영자 (문단 편집) == 생애 == 1944년 10월 25일 [[전라도]] 목포시 죽교동에서 장병준과 이화섭 사이에서 3남 4녀 중 3녀로 태어나 1953년 [[서울특별시]]로 올라왔다. [[명동성당]] 옆에 있던 계성여자중학교와 [[계성고등학교(서울)|계성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기대학교|경기실업초급대학]] 보육학과에 다니다가 [[숙명여자대학교]] [[교육학과]]로 [[편입학]]하여 졸업하였다. 대학생 시절 [[결혼]]을 2번 하였으나 모두 [[이혼]]하였고 부유한 집안의 내력을 앞세워 [[이철희(군인)|이철희]][* 무려 21살 연상이다]와 호화로운 [[결혼식]]을 치렀던 것으로 알려져 사회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1982년 남편을 앞세우며 고위층을 대상으로 한 [[단군]] 이래 최대의 경제 사기사건인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을 주도해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파일:1545358820566.jpg|width=100%]] ||구속되는 장영자의 모습|| 1991년 가석방된 후에도 용인술, 처신에 대한 자신감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언론 보도를 내는가 하면 다시 시중 은행의 주요 간부들을 자신있게 찾아다녔다. 하지만 1994년에 다시 140억원대 [[어음]]사기 사건을 저질러서 4년간 복역하게 되었다. 일명 '2차 장영자 사건'으로 여기에 연루된 [[동화은행]]과 [[서울은행|서울신탁은행]]에도 불똥이 튀어 은행장들이 사임하고 이들 기관들도 징계를 받았다.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8년에 8.15 특사로 석방되었으나 2000년 구권 화폐 사기사건으로 교도소에 재수감되었다. 2016년 출소 예정인 줄 알았는데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63930|2015년 1월 22일 출소했다.]] 2018년 12월 20일자 언론 보도를 통해 출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15년 7월부터 2017년까지 4차례에 걸쳐 사기죄를 저지른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5&aid=0000697837&viewType=pc|*]] 결국 2020년 4월 9일 대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면서 4번째 실형이 선고되어 사람은 고쳐 쓸수 없다는 말을 그대로 보여주는 산증인이 되었다. "사업 자금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지인을 갈취하고 "남편 이철희의 [[삼성전자]]와 [[에버랜드]] 관련 증권을 현금화한다"고 사람들을 속였다고 한다. 남편 이철희 역시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그 사건]]의 공범으로 몰리며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