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라도 (문단 편집) === [[통일신라시대]] === [include(틀:9주 5소경)]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며 전라도는 신라에 복속되었다. [[685년]]([[신문왕]] 5년)에는 전국을 [[9주 5소경|9주로 나누고, 5소경을 설치하였는데]], 전라도에는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북도]] 지역에 [[완산주]], [[광주광역시|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남도]] 지역 [[무진주]]가 있었다. 한편 [[섬진강]] 일대 일부는 [[강주]](현 [[진주시]]를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경남]] 서부)에 속했는데, 옛 [[가야]]의 영역이다. 완산주는 완주로도 불렸는데, 지금의 [[완주군]]이 그 지명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그리고 완주의 완([[完]]) 자는 전([[全]]) 자와 뜻이 같으므로 전주의 유래가 되었다. 한편 무진주는 광주 근교에 솟아 있는 [[무등산]]의 어원이 되었으며 현재 광주광역시에는 [[무진대로]]라는 도로명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여하튼 이때부터 전북과 전남의 틀이 잡힌 것이다. [[757년]]에는 [[경덕왕]]이 전국의 지명을 중국식으로 고치며 비로소 전주(全州)와 무주(武州)[* 현재의 [[전라북도]] [[무주군]](茂州郡)과는 다르다.]가 되었다. 고로 훗날 [[후백제]]의 왕이 되는 [[견훤]]이 '무진주에서 일어나 완산주로 수도를 옮겼다.'는 기록은 엄밀히 말하자면 틀린 것이지만, 삼국사기 기록에서도 완산주와 무진주라고 언급하는 걸로 보아 훨씬 더 먼 훗날에 [[조선왕조]]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후 [[한성부]](漢城府)로 이름을 바꾸고 나서도 백성들은 여전히 관습적으로 한양이라 불렀던 것처럼 완산주가 경덕왕 대에 전주로 바뀌고 나서도 백성들은 관습적으로 완산주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이 시기에 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전라도에 정착했다. [[안승]]이 세웠다는 [[보덕국]]은 지금의 [[익산]]에 있었는데, [[문무왕]]의 묵인 하에 옛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의 영토 내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 보덕국은 신문왕 대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었고, 보덕국 유민들 중 일부를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로 옮기면서 [[남원경]]을 설치하였다. 그 나머지 보덕국 사람들은 서라벌 혹은 익산 이남 전라남북도에 분산 배치하게 된다. 이렇게 9주 5소경을 설치한 까닭은 동쪽에 치우친 서라벌의 지리적 특성 상 지방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도 한 몫 했지만, 가장 큰 목적은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을 다스려 신라에 동화되도록 라는 것이었다. 하여 최종적으로는 [[백제부흥운동]]을 잠재우고자 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당시까진 [[영산강]] 유역보다 다소 낙후되어 있었던 전남 동부 일대에 대한 개발사업이 행해지게 되는데, 이 시기에 통일신라가 전남 남부와 동부 일대 호족이나 인민들을 물리적으로 옮긴 예는 없으나 그 과정에서 원신라 지역 출신인들의 이주가 전남 중동부 일대에 이뤄지면서 오늘날 광주전남 서남부 일대의 영산강 호족들과 묘한 대립이 이뤄지게 된다. 이는 신라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으로 등재된 3곳 즉 공주, 부여, 익산 중에서 고구려로부터 가장 먼 익산 지역에 의도적으로 보덕국을 만들었던 것과 대강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되며, 신라 입장에서는 혹시 있을지 모를 백제부흥운동의 방지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오늘날 전라도 영역 전체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인들의 물리적 융합이 이뤄진 격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