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봉준 (문단 편집) == 생애 == 전봉준은 백제(百濟) [[개국공신]](開國功臣) 환성군(歡城君) [[천안 전씨]] 시조 전섭(全聶)[* 일본에 문물을 전해주며 깊은 관계를 맺었던 [[백제]]의 초창기 개국공신이며 천안 전씨 집안은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백제 최후의 국보급 불상]]을 남긴 흔치 않은 백제인의 [[후손]]이다.]의 후손이며, 서당이나 한약방 등을 운영한 것을 보면 조선 말기에 흔했던 몰락한 [[중인]] 또는 [[양반]] 집안으로 보인다. 전봉준의 부친은 1827년생으로 창혁(彰赫), 형호(亨鎬), 승록(承祿) 등의 이름과 함께 족보명은 기창(基昶)으로 나오고(세간에 알려진 이름은 창혁), 모친은 1821년생으로 언양(彦陽) 김씨(金氏)라고 되어 있다.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은 [[정읍시|고부]] 마을에서 향교의 장의를 했다고 한다. 촌로들에 따르면 전창혁은 장의가 아니라 동리의 일을 보는 사람(지금의 이장)이었다고도 하였다. 전봉준은 이런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다른 아이들처럼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유난히 키가 작아 5척(약 '''152cm''')에 불과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녹두]](綠豆)[* 콩과의 작물. 요즘에도 한국에서 키가 작은 사람을 "쥐콩만하다"고 놀리기도 하는데 이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라는 별명을 들었는데 가장 유명한 별명인 '''녹두 장군'''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젊었을 때의 가정 생활은 상당히 곤궁했으며〈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에 보면 땅은 논밭을 다 합쳐 세 마지기[* 약 6백 평(0.19ha)]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당시 빈농층이 소유했던 평균적인 수준이기는 하나 한 가족이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면적이다[* 성인 한 사람이 하루에 소비하는 식량을 산출하는 땅 면적 단위가 1평이다. 순수하게 곡물만 따지면 1마지기를 1년 식량 소비량을 산출하는 단위.]. 공초에 따르면 태인에서 살다가 30살 즈음 고부 마을[*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소재]로 들어와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한약방을 차려 한의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풍수지리]]를 보거나 사람들의 길흉사에 날을 잡아주기도 했으며 편지를 대필해 주기도 했다. 30대 때 [[동학]]에 들어가 접주가 되었고 1890년대 초반에는 [[운현궁]]에 있으면서 2년 남짓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있었던 적도 있다. 이에 연이 닿아 동학농민운동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이 밀사를 보내어 전봉준과 밀통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전봉준은 [[재판(법률)|재판]] 과정에서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를 완강히 부인했는데 흥선대원군을 보호하려고 한 건지는 알 수 없다.] 고부 봉기 직전 전봉준의 가장 두드러지는 행보는 1893년의 김제 금구(金溝)집회 참여이다. 금구집회는 '척왜양창의'를 외친 보은집회와 유사하게 '척양척왜'를 구호로 내세웠으나, [[최시형]]의 교주신원운동의 연장선인 보은집회와는 맥을 달리했다. 애당초 보은이 아닌 금구에 별도로 집결했다는 뜻은, 남접 세력들이 조정과 타협적이었던 최시형의 북접과 분리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손화중(孫華中) 대접주와 서장옥 접주 등을 중심으로 한 금구집회 세력은 보은집회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긍엽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재미있는 대목인데, 서장옥은 전직 승려 출신의 접주였고 긍엽은 아예 승려였다. 이처럼 동학과 갑오농민혁명에는 승려들의 참여도 적지 않았다.] 전봉준도 접주로서 금구집회에 참석했다가, 보은집회가 해산하자 같이 해산하였다. 전봉준의 고부 봉기는 단순히 학정으로 인해 우발적으로 터져나온 봉기가 아닌, 동학도들의 조직화와 정치 세력화라는 맥락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물론 학자에 따라 남접 세력을 북접과 별도의 '변혁지향세력'이라고 규정하는 건 지나치게 개연성으로만 전개된 주장일 뿐, 논리적 인과가 없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이 무렵 유명한 [[탐관오리]]였던 고부군수 [[조병갑]][* 양주 조씨 가문으로 [[영의정]]을 지낸 백부 [[조두순(조선)|조두순]]의 빽을 믿고 날뛰었다.]의 횡포가 극심했다.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한 후 부조금으로 2천 냥을 거둬오라는 요구에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마을 대표로 나서 항의하다가 화가 치민 조병갑한테 [[곤장]]을 맞아 죽는 일이 벌어진다. 이후에도 조병갑의 횡포는 계속되어 자기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우는 비용을 백성들에게 전가했는데 [[만석보]]라는 이름의 [[저수지]]를 백성들의 노동력을 동원해 건설하고 사용료도 백성들에게 강제로 징수하여 착취하며 지방 토호들에게도 돈을 빼앗는 등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결국 분노한 전봉준은 이때부터 나라를 개혁하겠다는 뜻을 품게 되었는데 1894년 농민 1천여 명을 이끌어 민란을 일으켰으며 만석보를 헐어버리고 [[관아]]를 습격해 빼앗긴 곡식을 되찾아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정작 모든 일의 원흉인 조병갑은 달아난 상태라 잡지 못했다. 그는 1898년 [[최시형]]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기도 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부랴부랴 조병갑 등의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새로이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한 후 안핵사 [[이용태(1854)|이용태]]를 보내 잘못을 시정하겠다고 하였는데 사태를 추스르기 위하여 파견된 이용태 또한 극심한 횡포를 부렸다. 전에 왔던 새로운 군수 박원명은 할 수 있었던 일이 없어 별 도움은 안 되었어도 농민들을 달래주기라도 했지만 이용태는 전혀 아니었으며 농민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행패를 부렸다. 이에 분노한 전봉준은 1894년 3월 각 지역의 동학 접주에게 글을 보내고 [[손화중]], [[김개남]] 등과 함께 동학 교도와 농민 1만여 명을 모아서 동학 농민군을 조직하여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켜 안핵사 이용태를 도주하게 만들었다. 이때 동학 교도 중심의 북접은 폭력에 반대하여[* 여기에는 [[교주]] [[최제우]]의 명예회복에 누가 될 것을 우려한 까닭도 있다.] 동학 농민군에 호응하지 않았다. 이후 동학 농민군은 승승장구하여 전주성을 점령하는 등 세력이 확대되었고 깜짝 놀란 조선 조정과 전주 화약을 맺으면서 잠시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이 [[파병]]을 요청한 [[청나라]]군과 [[톈진 조약]]을 핑계로 다시 파병한 일본군이 이미 조선 땅에 들어온 뒤였고 이들이 [[청일전쟁]]을 벌이면서 잠시 동안 이어진 평화는 깨지고 만다.[* 얼마 전 발굴된 일청 전쟁 선전 조칙 초안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이때 청나라뿐 아니라 조선도 선전 포고 대상에 포함하고 있었다는 게 밝혀졌다.] 청일전쟁 도중 일본이 군대를 보내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대한제국)|고종]]을 위협하면서 [[갑오개혁]]을 시행하자 전봉준은 '척왜근왕'을 외치며 동학 농민군을 모았다. 북접도 이에 합류하면서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북진을 시작하였으나 공주 [[우금치 전투|우금치에서 기관총을 비롯한 근대 무기와 월등한 조직력을 갖춘 조선 관군과 일본군에게 대패했고]] 몇 번 더 패전을 당한 끝에 순창으로 퇴각하였다. 전봉준은 군대를 모아 재기하려고 하였으나 순창군 피로리에서 만난 옛 부하 김경천(金敬天)[* [[연해주]] 빨치산 부대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김경천]](金擎天) 장군과 [[동명이인]]으로 시대도 다르고 한자도 다르다. 다행스러운 것은 배신자 김경천은 기득권들에게 철저히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졌고 비참하게 살다가 죽었다.][* <녹두 전봉준 평전>에 따르면 전봉준의 젊은 시절에 어느 스님이 "장차 백만 대군을 통솔할 상이다. 다만 경천을 조심하라"라고 했는데 결국 스님의 예언이 맞았다는 [[야사(역사)|야사]]가 있다.]의 밀고로 체포되어 도성으로 압송되었고 재판[* 재판장이 [[갑신정변]]의 주역 [[서광범]]이었다.] 후 동학농민운동을 지도했던 같은 지도자급의 동지인 손화중(1861~1895)[* 전라북도 정읍시 출생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이름은 손정식(孫正植), 자는 화중(華仲·和中·化中), 호는 초산(楚山). 언제부터 접주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892년 벌어진 전라북도 삼례의 교조 신원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인해서 접주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1894년 동학군의 전주 화약 후에는 전라남도 나주 지방에서 폐정 개혁을 주도하였고 우금치 전투가 끝나자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에서 붙잡혔다.], 최경선(1859~1895)[* 본명은 영창(永昌), 자는 경선(卿宣). 동학 농민군 영솔장으로 1893년 11월 고부 인근의 동학 접주들이 중심이 되어 농민 봉기를 준비했던 [[사발통문]](沙鉢通文) 거사 계획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고부 민란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우금치 전투 패배 이후 마지막 전투인 태인 전투에서 7천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2차 봉기에 참여하였고 12월 전라남도 동복현 벽성에서 농민군의 모집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된다.], 성두환(1845~1895)[* 충청북도 [[충주시|충주]] 지역에서 활약한 지도자로 충청도 청풍(현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송계리 출신. 1893년 청풍 대접주로 동학에 가담하여 1894년 7월 충청도 [[단양군|단양]]과 [[제천시|제천]] 지역을 대표하는 동학 집강에 임명되어 수많은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1894년 8월 탐관오리를 처벌하는 등 폐정 개혁 활동을 벌였고 우금치 전투 이후 강원도 지역에서 [[영월군|영월]]과 [[평창군|평창]]의 농민군과 연합해 10월 15일 [[정선군|정선]]을 점령하고 평창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김덕명(1845.10.29~1895.4.23)[* 전라북도 [[김제시|김제]] 출신으로 본관은 언양(彦陽), 초명은 김준상(金峻相), 자는 덕명(德明), 호는 용계(龍溪). 손화중에 버금가는 동학 농민군의 2인자로서 42세 때인 1886년 동학에 입문하여 최시형의 제자가 되었으며 삼례 집회에서 교주 신원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우금치 전투 이후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장흥리 안정사동으로 피신했다가 체포되었다.]과 함께 1895년 3월 29일(음력) 사형을 선고받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30일 새벽 2시 한양 무악재 아래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쳤다.[* 전봉준의 사형은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는데 최초로 근대적 교수형이 집행된 사례였다. 갑오개혁 이후였고 민간 범죄에 대해서는 교수형만 가능하도록 했기 때문에, 각본 재판이라고 해도 사형은 서양식 교수형으로만 집행해야 했다. 이후 정식 재판에 넘겨진 동학 지도자들은 전원 교수형에 처해진다. 사실 조선에서는 시체의 형상을 보존하는 형벌로서 [[효수]]보다 격이 높고 [[사약]]보다는 낮은 교형이 사형제도로 존재했던지라, '도적의 [[수괴#s-2|수괴]]'인 전봉준을 참수를 하지 않고 교형을 처했다며 분개하는, 매천 [[황현]] 같은 유림도 있었다고 한다(정작 서구에서는 참수와 [[총살형]]이 교수형보다 떳떳한 형벌로 취급되어, [[전범]]의 경우엔 일부러 교수형에 처하는 전통이 있었다. 참수보다 [[할복]]을 높게 치는 일본은 또 달랐다.).][* 사형 집행이 되기 전에 [[죽력고]]를 마시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며 죽력고를 마시고 난 뒤 기력을 회복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당당하게 요구해서 일본군들이 쫄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