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저우언라이 (문단 편집) == 한국과의 관계 == [[장제스]]와 [[마오쩌둥]], [[쑨원]]이 그렇듯이 [[한국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1919년 [[3.1 운동]]을 지켜보면서 조선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난카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연극을 공연했으며, 황푸군관학교에 재직하면서 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과 친해졌고, 많은 조선인 제자를 두었다. 저우언라이의 대인적 풍모는 [[한국사]]에 대한 언급에서도 잘 드러난다. '''[[발해]]-[[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던 중국사회과학원에 그만두라고 경고를 했으며''', 그것에 대해 [[북한]] 파견단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0073370|이 문제를 다룬 신문기사]] 또한 1962년 북한측이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기 위해 [[만주]] 지역에서 발굴조사 허가를 요청했을 때 이를 승인하기도 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4&oid=037&aid=0000029064|#]] 그러나 한국(남북한)을 소국, 중국을 대국으로 보는 중국 특유의 가치관에서 자유로운 인물은 아니었다. 작은 나라인 한국에 대국인 중국 같은 넓은 시각을 기대할 수 없으니 대국인 중국이 한국 같은 작은 나라들에 야량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그가 한국(북한 포함)을 배려한 것은 진심으로 좋은 사람이어서라기보다는 이웃 사회주의 나라에 대한 배려와 대국으로서 소국을 품어준다는 전통적 중화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요즘 [[중국]] [[동북공정|어용학계들이 보이고 있는 역사왜곡]]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현재의 중국은 [[동북삼성]]의 고조선, 고구려, 발해, 부여 등 자국 땅에 있는 한민족의 역사 유적에 대해 발굴은 물론이고 참관도 못하게 하며 외국인이 발굴현장을 구경 하려고 하면 들어오지도 못하게 한다. '''특히 한국인'''. 그래서 관련 전공인 한국 역사학자들은 일부러 옷도 패션센스 없게 입기도 한다. 외국인들이 한국인과 중국인을 구분하는 방법 중 하나가 패션 감각이라고 한다. 한국인들은 최소한 옷을 입는 데는 신경을 쓰는 편이지만 중국인들은 그런 거 없다고... 말투도 조선족으로 위장해서 중국을 드나든다는 이야기도 있다. 발해 - 고구려사 이외에도, [[6.25 전쟁]] 초반 [[김일성]]이 승승장구하며 우쭐해있을 때 [[미국]]이 개입할 것을 예상하고 김일성에게 이를 경고했다. 그러나 [[근자감]]에 쩔어있던 김일성은 이를 듣지 않는다. 저우언라이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미리 중공군 26만을 국경에 배치시키고, 한반도 정찰을 명령해 [[베이징]]에서 있었던 전략회의에서 "'''[[더글러스 맥아더]]가 상륙한다면''' [[군산]]이나 [[원산]]이 아닌 '''[[인천 상륙작전|인천에 상륙할 가능성이 높다]]"고 정확히 예측한다.''' 실제 미 합참과 해군이 처음 제안한 상륙지는 군산이었지만 맥아더가 목표를 인천으로 바꿨다. 군사전략적 안목까지 갖췄었다는 소리. 저우언라이 본인도 대장정, [[중일전쟁]], [[국공내전]]에 참여했으며 강서 소비에트 시절, [[중국 국민당]]의 공세에 맞서 홍군의 총지도부를 운용해본 경험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저우언라이는 9.28 수복 이후 [[유엔군사령부|유엔군]]과 [[한국군]]이 계속 북진하자 [[미국]]에 "이 전쟁은 내전이므로 남조선군이 홀로 북진하는 것은 무방하나(즉 중국이 개입하지 않겠다.),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것은 중국에 대한 도발로 간주하겠고, 이후 모든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여러 번 경고했다.[* 저우언라이는 1950년 10월 5일,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면 개입할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사실 이때도 당시 중국군의 비루한 상황상 공산당 간부들은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는 선에서 멈춘다면 그냥 개입을 포기하고 후퇴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허나 북한이 예상보다 더 빠르게 밀리면서 압록강 근처까지 다가오자 중공도 대만 점령을 포기하고 급하게 동북 지역으로 있는 병력 없는 병력 다 끌어모으게 된다.] 허나 당시 중국의 참전 의사 혹은 중국군의 전력 자체를 경시한 UN군이 그대로 북진하자 중국은 항미원조전쟁이란 미명하에 참전을 개시하게 된다. 다만 본격적인 출병에 앞서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과는 달리 한반도 출병에 반대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국가를 재건해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이 상황에서 출병을 해버리면 많은 자원이 그 쪽으로 전용되어 재건이 늦어지게 되고, [[미국]]을 상대로 이긴다는 보장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북한이 망하더라도 외교를 통해 미국의 [[중국]] 진공은 저지할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2022년 공개된 저우언라이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전문을 보면, 저우언라이는 처음부터 개입에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893059&plink=ORI&cooper=NAVER|#]] 그러나 [[마오쩌둥]]과 [[펑더화이]]의 강경론이 득세했고, 결국 중공군 참전으로 이어진다. 이때 중국군 개입을 공식 회견으로 표명한 사람이 저우언라이였다. 당시 국무원 총리 겸 외교부장(외교부장관)이었기 때문에, 그의 직위에 따른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존속과 [[김씨왕조]]의 성립이었지만 중국 입장에서야 [[베이징시|베이징]] 코앞에다 완충지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휴전협정을 먼저 제기하였다. 어찌보면 [[정주영]] 회장과 [[현대자동차]]의 은인(?)이기도 하다. 1974년 최종 타결된 [[중국]]-[[일본]] 간 무역협정에서 "[[대한민국|남조선]]이나 [[대만]]과 거래하는 일본 기업의 중국 진출을 불허한다"는 내용이 들어간 4가지 원칙([[저우 4원칙]])을 강력하게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는데, 때문에 [[토요타]]와 합작 관계가 끊긴 [[신진자동차]]가 도산하면서 [[현대자동차]]가 그 반사 이익을 누린 것. 현대자동차는 [[토요타]]와 합작하려 했으나, 이 원칙 때문에 합작을 포기하고 대신 미쓰비시와 합작하게 된다. 지금 와서는 합작을 애걸하던 현대자동차가 미쓰비시보다 커졌으니, 격세지감. 잘 알려지지 않지만,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확장하는 [[조중변계조약]]에서 많은 양보(?)를 하여 [[백두산]] 전체가 아닌 반만 가져갔다. [[백두산]]까지 자기네 땅이라 주창하는 중국의 관점에선 넘겨주었다고 해도 어색한 표현은 아니다. 자세한 건 [[백두산]] 문서로. 그래서 중국에서 한동안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홍위병]]도 이를 들어 저우언라이를 비난했다. 또한 '깐수 사건'으로 유명한 [[정수일]] 교수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 본래 중국 [[조선족]] 출신인 정수일은 조선민족(한민족)으로서의 민족주의를 자각하고 [[북한]] 귀화를 결심하였다. 이 때 정수일은 그냥 망명하는 게 아니라 저우언라이에게 직접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정수일과 같은 인재가 중국을 떠나겠다고 하자 대단히 아쉬워하면서 "좋은 여성을 소개해 줄테니 중국에 남아 달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정수일의 고집을 꺾지는 못하고 귀화를 허락해준 뒤 신원보증을 해 줬다. 이때 저우언라이가 신원을 직접 보증해준 덕에 정수일은 북한에서도 숙청을 당하지 않았다. 1963년 6월 28일, 주은래 총리가 북한의 조선과학원 대표단과의 공식만남에서 중국의 고조선, 고구려, 발해사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역사왜곡과 침탈을 시인하고 사과했던 적이 있다.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라고 고백했다. 이어,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붙여 작게 하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사과의 뜻을 분명히 했다. 덧붙여 요하유역을 고구려와 조선의 땅임을 인정했다. 만주지방과 요하지역이 결코 중국 한족의 땅이 아니었음을 자백한 것이다.[* 다만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은 중국 내 소수민족 역사도 지들 역사라고 주장하는거라 한족 타령과는 조금 궤가 다르다.] 이어진 그의 발언은 감동적인 것이었다. “역사는 왜곡할 수 없다. 두만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으며 심지어 예로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고,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모두 역사학자의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는 말로 질타했다.[[http://www.financialreview.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35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