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한 (문단 편집) ==== [[문경지치]] ==== || [[파일:external/www.sn.xinhuanet.com/xin_18302060613562813219712.jpg|width=100%]] || ||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恆)''' || 이제 '''[[한나라]]는 긴 안정기로 들어가게 된다.''' [[춘추전국시대]]와 [[진]]의 통일, 초한 대쟁패를 겪은 중국은 분명 대격변을 지나면서 많은 발전을 이루긴 했으나, 너무나 오랜 시간 이어진 전란으로 매우 피폐해졌다. 그래서 문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국시로 삼았다. 일단은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무]] 등의 장수가 여후때부터 엇나간 남월에 대한 정복을 주장하긴 했다. 지방 제후들이 스스로 무기와 군사를 모으고 있다는 이유로 문제가 반대했기 때문에 무산되었지만.] 한나라의 번영은 문제 없이 설명되기 힘들 정도로 문제의 공은 크다. 철저할 정도로 검소하게 지내고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였으며, 나라의 경제력을 발전시키고 힘을 키웠다. [[흉노]]를 대할 때는 약간 저자세로 나가면서까지 전쟁을 회피했다. 문제와 경제는 개국공신이었던 진평과 주발 이후 이른바 [[문경지치]]라 불리는 정치로 한나라의 힘을 크게 키웠다. 통일된 중국의 생산력 등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인데, 그동안은 정상적으로 나라가 조용하게 굴러간 적이 없기에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 문제 시기를 기점으로 '''전한은 절정기를 향해 박차를 가했다.''' 한 예로 한나라 정부는 [[조조(전한)|조조]]의 건의를 반영하여 말 사육을 위해 총 36개에 달하는 대형 말목장을 제국 북부와 서부 경계 일대에 건설했다. 태복(太僕)은 목사(牧師) 6명을 임명했고, 각 관리인에겐 3명씩 승(丞)이 따라붙어 해당 목장들을 관리하였다. 랑(郞)이 원령(苑令, 총책임자)으로 임명되어 각 관리인들을 총괄했다. 총 3만에 달하는 남녀 공노비들이 목장들로 파견되어 말 보육을 책임졌다. 목장의 말 숫자는 조금씩 늘어나 30만 마리까지 증가했고, 이 수십 만필 중 가장 우수한 말들이 군사훈련을 위해 선발되었다. 각지의 지방정부와 번국들에도 말 사육 명령이 하달되었다. 한무제 시기에 이르면, 군마의 총 숫자는 45만 마리를 넘어섰다.[* 창춘수(2007), 『중국 제국의 발흥 권2: 한 제국 내의 국경, 이주 그리고 제국, 130 B.C. – A.D. 157.』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clearfix]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