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국칠웅 (문단 편집) ==== 쇠퇴기 ==== [[위무후]] 사후 그의 아들 위앵과 공중완이 임금 자리를 두고 싸우다가 외국 군대까지 끌어오는 소동을 벌이면서 이미 조짐이 심상치 않았지만... 결국 위앵이 군위를 이어받고 나서 왕호를 사용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위혜왕]](혹은 양혜왕)이다. 일단 벌인 사업으로는 조, 제나라와 싸워 이기고, 도성을 옮기고,[* 다만 이는 진나라에 의한 압박의 결과다.] [[맹자]]를 초청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그런데 [[상앙]]이 위나라를 떠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을뿐더러 그 상앙이 위나라의 상어 땅을 뺏아 버리고, 월형을 받은 [[손빈]]이 제나라로 가버리게 하고 제나라에 선빵을 후렸다가 그 손빈에게 마릉에서 대군이 전멸에 가깝게 관광당하는 등([[마릉 전투]])완전히 굴욕의 나날을 보내며 국력이 급속도로 쇠퇴한다. 사실 위나라의 쇠퇴기는 위문후의 뒤를 이은 위무후가 오기를 견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좋지만,[* 이미 위무후 시기부터 문제가 생겼는데 우선 조나라와는 원래는 사이가 좋았는데 위무후 쪽에서 먼저 조나라를 쳐서 사이가 금이 갔고 이에 조나라에서 위나라의 속국을 건드려 서로 사이가 더 나빠졌다.] 양혜왕 때는 가히 [[화룡점정]]급이라...[* 이 뿐만 아니라 양혜왕 시기에 접어들면서 위나라에도 한계점이 생겨났다. 자세한 내용은 [[마릉 전투]] 문서 참조] 이후부터 위나라가 전국시대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일은 아예 없다. 한나라와 마찬가지로 진나라의 땅셔틀화.[* 특히 위군 12만명이 전사한 이궐 전투에서의 참패가 제일 뼈아팠다고 할 수 있는데 그나마 이궐 전투 전만 해도 그래도 왕년의 위세는 없어지지 않았는지 위양왕 대에는 위, 한, 제 3국이 힘을 합쳐서 진나라를 상대로 승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궐 전투 후에는 진나라에게 땅 400리나 떼어주는 조건으로 화친하는 등 완전히 힘이 빠져버렸으며 그나마도 1년 뒤 진나라가 재침공해 성 61개나 털어갔다고 나온다(...) 즉 마릉 전투가 위나라 쇠퇴의 시작이라면 이궐 전투는 그 쇠퇴를 완전히 확정짓는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도 안희왕 대의 일도 결국 신릉군의 업적이다. 실제로 안희왕대의 기록도 신릉군과 관련되지 않으면 진나라에게 졌다, 진나라에게 땅이 넘어갔다. 정도밖에 없다.] 그나마도 안희왕 시절에는 [[신릉군]]의 활약으로 망하기 일보직전이던 조나라를 구원해주고 합종군을 결정하기라도 했는데 다음 대인 경민왕 시절의 기록은 정말로 진나라에게 꼬박꼬박 땅바친 기록이 대다수다. 결국 위나라는 그나마 걸출했던 [[신릉군]]마저 경질된 후 18년 뒤 망한다.[* 마지막 왕인 위왕가가 수도인 대량에서 그나마 저항을 했지만 [[왕분]]의 [[수공]]으로 인해 결국 패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