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지량 (문단 편집) == 생애 == [[1924년]] [[12월 15일]] [[전라남도]] [[나주시|나주군]]에서 태어났다. 광주서중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21회)를 졸업한 뒤[* [[조상호(1926)|조상호]] 전 [[문화체육관광부장관|체육부장관]]이 동기동창이며, 훗날 그의 사돈이 될 정진기 매경 창업주가 학창시절 교생이었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예과 60기로 입학했고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를 [[8.15 해방|1945년 8월 15일]]에 졸업했다.[* 패전으로 [[일본군]]으로 [[임관]]은 하지 못 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5기로 졸업해 육군소위로 임관했고 [[공군]]이 창설되자 옮겼다. 중등학교에서 일본 육사로 직행한 수재로, 생도시절에는 독립운동가로 한창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던 "[[김일성]]"처럼[* 이때의 김일성은 북의 그 돼지라기 보단, 일본육사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김경천]] 장군이라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생각으로 중국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학교 성적도 꽤 우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육사에 진학해 독립운동을 할 생각이었다는 주장은 본인이 자신의 회고록에서만 주장한 이야기로 그 신빙성이 높지 않다. 장지량 장군 회고록의 신빙성에 대한 논란은 아래 [[장지량#s-3|논란]] 부분 참조.] 박 전 대통령은 장지량이 초급 장교였을때부터 그를 마음에 들어하여 좋게 보았기 때문에 웬만한 사안은 경청해주며 흔쾌히 들어주었다는 후문. [[김신조]]의 서울 침투 사건 당시 美 5공군 사령관 매키 중장[* Seth Jefferson McKee(1916.11.06 – 2016.12.26) 최종 계급은 대장.]과의 인연으로 김신조의 124부대 및 김일성 숙소의 위치 같은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051102&parent_no=1&bbs_id=BBSMSTR_000000000228|미국의 극비 정보를 공유하는데 성공]]했으며,[*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당시 우리 전투기를 급파해준 덕분에 도움을 받게 된 매키 중장이 보답한 것이라 한다. [[SR-71]]참고] 사건 후 대노한 박정희 前 대통령이 대대적인 보복을 지시하자, 실무진들과 공격계획을 입안하였다.[*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051117&parent_no=1&bbs_id=BBSMSTR_000000000228|푸에블로호 피랍 사태]] 및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051121&parent_no=1&bbs_id=BBSMSTR_000000000228|베트남 전쟁 국면과 맞물려 미국측이 만류]]했다고 한다.] 주미대사관 [[국방무관]], 제10전투비행전대장, 공군본부 인사국장, 작전국장, [[제11전투비행단]]장, 공본 작전참모부장, 공군사관학교장, 공군참모차장을 거쳐 1966년에 공군참모총장에 올랐다. 참모총장시절에는 지방 시찰에 나선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을 헬기에 직접 모시고 수행하면서, 참모총장의 지위를 대장(大將)으로 격상시키고(후임부터 적용), 공군의 중요한 안건을 이른 시일 내에 현안으로 올려 공군을 지원하는데에 진력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경쟁자들에게 견제를 받게 되었는데, 개중에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끼고 공격한 사람까지 있었지만 신중한 처신으로 살아남았으며, 전역하는 자리에서도 이 일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군인 신분으로 대한중석 회장을 지냈다. 1968년 이임했고 후임자는 대한민국 공군의 첫 대장인 [[김성룡(공군참모총장)|김성룡]] 대장이다. 전역 후에 에티오피아 대사, 필리핀 대사, 덴마크 대사와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 [[대한체육회]] 부회장, [[성우회]] 회장, 한국군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전장(戰場)과 기업 경영[* 복마전 양상을 띤 대한중석의 누적된 부정적 작태를 일신하고 흑자로 전환하는데 성공했다.] 양 쪽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둔 인물로 상황판단과 응용력, 처신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5년]] [[2월 2일]] 향년 91세로 별세.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676449.html|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