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쩌민 (문단 편집) === 중앙 정계에서의 발탁 및 집권 === 1989년 4월 15일, 개혁파의 거두였던 [[후야오방]] 정치국 상무위원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이후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대중들이 천안문 광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들은 민주화와 부패청산 등을 외치면서 계속해서 시위를 이어갔는데 인원이 수십만에 달할 정도가 되었다. 5월달이 되자 베이징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서 후야오방을 추모하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었다. 장쩌민은 언론인들의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위 참여를 호소하는 지방 신문사들을 폐간시켜버렸다. 장쩌민의 단호한 조치에 공산당 원로들은 매우 흡족해했다. 천윈과 리셴녠은 장쩌민을 매우 크게 칭찬했고 덩샤오핑은 양상쿤을 불러 장쩌민을 높이 평가했다. 양상쿤도 동의하면서 그가 시위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을 뿐더러 마르크스 구절들을 영어로 읊을 수도 있을 정도라고 칭찬했다. 5월 27일, 덩샤오핑은 양상쿤, 천윈, 리셴녠, 펑전, 덩잉차오, 왕전, 보이보 등 원로들을 소집하여 이미 사표를 집어던지고 광장에 나가 시위대의 편에 선 자오쯔양의 후임으로 누구를 총서기로 선출할지를 논의했다. 모두가 덩샤오핑의 의견을 요구하자 덩샤오핑은 장쩌민이 가장 적절한 선택인 것 같다고 했다. 원로들은 모두 동의하였고, 장쩌민은 [[베이징]]으로 긴급호출돼서,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실권자]]였던 [[덩샤오핑]]에게 당 [[총서기]]를 맡으라는 지시를 듣는다. 이는 덩샤오핑이 장쩌민의 능력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이었다. 장쩌민은 부임 준비를 위해 일단 상하이로 되돌아갔다가 5월 29일 베이징으로 돌아오는데, 덩샤오핑은 이미 시위대의 유혈 진압을 결정해 놓고 있었고, 6월 4일 군 부대가 시위대를 진압하는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가 발생하여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나게 된다.[* 일부 반중 인사들이 장쩌민을 천안문 학살의 책임자로 놓기는 하지만, 이렇게 전후 관계를 살펴보면, 장쩌민은 사건이 진행되는 시간의 대부분을 상하이에서 보냈고, 사건 당시에는 인수 인계 때문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진압 결정이나 유혈 사태에 거의 관여하지 못했다.] 이 와중에서 덩샤오핑이 후야오방 이외의 후계자로 낙점해 놓았던 국무원 총리 [[자오쯔양]]이 시위대에 동정적인 발언을 했다가 실각했고, 장쩌민이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장쩌민 후임 시장이 바로 [[주룽지]]인데 주룽지는 장쩌민과 1980년대 상하이에서 초반부터 같이 일해 왔으며, 호흡이 잘 맞아서 나중에 장쩌민은 그를 총리로 불러들인다. 장쩌민은 1989년 6월 말 열린 당 중앙위원회에서 당 총서기로 임명되었다. 8월에는 자신을 상하이에서 보좌했던 여러 부하들을 중앙에 불러들여 여러 중요 자리를 맡기면서 자신의 사단으로 삼는데, 이들을 속칭으로 "'''[[상하이방]]'''(上海幇, 상하이 마피아)"라고 한다. 이들 중에서는 장쩌민 밑에서 총리를 지낸 [[주룽지]]가 있다. 상하이 인사인 장쩌민은 여러가지로 다른 계파의 견제를 받았지만, 상하이방이라고 불린 이 사단에 상당한 인재들이 많았고, 이미 장쩌민을 후계자로 결정해 놓은 덩샤오핑은 다른 원로들에 비해 발언권이 컸기 때문에, 다른 계파의 여러 경쟁자들을 찍어 누르고 덩샤오핑의 후계자 자리를 확보했다. 이렇게 하여 1993년에는 [[양상쿤]]의 뒤를 이어 [[국가원수]]인 [[중국 주석|국가주석]] 자리에 오르고, 1997년 후견인인 덩샤오핑이 사망하자, 실질적인 중국 [[최고지도자]]의 위치에 오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