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태일 (문단 편집) == 생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qVI2uSjoOKc)]}}}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v3WUGq9j4NI)]}}} || || {{{#ffffff ''' 꺼지지 않는 불꽃, 전태일 ''' }}} || [[1948년]] [[9월 28일]]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동(대구)|남산동]]에서 아버지 [[전상수]]와 어머니 [[이소선]] 사이에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고운 심성과 다정다감한 성격, 불의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 기질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재단사였던 그의 집안은 어렸을 때부터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다.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이사갔다가 [[서울특별시|서울]]로 이사온 후 아버지가 봉제 공장을 차려 어느 정도 먹고 살 수준의 생활을 영위한 적도 있지만 [[4.19 혁명]] 직후 거액의 사기를 당하는 통에 온 가족이 다시 가난의 구렁텅이로 빠졌다. 밥을 못 먹는 일은 일상이었고 이는 [[동대문 패션타운 관광특구|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시절까지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다니던 [[초등학교]]마저 중퇴하고 17세 무렵 무일푼의 몸으로 상경해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점에 이른바 '시다'라고 불리는 재단 보조로 취직했다. 이후 빠른 일처리와 뛰어난 실력으로 직장에서 큰 인정을 받고 빠른 시간 내에 시다에서 재단사로 승진하면서 다른 재단사 친구들과 힘을 모아 자신만의 가게를 창업하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 한 명이 심하게 기침하다가 각혈([[咯]][[血]])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녀를 병원에 보내기 위해 도움을 청하고려 했으나 알리지 말라고 애원[* 당시 평화시장에서 기술을 배우기 위해 푼돈에도 일하려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노동자들은 즉시 대체가 가능했다. 정부, 경찰, [[노동청]]은 이런 극악의 노동 환경을 모두 묵인했기 때문에 [[산업재해]] 인정이나 [[퇴직금]] 따위는 꿈도 못 꿀 시기였고 덕분에 사장 입장에서는 직원이 아픈 경우 해고하면 그만이었다. 즉 일방적으로 해고당하지 않고 계속 일을 하기 위해서 병을 숨기려고 한 것이었다.]하는 여공의 모습과 얼마 뒤 병에 걸린 여공이 해고된 걸 보게 되었다. 이후 재단 보조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 당시 평화시장의 구조는 맨 위에 옷감 등 재료를 쌓아 두고 2층은 공장, 1층에서는 생산된 제품을 판매하는 구조였다. 공장 내부는 고작 백열등 몇 개에 의존할 만큼 컴컴했고 '''환풍기가 전혀 없어서''' 두 시간만 일해도 눈썹에 먼지가 잔뜩 내려앉을 정도로 옷감 먼지가 잔뜩 날렸으며 공장 내부에는 합성섬유의 석유 냄새가 진동했다. 한정된 공간에 더 많은 노동자를 수용하기 위해서 '''단층을 복층으로 개조'''했고 그 결과 '''2평 공간에서 13명꼴, 7평 공간에서 30명꼴의 인원'''이 모여서 일을 했다. 근무 시간은 명확히 규정이 없어서 약 '''14시간 혹은 그 이상''' 일했고 휴일은 한 달에 약 '''이틀'''이었다.], 박봉[* 견습공인 ‘시다’는 임금이 교통비에 그칠 정도의 액수였고 이것으로 식사를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의류 판매 비수기에 미싱사가 임금을 받지 못하면 시다도 임금을 받지 못했다. 결국 1년 12개월간 그 푼돈이라도 받는 달이 7~8개월이었다.], 질병([[폐렴]] 등)으로 시달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보조 여공들을 돕는 것은 물론 그러한 노동 현실의 타파와 개선을 위한 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훗날의 [[YH 사건]]에서 보듯이 당시 여공들은 재대로 된 대우는커녕 공순이와 번호로 불릴 정도로 비참한 신세였지만 그런 시대와 다르게 전태일은 여공들에게 자신의 차비를 아껴 [[풀빵]]을 사주고 도시락도 주는 등 여공들을 자신의 동생처럼 아꼈며 주변 증언에 따르면 전태일은 근로 기준법을 준수할 뿐만 아니라 모범 업체라고 하여 요즘의 '사회적 기업'과 같은 개념의 기업체를 만들어 근로기준법 준수 및 직공들의 근로 여건 등을 개선시켜 평화시장에 있었던 업체들에게 직공들의 근로 여건 개선을 촉구하는 시발점으로 삼으려고 하는 등 당시로선 선구적인 안목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근로기준법]]이라는 노동 조건에 대한 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법률 내용을 [[독학]]하려고 하였으나 근로기준법 전문에 한자가 많아 내용을 도통 알 수 없어 "[[대학]]을 나왔더라면 또는 대학에 다니는 [[친구]]라도 있었으면 알 수 있었을텐데..." 라며 한탄[* 훗날 [[장기표]]나 [[김문수]] 등 서울대학생 노동운동가들이 전태일이 [[사망]]한 후 그의 모친 이소선을 찾아오자 "아이고 우리 태일이가 그래 [[서울대]] 댕기는 친구 있었으면 좋겠다 캤는데 이제사 찾아왔나."하고 오열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는 21세기와는 달리 대학 진학률이 10%여서 당시에 대학생은 [[엘리트]] 취급받기도 했다.][* 현재는 [[법률]] 전문을 [[한글]]로 열람 가능하다. [[http://www.law.go.kr/lsInfoP.do?lsiSeq=122686&efYd=20120802#0000|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에 근로기준법]] 항목이 있다. 다만, 그래봤자 예나 지금이나 법률 용어라는 것이 학식이 깊지 않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말로 범벅이 되어 있어서 온전히 알아듣기는 힘들다. 어차피 한자로 된 법률 용어를 한글로 소리만 받아적어 봤자 의미는 여전히 한자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전태일 평전』을 통해 알려진 그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의 대학생들에게 현실 참여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해설서를 구입하여 밤낮을 안 가리면서 읽었는데 말이 해설서지 법률 용어 투성이였기 때문에 [[국민학교]] 중퇴 [[학력]]의 전태일에게는 악전고투였을 것이다. 그래서 같은 [[동네]]에 살던 '광식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나이 든 대학생을 자주 찾아가 용어의 뜻을 묻기도 했으며 어떤 날은 해설서 한 페이지 읽는데 하루를 꼬박 새운 적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읽어낸 근로기준법상의 내용과 현실의 괴리를 절감한 그는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 운동 조직인 '바보회'[* 근로기준법 같은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일만 한 자신들을 [[바보]]라고 불렀기 때문이라 한다.]를 창립하여 현재 근로 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노력했지만 [[막장]] 현실 속에서 봉제 공장주들에게 밉보여 직장에서 [[해고]]된 후 평화시장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한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지냈고 그의 일화를 그린 전기만화 태일이에 따르면 평화시장에서 일을 못 하게 되자 [[구로공단]]에서 잠시 일했다는 언급도 있다. 1970년 재단사로 취직되어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은 이전에 바보회 활동을 같이 하던 친구들을 규합하여 '삼동친목회'를 조직해 한층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청계천 피복 공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노동 실태 [[설문조사]] 결과를 노동청에 제출한 것이 [[경향신문]]에 실리며 주목을 받은 후 사업주들과 협의를 벌이기도 했으나 현실의 장벽에 막히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정재계는 그들의 활동에 '[[사회주의]] 조직'이라는 빨간 딱지를 붙이고 노동자들이 이러한 움직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당시 한국에는 그럴싸한 근로기준법은 있었으나 형식적이었으며 감독 [[관청]]도 전혀 이를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 증언에 의하면 전태일 일행이 찾아가자 "알았으니 며칠만 기다려라"라고 해서 며칠 뒤에 다시 갔더니 '''"감사가 끝났으니 이제는 알아서 해라 이 [[빨갱이]] 새끼들아"'''라는 폭언이 담긴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이에 전태일은 깊은 좌절과 비애를 느끼고 더욱 강력한 행동을 보이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조영래에 의하면 전태일은 "누구 한 사람 죽는 것처럼 쇼를 한 판 벌려서 저놈들 정신을 번쩍 들게 하자[* 조영래, 《전태일 평전: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돌베개, 1991) 283페이지]"고 계획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청계천 앞에서 그저 형식에 불과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계획했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경찰]]과 고용주 측에서 동원한 패거리들에 의해 짓밟혔다. 좌절한 전태일은 동료들이 경찰, 패거리들과 치고받는 사이 평화시장 남쪽 계단으로 향했고 시위가 무산될 위기에 놓이자 마음을 굳게 먹고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자살|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평화시장으로 향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린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불이 붙어 [[작열통|끔찍한 고통]]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이 꺼질 때까지 저 말을 되풀이하면서 평화시장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주위에 있던 그의 친구들이 급하게 불을 끄면서 [[국립중앙의료원|국립의료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엉덩이를 제외한 전신에 3도 중화상을 입은 상태인 데다[* 이 때문에 당시 그를 진단한 의사의 말에 의하면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병원]] 측에서도 환자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전태일이 맞아야할 약물 주사의 비용이 1만 5천원, 2대면 3만원인데 전태일이 받던 연봉인 2만원보다 더 많은 고가였고 전태일의 집안은 빈곤층이라서 비싼 주사 비용을 댈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기본적인 응급 치료 이외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치료를 받고 싶으면 근로 감독관에게 보증을 받아달라고 요구했지만 근로 감독관마저 치료를 위한 돈 보증을 거부했다.[* 후에 모 대학의 한 교수가 술회하기를 정말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당시 한국의 사회상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돈이 없어도 전국민 의료보험이 있기 때문에 일단 치료부터 하고 그 치료비를 나중에 청구하지만 전태일이 숨을 거두었던 1970년의 한국은 [[국가]] 예산의 절반을 미국의 원조로 채워지던 때에서 벗어나고 비로소 [[세금]]으로 국가 예산을 꾸려가기 시작한 때라 전국민 의료보험이 시행되기 이전이었으며 [[공무원]], [[군인]] 등 극히 일부에만 의료 혜택이 주어졌기 때문에 돈이 없으면 응급환자도 안 받아 주어 죽었다. 보이스피싱 전화가 와서 '당신 자식이 사고가 나서 응급실에 누워있으니 수술비하게 돈을 부쳐달라'는 젊은 세대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가 21세기에도 장년층, 노년층에게 잘 통하는 이유가 있다. 돈을 싸들고 오지 않거나 돈이 없어 보이면(지불능력이 안 되면) 치료를 해 주지 않았고 그런 사례를 들은 장년층들은 돈을 보내지 않으면 자식이 죽을까 겁부터 먹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명동성모병원]]으로 옮겨졌고 가족들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병상에서 곁에 있던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어머니, 내가 못 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주세요."라는 당부를 남겼으며 1970년 11월 13일 밤 10시에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숨을 거두기 직전 유언은 '''"배가 고프다."'''였는데 전태일은 1970년 11월 12일 아침에 집에서 나오기 전 라면을 먹은 후 2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MO9qqfiHioY)]}}} || || {{{#ffffff ''' 전태일 열사의 마지막 약속 ''' }}} || >전태일 열사는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는 행위가 전혀 없었더라도 정말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TV보면 맛집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걸 담당했던 PD가 평화시장 근처의 감자탕집을 한번 취재하러 갔대요. >문득 그곳이 평화시장이니까 그 할머니께 물어봤다는 거죠. >"혹시 전태일 아시나요?" >"잘 알지. 우리 진짜 단골이었는걸..." >그런데 여공들을 데리고 오면, 항상 자기는 안 먹고 여공들만 사줬다는 거예요. >그래서 공짜로 줘도 안 먹더라는 겁니다. 다음에 혼자 왔을 때 이 할머니가 물어봤다는 거죠. >"내가 너한테 돈 받을까봐 안 먹었냐? 바보처럼..." >전태일 열사가 뭐라고 그랬을까요? > >전태일: "아이들한테 먹었다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자기가 안 먹었다는 게 탄로날까봐... 먹었다 그러고 안 먹고 있었다는 겁니다... >---- >『역사저널 그날』 283화 中...[[https://tv.naver.com/v/1620654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