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문단 편집) === 귀국자에 대한 북한의 대우 === 조총련의 눈물겨운 북한 추종과는 달리 [[북한]]에서 조총련계 이주자들에 대한 현지주민들의 처우는 한 마디로 '''[[이단|이질적 존재]]'''. ‘[[쪽발이|째뽀]]'[* ‘재일동포’(在日同胞)를 북한에서는 줄임말로 ‘재포’라고 부르는데, 이 말을 세게 발음한 것이다. 이는 일본제 물품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라는 비하하는 멸칭으로 부르면서 일본과 자본세계의 불순한 물을 먹고 온 이단아로 치부한다. 법적으로도 '''무조건 [[동요계층]]'''[* 혹은 복잡한 군중] '''이하로 분류되며''' 분류 과정에서 [[적대계층]]이 되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암암리가 아닌 '''대놓고''' [[토사구팽|차별과 감시가 존재하고 사회적 진출에 많은 제약이 따른다고 한다.]] 사실, [[재일교포 북송]] 귀국사업 당시에도 [[북한]]을 선택한 상당수의 조총련 출신 교포들이 이런 저런 사정으로 '''[[정치범수용소/북한|정치범수용소]]에서 일생을 마치거나 [[북한]] 사회에서 [[증발]]한 일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수용소의 노래]]의 저자인 [[강철환]]씨의 경우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조총련 지역 간부 출신으로 있다가 북송교포 귀국사업 때 북한으로 간 경우이다. 이러한 현실이 알려지면서, 조총련계 교포들의 이반을 가속화하기도 했으나 북송된 교포들은 일종의 볼모이자 인질이나 다름 없었기에 [[일본]] 현지의 친척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총련에 충성하고 [[북한]]에 [[셔틀|돈을 송금해야 하기도 했다.]] 이런 북한 현지 인식도 모르고 [[재일교포 북송]]선을 탔던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은 불행한 삶을 살았다. 물론 일본 내의 재일동포 차별 대우 문제도 있긴 했다. 당시 [[일본 정부]]에선 재일동포를 골치덩어리로 치부하며 암암리에 차별했고, 50년대 중반 즈음 북한이 사실상 [[SCV]]가 필요해서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일본측에 제안하자 이에 일본 정부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겉으로는 인도적인 목적으로 내보내는 것이라며 명분을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골칫덩어리도 떠나 보내고, 거기에 세금도 아낄 수 있다며 좋아했다. 다만, [[고용희]]가 [[김정일]]의 부인이 되면서 [[북한]]의 조총련에 대한 차별대우는 어느 정도 시정되었고 [[1990년대]] [[고난의 행군|경제난]]이 닥친 이후에는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당연한 것이 일반인들은 수시로 굶는 게 일상이 된 반면, 재일교포들은 꽤나 여유로운 생활을 누렸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가용을 가진다거나 일본에서 친척들이 벌어온 돈으로 당국과 함께 사업을 한다거나 장마당에서 장사를 해먹어서 돈을 버는 식이었다. 사실 조총련계가 일본에서 하위층에 속한다고 하지만 [[애시당초]] '''압도적인 일본과 북한의 경제력 차이'''를 생각해 보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90년대 중반에 일본의 1인당 [[GDP]]가 4만 달러를 넘어섰는데,[* 참고로 같은 시기 '''[[미국]]'''의 1인당 GDP가 2만 달러 대 후반이었다.] 이건 [[버블시대]] 및 엔고의 영향이지만 그걸 감안해도 당시 북한의 1인당 GDP는 500달러 선까지 떨어졌다.[* 북한의 80년대 초반 1인당 GDP는 700달러가 넘었고 1989년엔 800달러에 가까웠지만 90년대 초반에 이미 600달러 밑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총련계 교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아예 사라졌다는 얘기는 아니며, 아직도 사회적인 차별이 남아있다. 은행업(을 빙자한 고리대업)으로 돈은 많이 벌었지만 사회적으로 극심한 차별에 시달렸던 중세 유럽의 [[유대인]]들에 비길 만하다. 참고로 일부 [[종북주의자]]들은 북송된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이 북한에서 북한 주민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며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망언]]을 하고 있는데, 이를 논파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바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결과다. 이건 [[남한]]으로 치면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형식적으로는 [[대한민국]]보다 훨씬 빨리 재외국민에 대해 선거권을 인정했고, [[제4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는 그래서 조총련계 대의원들이 7석이나 차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5기까지는 조총련계가 최고인민회의에 의석수를 작게나마 확보했나 싶더니, [[숙청|6기부터는 슬그머니 조총련의 존재가 사라지고]], 다시 조선사회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이 2, 3당으로 떠오른다. [[제5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제5기 대의원 선거]]와 북한의 70년대 대격변 시기와 시점이 일치하고, 이 시기에 조총련 의장 추대와 관련하여 조총련 내부의 분열이 있었다는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북한사회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은 모조리 [[숙청]]당했고, 북한사회에 협조적이거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조총련계 인사~~[[노예]]~~들만 살아남았다는 분석이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B%B6%84%EB%A5%98:%EC%A1%B0%EC%84%A0%EB%AF%BC%EC%A3%BC%EC%A3%BC%EC%9D%98%EC%9D%B8%EB%AF%BC%EA%B3%B5%ED%99%94%EA%B5%AD%EC%9D%98_%EC%84%A0%EA%B1%B0|참고자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