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학공투회의 (문단 편집) === 등장 === 1968년 [[도쿄도|도쿄]] 국세국(일본 [[국세청]]의 도쿄 지국)에 의해 [[니혼대학]]에서 '''22억엔'''이라는 어마어마한 용도가 불분명한 금액이 발견되었다. 이는 대학 당국의 부정 회계로 인해 축적된 금액이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5월 23일 최초의 시위가 벌어졌는데 통칭 "200미터 데모"라고 불린다. 당시 학교 당국은 물리적 및 비물리적인 방법으로 학생 시위를 탄압했다. [[대자보]]를 뜯어가는 건 기본이고 학생운동에 우익 학생단체나 각 단과대 응원단, 체육회 학생들을 동원하여 폭행을 일삼은 것이다. 일본 대학의 체육회는 학내 체육계 동아리를 의미한다. 일본에서는 학교별 체육회가 활성화되어 있는데 [[똥군기|서열이 강하고 강압적이며 군대문화가 뿌리박힌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적으로도 보수적이었는데 종종 다른 학생회를 구타하는 경우가 있었다. 실제로 1960년대 내내 이러한 체육회계 학생들의 행동이 문제가 된 사례가 적지 않게 있었다. [[http://ja.wikipedia.org/wiki/体育会系|일본어 위키백과 문서]] 이러한 탄압은 196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체육회 학생들로 막을 수 없는 수준으로 학생들의 숫자가 불어났고 결국 학교 당국은 학교 건물 셔터를 내려 버린 뒤 학생들을 위협하여 정문 밖으로 학생들을 몰아내 버린다. 결국 2,000명 가량의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대열을 이루어서 스크럼데모와 프랑스데모[* 팔을 넓게 벌리고 손을 맞잡아 도로를 점거하여 행진하는 시위. 1960년대 안보투쟁 당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적은 인원으로 도로 점거를 할 수 있는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프랑스랑 별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프랑스인들이 도로를 점거하는 시위를 하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http://www.z930.com/image/6_15a.jpg|당시의 사진]] 청바지와 캐주얼한 셔츠, 안전모까지 완벽한 전공투 패션이다.]를 하게 되었다. 이때는 본부의 응원단 학생들까지 가담(!)하여 대학 직원들과 체육회 학생들을 막는 경비대로 자처하면서 참가했다. 4일 뒤인 27일 니혼대학에서 아키타 아케히로를 의장으로 하는 "니혼대학 전학공투회의"가 결성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의 배경에는 당시 상당히 열악했던 니혼대학의 상황이 있었다. 당시 일본은 전후 베이비붐으로 인해 학생 수가 급증했고 이러한 상황에 발맞춰 니혼대학은 10년새에 정원을 3배로 늘려 버렸다. 1955년 당시 3만명이었던 정원이 1968년에는 8만명으로 [[뻥튀기]]된 것. 그러나 학내 시설이나 교직원 수는 제자리걸음 수준이었고 이에 대해 학생들의 불만이 상당했다고 한다. 결국 프랑스의 [[68운동]] 발발 원인과 똑같은 맥락이다. 결국 일대전공투는 학생과 대학 당국의 단체 협상인 "대중단교(대중단체교섭)"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와중에 체육회 학생들이 [[일본도]]를 들고 난입했다. 유혈사태를 진압하려 나타난 경찰 기동대가 폭력학생은 놔두고 전공투 학생들만 우루루 패서 잡아가는 사건을 일으켜서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참으로 웃겼던 게 전공투 학생들은 처음에 경찰이 나타나자 "경찰이 폭력배들을 잡으러 왔구나" 하고 박수를 치다가 경찰이 자기들을 때려잡자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법학부, 경제학부, 문리학부, 상학부, 예술학부, 공학부 등이 차례로 바리케이드 봉쇄에 들어갔다. [[http://www.z930.com/nenpyou.html|참고]] [[도쿄대학]]에서는 의학부에서 [[인턴]]제도 폐지와 등록의 제도 설치에 반발하여 분쟁이 일어났는데 학생들은 의학부 전공투를 결성하고 1968년 1월 무기한 스트라이크(학생에 의한 대학 [[휴업]], [[농성]])를 선언했다. 그런데 1달 뒤 학교 직원들과 실랑이가 벌어지다가 학교 간부 몇 명을 감금한 것이 문제가 되어 17명의 학생들이 제명 처분을 받게 되었다. 문제는 이들 중 현장에 없던 학생까지도 억울하게 제명되면서 요주의 학생을 고의로 처분한 것이라는 의혹을 받게 된 것. 그러나 학교 당국은 처분을 취소하지 않았고 상황은 악화되었다. 결국 학생들은 6월에 야스다 강당을 점거했는데 문제는 여기서 대학측이 [[경찰]] 기동대를 출동시키는 강경책을 썼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의학부를 넘어서 모든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공분을 사게 되었고 전공투가 각 학부로 확대되고 [[신좌익]] 분파가 합류하여 야마모토 요시타카를 의장으로 하는 '''동대전공투'''가 결성되었다. [[도미노 이론|이러한 사건들은 타 대학에도 바리케이드 봉쇄 및 스트라이크가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결과를 낳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