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회태자 (문단 편집) == 생애 == 655년에 태어나서 656년에 노왕에 봉해졌다가 661년에는 패왕이 되었으며, 672년에 옹왕이 되었고, 이름을 이덕(李德)으로 고쳤다. 674년에는 다시 이현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다음해(675)에 동복형이었던 이홍이 죽자 같은해 6월 5일에 황태자가 되었다. 장회태자 이현은 학문을 즐겨 《[[후한서|후한서주]]》를 지었다.[* 이 장회태자 주석은 [[2014년]]에 민음사에서 《후한서》 <본기>를 번역하면서 모두 빠짐 없이 번역되었다. 번역자는 민음사 대표 장은수였다. 그리고 2018년에 명문당 출판사가 <지>를 제외한 《후한서》 <본기>와 <열전>을 진기환씨가 번역한 것을 출판했다.[[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barcode=9791188020447&orderClick=JAH|해당 홈페이지]] <지>가 번역되지 않은 점은 아쉬우나 원문 역주본에 [[장회태자]] 이현의 주석이 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높다.] 이런 가운데 [[측천무후]]가 총애하는 명숭엄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자는 승계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영왕(이현, [[당중종]])은 [[태종(당)|태종]]의 모습과 흡사하며, 상왕([[당예종]])의 상이 제일 귀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장회태자는 점점 의심이 자라났고 또한 궁중에서는 장회태자가 측천무후의 소생이 아니라 측천무후의 언니인 한국부인과 고종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소문까지 퍼지면서 더욱 불안해했다. 측천무후는 '''북문학사'''에게 《소양정범》과 《효자전》을 편찬하도록 하고, 장회태자에게 이를 하사하면서 자주 편지를 써서 나무랐다. 그런데 680년 명숭엄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측천무후]]가 이를 의심했으며, 장회태자는 색을 좋아해 노비인 조도생과 친해져 금과 비단을 많이 내려줬다. 위승경이 편지를 올려 간했지만 듣지 않았으며, 측천무후가 사람을 시켜 그 일을 고발하게 했다. 결국 장회태자 이현은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고, 장안으로 옮겨져 유폐되었으며, 681년 11월 8일에 파주(巴州)로 옮겨졌다가 684년 3월에 측천무후가 보낸 [[구신적]]으로 인해 별실에 유폐되고 자결했다. 사후 측천무후는 현복문(顯福門)에서 거애하고 이현을 옹왕(雍王)으로 추봉하였다. 장회태자의 동생 [[중종(당)|중종]]이 복위한 뒤 사도로 추증되었고 장회태자의 관을 건릉(乾陵)으로 옮겨 매장하였다. [[예종(당)|예종]]이 즉위한 뒤 황태자로 추증되어 장회(章懷)라는 시호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