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쩌민 (문단 편집) === 퇴임 후 === [[파일:external/photo-media.daum-img.net/20121108151112684.jpg]] 후진타오 옆자리를 차지한 장쩌민이 현임 지도자 같은 인상을 보여준다. [[2011년]] [[7월 6일]], '''사망설이 나돌았었다.''' 하지만 다음 날, 바로 오보였다고 공식 발표했고, 이 방송을 낸 [[aTV|방송국]] 사장은 [[사임]]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병원]]에 [[입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퇴원]]했다고 한다. [[2012년]] 들어서는 공식 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다가, 2012년 11월 열린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후진타오 주석 바로 옆 자리를 배정받아 차기 지도자 [[시진핑]]보다도 높은 [[의전서열]]로 그의 권력이 아직 막강함을 보여주었으며, 실제 전국대표대회 결과 구성된 신임 중국 지도부도 그가 이끄는 상하이방과 협력 관계인 태자당 소속 시진핑이 당 총서기 및 중앙군사위 주석 직을 후진타오로부터 물려받았으며,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직도 대부분 상하이방과 태자당 소속 인물들이 물려받았다. 도올 김용옥의 견해에 의하면, 덩샤오핑이 장쩌민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기는 했지만, 장쩌민이 워낙 권력 의지가 강하고, 주위에 패거리를 잘 만드는 경향을 우려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무언가 제어책이 없으면 종신 집권을 할 가능성을 우려해서 자기 생전에 이미 [[후진타오]]를 장쩌민의 후임으로 못박아 놓았다고 한다. 사실 후진타오는 재임 내내 장쩌민 또는 장쩌민 일파와 권력 다툼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후진타오의 [[공청단]]파와 장쩌민의 [[상하이방]]이 치고받는 동안 태자당에서 말석 시진핑이 집권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시진핑은 사실 태자당 내에서도 [[보시라이]]에 밀렸으나, 보시라이가 권력을 남용하다가 몰락하면서 태자당에서 선두에 나서고 결과적으로 집권까지 이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후진타오가 장쩌민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장쩌민의 후계자이자 상하이방의 황태자 천량위의 정치생명이 끝나기 전까지 이야기다. 장쩌민에게 군사위 주석을 물려받은 후에도 파워게임에서 밀리던 후진타오지만 천량위를 부정부패 문제로 정치생명을 끊은 것을 기점으로 여러 상하이방 인물들을 몰아내며 최고지도자다운 파워를 보여주기도 했으며 후진타오는 시진핑에게 군사위 주석직을 바로 넘겨주는 대가로 장쩌민과 동시에 정치에서 물러나는 물귀신 작전을 펼쳤다. 이 거래가 성사하자, 시진핑은 5세대 1기 상무위원들 7명중 4명이나 상하이방이었지만 이들을 집요하고 철저히 몰아냈다. 특히 상하이방의 중추이자 중국에서도 손에 꼽는 막강한 권력자 저우융캉 정법위 서기를 [[베이징 친청 교도소]]에 보내 텃밭에서 채소나 기르는 신세로 만들며 시진핑이 장쩌민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다. '''한마디로 시진핑 시대에서 장쩌민은 실질적 영향력이 없다고 봐도 좋다.''' 게다가 상하이방은 본질적으로 1970-80년대 장쩌민과 상하이 지역에서 일한 사람들이 주축이며, 장쩌민이 주석으로 등극한 이후에는 신진 세력들이 충원되지 않으면서 시간이 갈수록 노장화되어 은퇴하자 당내 세력이 약화되었다. 상하이방의 가장 젊은 세대가 시진핑과 비슷한 1950년대생이다. 여기에 기업체 출신이 많아서 부패 단속에 걸리는 자들이 많았고, 시진핑은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반부패운동을 벌여 상하이방의 핵심 인물들을 상당후 축출했다. 젊은 세대가 없는 계파 특성상 시진핑 이후에는 소멸되는 것이 시간문제일 뿐이다. 참고로 집권 기간을 살펴보면 마오쩌둥(27년) 다음으로 2위(15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기간은 넘사벽. 이건 덩샤오핑이 81년에야 주석이 되어 8년 만에 자리를 물려준 탓이 크다. 거꾸로 말하면 천안문 사태가 아니었으면 이런 승계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AKR20170227133200089_01_i.jpg]] 2015년 8월 24일, 해외의 반중 화교 언론 보쉰[* [[https://boxun.com/]]으로서 미국에 서버를 둔 반중 언론이다. [[장쯔이]]의 [[보시라이]] [[성상납]]설을 보도했다가, 장쯔이의 고소미에 걸려 거액을 물어주고 정정 보도를 했다.]과 [[파룬궁]] 계열 [[대기원시보]]에서 장쩌민이 부정부패 등의 혐의로 전격 체포되었다는 [[가짜뉴스]]를[[https://kr.theepochtimes.com/군권-장악한-시진핑-장쩌민-처리는-법대로_395701.html|#]] 보도했으나, 승전 70주년 [[전승절(중국)|전승절]] 열병식에서 후진타오 전 주석과 함께 참석한 것이 생중계로 잡히면서 거짓임이 드러났다. 아들 장몐헝의 체포설도 반중언론이 지어낸 가짜뉴스이며, 정부가 검열하는 [[바이두 백과]]에 멀쩡히 현재 상하이 과기대 총장으로 재임하고 있다고 나오고 있다. [[https://baike.baidu.com/item/%E6%B1%9F%E7%BB%B5%E6%81%92/3395490|#]] 2019년 10월 1일 70주년 국경절(건국 기념일) 기념 [[열병식]]에도 보좌관의 부축을 받으며 시진핑, 후진타오와 함께 천안문 망루의 주석단에 나왔다. 후진타오가 집권시기보다 나이가 많이 들고 백발이 되어서 조금 덜 드러났지만, 90대의 나이 때문인지 혼자 걸을 수 없을 만큼 심히 노쇠해진 모습을 보였다. 열병식 직후 실시된 대규모 민간 퍼레이드에서 자신의 대형 초상화가 지나가고 광장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자신의 지도자 시절 모습이 비춰질 때도 별 반응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래도 염색의 힘을 빌려서 그런지 90이 훌쩍 넘은 사람치고는 아주 동안인데, 염색을 안한 후진타오보다 젊어 보인다는 평도 있을 정도이다. 2021년 7월 1일 천안문광장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100주년 기념 행사에 후진타오 전 주석은 참석했지만, 장쩌민은 건강상의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참석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