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쩌민 (문단 편집) === 집권 기간 === 전반적으로는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가리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라는 덩샤오핑의 노선을 이었고, [[1997년]]부터는 자신감을 얻어 "대국으로서 책임있는 자세를 가진다"라는 식의 '유소작위(有所作爲)', 즉, '''필요한 역할은 한다'''로 나아갔다.[[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9902230|#]][* 그 뒤가 후진타오의 [[화평굴기]](和平崛起, 평화롭게 우뚝 섬)이며, 후진타오 후반은 돌돌핍인(咄咄逼人, 기세 등등한 힘의 외교)이라는 말도 나온다. 여하간 도광양회의 기조 속에 슬슬 유소작위를 갖추는건 지금까지도 중국 패권의 기본 원리이다.] 최고직인 [[중국 주석|국가주석]](政)에, 중국 공산당 총서기(黨)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軍)까지 겸임한 최초의 인물. 이전의 국가 주석은 상징적인 자리로 [[리셴녠]], [[양상쿤]]이라는 당 원로가 맡았고[* 이건 북한도 그래서 [[김일성]]이 주석으로 전면에 나선 건 [[1970년대]]고 그 이전엔 주석제가 아예 없었고, 북한 헌법상 국가 원수는 [[김두봉]] 같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맡았다. 김일성은 내각 [[수상]]이었고 이는 행정 수반에 해당한다. 물론 조선 노동당 총 비서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 노동당에 장악된 최고 인민 회의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총 서기는 당의 최고 직함이 된게 공산당 중앙위 주석이 폐지되며 분리되어 나온 [[1982년]]부터이므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계승한 셈이며[* 당 주석은 군사위 주석보다 서열이 높아서 실제 서열과 모순이 컸으므로 총서기를 따로 분리하여 덩샤오핑이 후계자를 기르는 직위로 이용했다. 당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 회의란 기형적 회의체를 통해 참석권이 없는 덩샤오핑의 말을 들었다. 여러모로 실권자와 당직이 모순이 된 건 사실이었던 셈.], 군사적 자리인 군사위 주석만 [[덩샤오핑]]을 계승한 셈이다. 이 자리는 모두 [[후진타오]]에게 계승된다. 다만 중국에서 최초로 당-정-군의 권력을 모두 장악한 인물이라는 건 사실이 아닌데, 일단 장쩌민은 정부의 최고위직인 [[중국 총리|국무원 총리]]를 겸임한 적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마오쩌둥 사후 [[화궈펑]]이 당 주석,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당시 국가 중앙군사위원회는 없었다.], 국무원 총리를 역임했기 때문에 그 타이틀은 장쩌민이 아닌 화궈펑이 된다. 어차피 덩샤오핑은 저런 공식 감투가 없어도 충분한 권위가 있었던 것이다. [[90년대]] 중반 [[차오스]](喬石, 중앙 정치국 위원, 서기처 서기 - [[1980년대]] 이래 당시 당내 권력 3위)가 그의 권력에 맞섰으나 [[1998년]] 이미 그는 재빠르게 권력을 장악했고, 차오스를 은퇴[* 73세로, 70세 이상이 넘어 은퇴.]시켰다.[* 차오스는 장쩌민과의 대립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파룬궁]](무해백익이라고도 말했다.)에 긍정적이고 [[인권]]을 강조하던 면이 있던 인물인지라 서구 측에서는 안타깝게 여기던 감이 있었다. 물론 최근 나온 그의 회고록에서도 천안문 사태는 빠져있다.] 이는 쩡칭훙(曾慶紅)을 영입했던 게 절묘했기 때문이다. 쩡칭훙은 [[리펑]]과 연대하고 캐스팅 보터 리루이환을 지지시키며 후진타오기의 [[리커창]] 후임도 막아버렸던 "장쩌민의 [[제갈량]]"이었다. 임기 기간 대부분 동안 [[넘사벽]] 덩샤오핑이 배후에 있었다.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후계자로 세운 후로는 공식적으로는 모든 지위를 은퇴하고 평당원으로만 머물러 있었으며, 언론 노출도 거의 없이 모든 정무를 장쩌민에게 넘겨주고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막후에서는 엄청난 권위로 다른 보수파 당 원로들 및 장쩌민의 경쟁자들의 반발을 제압하면서 장쩌민을 밀어주었다. 1992년 [[노태우]] 정부 당시, 북방 정책이 결실을 맺어 한중 수교가 이루어졌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방중해서 장쩌민만 회동한 것을 가지고, 일부 한국 언론이 왜 최고지도자인 [[덩샤오핑]]을 만나지 못했냐고 비판 기사를 썼는데, 당시 덩샤오핑은 형식상 아무 직함 없는 평당원이었기 때문에 정상과 만나는 것은 격이 안맞는 일이었고, 노태우뿐 아니라 다른 외국 인사들도 덩샤오핑이 아니라 장쩌민을 만났으며 이후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한 이후에는 장쩌민이 진정한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덩샤오핑이 1992년 "개혁 개방만이 살길이다"라고 강조한 남순 강화를 할 정도로 1990년대 초반까지는 공산당 내의 보수파의 반발이 심했고, 마오쩌둥의 유산이 중국 사회 사회 곳곳에 남아 있었으나 장쩌민 시절에는 완전히 이를 청산하고 중국이 개국되었다. 즉 확실하게 개국된 중국은 바로 이 장쩌민의 시대에 열렸다. [[주식시장]]과 [[코카콜라]], [[NBA]] 중계, [[맥도날드]]로 대표되는 개방. [[한국]]과의 [[수교]]도 그의 시대에 있었다([[1992년]]). 최초 방한([[김영삼]]), 최초 방미(with [[빌 클린턴]]), 최초 방일([[오부치 게이조]]와 함께 [[http://www.hani.co.kr/h21/data/L981130/1p94bu0d.html|# 당시 기사]]) 등 진기록이 넘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라고 집권 당시에는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이덕에 빌 클린턴하고도 사이좋게 지낸 편이였다. 2000년 8월 말에 중국의 휴양지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미국 [[CBS(미국 방송)|CBS]]의 시사프로 '60분'에 출연해 저널리스트 마이크 월러스와 인터뷰를 했는데 통역을 거치지 않고 직접 미국 기자와 대화할 정도로 능통한 영어 실력을 보여주었다. 스스로는 [[중학교]] 때 영어를 배웠다면서 자신의 영어 실력에 대해 겸손해 하지만, 통역이 되기도 전에 직접 기자의 말을 알아듣고 즉흥적으로 답하며 때론 직접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을 보면 결코 영어 실력이 보통은 아니다.[* 실제로 장쩌민은 1990년 미국 [[ABC(미국)|ABC]]의 유명 앵커 바바라 월터스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천안문 항쟁 당시 탱크를 막아섰던 화제 인물인 [[탱크맨|왕웨이린]]의 생사를 의심스러워하는 서방 측을 향해 어느 정도 실마리가 되는 답을 직접 영어로 미국 기자에게 전하기도 했다.] 게다가 [[천안문 6.4 항쟁]] 당시의 상황을 추궁하는 기자의 날카로운 질문에 시종일관 여유있는 태도를 보일 정도로 멘탈도 매우 강단 있는데, 특히 천안문 항쟁에 대한 재평가를 시사하는 발언까지 나와서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0024036|당시 기사]] 여하간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항쟁]]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겪은 직후 집권한 장쩌민에게 있어 사회 안정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필수 과제였다. 그래서 그는 중국 공안 이외에 [[중국 인민무장경찰부대]]를 확대 개편하였다. 사실상 한국의 [[경찰청 의무경찰|전경]] 내지는 [[의무경찰|의경]]과 비슷한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이는 중국 내부의 사상과 자유를 탄압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 장쩌민의 임기 중에 [[파룬궁]] 신도들을 잔인하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탄압하는 정책 역시 시작되었으며 '''[[까야 제맛|장쩌민은 파룬궁의 대원쑤로 두고두고 욕을 먹게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임기 중 러닝 메이트인 국무원 [[총리]]는 [[리펑]](李鹏, 전반기 5년)과 [[주룽지]](朱镕基, 후반기 5년)[* 이름 가지고 농담이 많긴 했지만 현대판 [[포청천]]으로 "100개의 [[관(장례)|관]]을 준비해라. 99개의 관은 그들의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내 것이다"라며 죽기 살기로 부패와 싸워온 이미지의 인물. 이 이미지는 [[원자바오]]가 계승했다. 리펑은 자오쯔양 때부터 러닝메이트로 자오쯔양보다 덩사오핑의 지지로 실권이 강했으며, 주룽지 역시 실권이 강한 편이라서 얼굴 마담들은 아니었다.] 참고로 이들 모두 이과다. 이른바 삼개 대표 사상을 "주요 전략 사상", 쉽게 말하면 핵심 [[이데올로기]]로 내세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중국 공산당은 > 항상 중국의 선진 사회 생산력의 발전 요구를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先进社会生产力的发展要求;) > 항상 중국의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을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先进文化的前进方向;) > 항상 중국 대부분의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最广大人民的根本利益.)" 대강 정리하면 경제 성장, 문화 진보, 민생. 뒤에 보면 알겠지만 후진타오도 한 건 했다. [[강유]]의 후손이라는 말이 있는데, 강유는 姜씨고 장쩌민(江澤民, 강택민)은 江씨다. 한국어 위키 백과에만 있던 말로 지금은 사라졌다. 여담으로 전임자 [[덩샤오핑]]도 비슷하게 [[등애]]의 후손이라는 말이 있는데, 장쩌민과 달리 덩샤오핑은 진짜로 등애의 후손이 맞다. 매우 강력한 권력을 가졌으나,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제외한 국가주석과 당 총서기 직을 2003년 후진타오에 넘기고 퇴임하였다. 하지만 논란의 여지를 남겼는데, 중공 중앙군사위 주석은 [[2004년]]까지 1년간 더 유지하면서 바로 군권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밀당]]인 셈인데, 상하이방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설이 많다. 상하이방은 주로 처음부터 당 조직에서 활동하는 공청단 파와는 달리, 여러 국영 기업체에서 실적을 올려서 관리로 전직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장쩌민 자신도 국영 자동차 회사가 출세의 시발점이었다.), 이재에 밝은 면이 있지만 그만큼 비리의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반 부패 단속에서 걸리는 인물들이 많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