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라도 (문단 편집) === 사료 === [[태조(고려)|태조 왕건]]이 [[훈요 10조]]에서 언급한 '차현(차령) 이남, 공주강([[금강]]) 바깥'이 이 지역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고, 이를 두고 [[지역감정]]과 결부시키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런 의견은 '''사서에선 공주강 이북으로 적혀있는 걸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이남으로 해석해 억지로 전라도와 결부시키는 등 사실상 역사왜곡이랑 다를 바 없는 엉터리 해석'''을 기저에 깔고 있다.[* 다른 사서들을 총합해서 정확히 말하면 훈요 10조에 언급된 지역은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공주시]] 북부 및 [[청주시]]에 해당한다.] 또한 지금의 차령산맥은 1903년 [[일본인]] 지질학자가 인부 4명과 당나귀 6마리로 14개월 동안 만든 산맥체계에 의해 처음으로 생긴 지명이라 왕건이 말하는 차현이랑은 아예 다르다. 심지어 차령산맥을 100여 년 동안 배워왔지만 2000년 대에 국토연구원에서 인공위성을 통해 측정한 결과 지하에 지맥도 없고, 그냥 흔한 낮은 구릉지대라고 한다. 역사에도 없고, 실재하지도 않던 차령산맥을 기준으로 해석하려니 공주강 이북을 공주강 이남으로 곡해하거나 흐지부지 넘어가거나 아예 생략하는 억지를 부린 것이다. 잘못된 훈요10조 해석에 관한 사안은 [[훈요 10조]] 문서에도 잘 정리되어 있다. 당장에 조작된 해석을 믿으면 고려는 전라도 인물을 등용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고려 역사 곳곳에는 전라도 출신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풍수지리의 비조 [[도선]],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버린 [[신숭겸]], 6대 [[성종(고려)|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보필하며 태사(太師)로 추증된 최지몽도 전라도 출신이다. 무엇보다 고려 왕실 자체가 전라도와 밀접한 관계이다. 태조 왕건의 장자(長子)로서 왕건의 적통을 이어 왕위에 오른 [[혜종(고려)|혜종]]은 전라도 나주 출신이며, [[공예태후]]는 고려 18대 왕 의종, 19대 왕 명종, 20대 왕 신종의 모후(母后)이시자 여인의 몸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고려 왕실을 지키신 분인데 전라도 장흥 출신이다. 고려 2대 혜종의 직계인 고려 8대 왕 현종은 거란과의 전쟁에서 전라도 나주로 몽진을 가기도 하였다. 그런 8대 현종 즉위 후 3대 정종에서 7대 목종의 세력 기반인 충청도 일부 지역을 견제하려고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고려 왕조를 통틀어 불천지주(不遷之主)에 오른 왕은 태조, 혜종, 현종 세분 뿐이다. 애초에 '차현 이남, 공주강 바깥'이란 지역에 대한 해석에 문제가 있다. 고려에서 강 외(外) 즉 강의 바깥(外)은 강을 관할하는 행정구역 바깥을 의미하는데, 공주성은 공주강 남쪽에 있으므로 공주강 외(外)는 공주강 북쪽을 의미한다. 즉 차현 이남(금북정맥 이남)과 공주강 북쪽(금강 북쪽) 즉 그 사이 지역이 된다. 통일 과정에서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할 때, 청주 민호 1천호가 철원으로 이주하였을만큼 친궁예 지지기반이던 청주를 포함한 지역 일대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경상도]]와 함께 '하삼도(下三道)', '삼남(三南)'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삼남(三南) 의식은 1961년 5.16 당시 이북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던 군부에서 전라도 출신 장성들이 같은 삼남(三南) 출신을 지지한다는 명분 아래 경상도 출신 박정희를 지지하여 삼남(三南) 출신들이 이북 출신들을 군부에서 축출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붕당 정치가 시작되기 전 면앙 송순, [[기대승]], 이항 등과 같은 유학자가 나와 조선 [[성리학]]에 큰 영향을 끼쳤고, 붕당 형성에도 기여를 하였다. [[선조(조선)|선조]]시기 [[정여립의 난]]으로 인해 발생한 [[기축옥사]]에 휘말렸다. 직접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수백명이며[* 기축년 10월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20개월 사이에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는데, 조신(朝臣)·명관(名官) 중에 죽은 자가 10여 인이었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nb_12405001_009|#]]] [[정여립]]과 무관하게 [[정개청]]을 추존한 사실 때문에 금고된 자가 400명, 죄인으로 억울하게 몰린 자가 50명, 그 중 유배형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은 자가 20명에 달하는 등 호남유림이 와해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고 전라도가 [[반역향]]으로 일시간 지정되었으나, 정여립 출신 지역이 왕실의 관향으로 풍패지향(豊沛之鄕)인 [[전주]]이고 직후 벌어진 [[임진왜란]]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정여립이 전주 출신임을 들어 [[전주]]를 엮으려다 본관 자체가 사라진 가문도 있었다. 선조가 "짐이 간악한 정철에게 속아 호남의 어진 선비들이 고초를 겪었다"고 언급하며 호남에 대한 실질적인 복권이 이루어졌다. 호남과는 별도로 정여립 사건 자체는 이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집권한 [[북인]]에 의한 복권시도가 있었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북인도 숙청당하면서, 숙종 대에 [[남인]]도 경신대출척과 갑술환국으로 축출당하고 권력과 멀어지면서 반란으로 규정되었다. 당시 [[정여립]] 사건으로 호남 유림이 와해되어 어려움을 겪었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이 일어서니, 예를 들어 [[임진왜란]] 초기 관군이 기를 쓰고 싸운 몇 안 되는 전투 중 하나인 [[동래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해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도 감복했다는 동래부사(현 부산광역시장) [[송상현]](宋象賢)이 전라도 정읍 출신이고, 임진왜란 전투 중에서도 대혈전으로 꼽히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전라도 화순 출신,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黃進) 전라도 남원 출신, 사령관 격인 [[김천일]](金千鎰) 의병장 전라도 나주 출신, 사천 현감 장윤(張潤) 전라도 순천 출신, 형제 의병장 강희보, 강희열 전라도 광양 출신...등. 결국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최경회 전사, 황진 전사, 김천일 전사, 장윤 전사, 강희보 전사, 강희열 전사, 김천일 아들 김상건 전사, 고경명 아들 고종후 전사...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 100,000명에 대적해 10,000명이 안되는 6,700명으로 싸웠으며, 호남 의병은 3,500명이 참전하여 3,500명이 순절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영 전라도 여수를 떠나 한산도로 군진을 옮기는 시점에 즈음하여 친구인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쓴 편지에서 그 동안의 소회를 밝히며 '호남 없이는 나라도 없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사적인 편지에서 호남의 지정학적인 전략적 중요성을 언급하기보다는 정황상 그 동안 생사를 넘나들며 함께 지낸 호남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과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그나마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호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하겠다. 호남 지역은 [[정여립의 난]]으로 호남 내 동인 계열이 많이 숙청되면서 [[인조반정]] 이후에는 [[노론]]·[[소론]]의 세가 강했다고 한다. 동인이 대거 사라졌으니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인 측면이 있고, 또한 이는 [[광산 김씨]]의 영향이 크다. 특히 서인의 종장(宗匠) 사계 김장생 가문이 그렇다. 사계 가문은 학문의 연원이 깊고, 종통이 무거워 한양 권문세가들의 기를 꺾을 수 있는 능력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한양 명문 거벌들의 수장으로서 종주(宗主) 역할을 하였다. 조선 양대 문벌(文閥)로 불리운 두 가문을 일컬어 [[광김연리달서|'연리광김(延李光金)]]' 또는 '광김연리(光金延李)'라고 하는데, [[연안 이씨]]와 [[광산 김씨]]가 각각 7명의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하였다(양관 대제학 기준으로 홍문관 설치 이전까지 포함하면 광산 김씨 8명이고, 연안 이씨도 조선 초기 대제학 이전 명칭인 대학사까지 포함하면 8명이다.). 정여립 사건 이전에도 동인과 서인의 세가 비슷했던 호남 지역과 달리 영남 지역은 북인의 몰락으로 세가 약해진 인조반정 이전에도 남인을 주축으로 동인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서인은 극소수였다. 호남 지역은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의병장 전라도 광주 출신 [[고경명]](髙敬命) 장군의 경우도 [[서인]]이었을만큼 처음부터 동인과 서인의 세가 비슷했던 반면 영남 지역은 북인이 몰락하고 서인 계통의 붕당이 집권한 이후에도 [[남인]]이 대세였다. 어느 조선 후기 척제(瘠齊) 이서구(李書九, 1754~1825)라는 사람이 단가 "호남가"를 지은 적이 있다. 이 사람은 1793(정조 17)년과 1820(순조 20)년 2차례 전라 감사를 역임한 바 있는데, 전라도 곳곳에는 이서구와 관련된 민간 전승이 다수 남아 있다. 이 "호남가"를 보면, 조선 시대 전라도의 여러 고을들이 나와 있다. 여기에는 진산(珍山) 등 누락된 고을도 있으며, 현재는 [[충청남도]]로 편입된 [[금산군]] 및 전라도에서 분리된 [[제주도]]도 포함되어 있다. 아래 시를 자세히 보면 각각의 고을 이름을 의역하여 나름대로 의미와 내용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서구는 천문, 수리, 풍수에 능했고, 이로 인해 여러 설화를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이서구가 "물은 30장(丈)이 내려가고, 땅은 30장(丈)이 올라온다"고 했던 곳은 훗날 새만금 간척지가 되었고, "이 앞으로 화마(火馬)가 지나간다"고 했던 곳은 훗날 기차가 지나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咸平([[함평군|함평]])''' 天地(천지) 늙은 몸이 '''光州([[광주광역시|광주]])''' 故鄕(고향)을 보랴 하고, >'''濟州([[제주시|제주]])'''[* 해방 이후 1946년 [[제주도]](현 [[제주특별자치도]])로 분리되기 전까지 전라도(1896년 이후 [[전라남도]])에 속해 있었다.] >漁船(어선) 빌려타고 '''海南([[해남군|해남]])'''으로 건너갈 제, >'''興陽([[고흥군|흥양]])'''에 돋은 해는 '''寶城([[보성군|보성]])'''에 비쳐 있고, >'''高山([[완주군|고산]])'''에 아침 안개 '''霊岩([[영암군|영암]])'''을 둘러 있다. >'''泰仁([[태인면|태인]])'''하신 우리 聖君(성군) 藝樂(예악)을 '''長興([[장흥군|장흥]])'''하니, >三台六卿(삼태육경)은 '''順天'''心('''[[순천시|순천]]'''심)이요, 方伯守令(방백수령)은 '''鎭安'''民('''[[진안군|진안]]'''민)이라. >'''高敞'''城('''[[고창군|고창]]'''성) 높이 앉아 '''羅州([[나주]])''' 風景(풍경)을 바라보니, >萬丈(만장) '''雲峰([[남원시|운봉]])''' 높이 솟아 層層(층층)한 '''益山([[익산시|익산]])'''이요, >百里(백리) '''潭陽([[담양]])''' 흐르는 물은 굽이굽이 '''萬頃([[김제시|만경]])'''인데, >'''龍潭([[진안군|용담]])'''에 맑은 물은 이 아니 '''龍安'''處('''[[익산시|용안]]'''처)[* 문자 그대로 '[[용]]이 편안히 쉬는 곳'으로도 읽힐 수 있다.]이며, >'''陵州([[화순군|능주]])'''의 붉은 꽃은 골골마다 '''錦山([[금산군|금산]])'''[* 1963년 [[충청남도]]로 편입되기 전까지 전라도(1896년 이후에는 [[전라북도]])에 속해 있었다.]이라. >'''南原([[남원시|남원]])'''에 봄이 들어 各色花草(각색화초) '''茂長([[고창군|무장]])'''하니, >나무 나무 '''任實([[임실군|임실]])'''이요, 가지 가지 '''玉果([[곡성군|옥과]])'''로다. >風俗(풍속)은 '''和順([[화순군|화순]])'''이요, 人心(인심)은 '''咸悅([[익산시|함열]])'''인데, >異草(이초)는 '''茂朱([[무주군|무주]])'''하고, 瑞氣(서기)는 '''靈光([[영광군|영광]])'''이라. >'''昌平([[담양군|창평]])'''한 좋은 세상 '''務安([[무안군|무안]])'''을 일삼으니, >士農工商(사농공상) '''樂安([[순천시|낙안]])'''이요, 父子兄弟(부자형제) '''同福([[화순군|동복]])'''이라. >'''康津([[강진군|강진]])'''의 商賈船(상가선)은 '''珍島([[진도군|진도]])'''로 건너갈 제, >'''金溝([[김제시|금구]])'''의 금을 일어 싸 놓으니 '''金堤([[김제시|김제]])'''로다. >農事(농사)하는 '''沃溝'''百姓('''[[군산시|옥구]]'''백성) '''臨陂'''城('''[[군산시|임피]]'''성)을 둘러 있고, >'''井邑([[정읍시|정읍]])'''의 井田(정전)법은 納稅人心(납세인심) '''淳昌([[순창군|순창]])'''하고, >'''古阜([[정읍시|고부]])''' 春陽(춘양) 楊柳色(양류색)은 '''光陽'''春風('''[[광양시|광양]]'''춘풍) 새로워라. >'''谷城([[곡성군|곡성]])'''에 묻힌 선비 '''求禮([[구례군|구례]])'''도 하거니와, >'''興德([[고창군|흥덕]])'''하기를 나날이 時習(시습)하니, '''扶安'''齊家('''[[부안군|부안]]'''제가) 이 아닌가. >우리 湖南(호남) 좋은 '''法聖([[영광군|법성]])''' '''全州'''百姓('''[[전주시|전주]]'''백성)을 거느리고[* 여기에서는 '모든 고을의 백성을 거느린다'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다.], >'''長城([[장성군|장성]])'''을 널리 싸고 '''長水([[장수군|장수]])'''로 돌렸는데, >'''礪山([[익산시|여산]])'''돌 칼을 갈아 '''南平'''樓('''[[나주시|남평]]'''루)에 꽂아 놓으니, >어느 外方之國(외방지국)이 輕擧(경거)할 뜻을 둘까 보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