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형필 (문단 편집) == 생애 == 1906년 7월 29일 [[한성부]] 동서 연화방 중로계 이현(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4가]])에서 10만석 지기인 아버지 전영기(全泳基, 1865 ~ 1929)[* 1925년 12월부터 [[경기도]] [[경성부]] [[계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에 위치한 반도여자학원(半島女子學院)에 매달 100여 원 씩 기부하는 등[[http://db.history.go.kr/id/npda_1926_11_24_v0003_0450|#]] 여성교육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와 어머니 [[밀양 박씨]][* 소설가 [[박종화]]의 고모이다.[[http://kansong.org/kansong/biography_1/|#]]] 사이의 2남 4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전계훈(全啓勳, 1812 ~ 1890)은 본래 교서관(校書館:경서와 역사서 등의 인쇄 및 반포를 관장하는 관서)의 [[http://sjw.history.go.kr/id/SJW-J09090190-02700|수장제원]](守欌諸員)으로 근무하다가, 1872년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09_05A_15A_00200|창덕궁 위장]](昌德宮 衛將)·종2품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09_07A_21A_00390|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1877년 정3품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14_06A_20A_00960_2004_068_XML|오위장]](五衛將), 1885년 종2품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22_11A_17A_00310_2003_115_XML|경상도 중군]](慶尙道 中軍) 등을 지냈다. 작은아버지 전명기(全命基, 1870 ~ 1919)는 [[한성부]]의 가관(假官)을 전전하다가 1888년 종4품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25_05A_09A_00240|부호군]](副護軍), 1898년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35_02A_22A_00110|경기관찰부 주사]](京畿觀察府主事), 1906년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43_04A_12A_00100|풍경궁 참서관]](豊慶宮參書官) 등을 역임했다. 그는 이후 작은아버지이자 당숙[* 왜 작은아버지이자 당숙이냐면, 전명기 역시 자신의 작은아버지에게 입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형필에게 전명기는 실제 혈통상으로는 작은아버지이고, 족보상으로는 당숙이 된다.]인 전명기에 입양되었지만, 99칸 한 집[* 100칸부터는 [[왕가]]의 영역, 즉 [[궁궐]]이다. 민간에서는 최고 부자라는 의미]에서 양부모와 양조부모까지 사는 관계로 양육은 그대로 친부모가 맡았다.[* 과거 대가족 문화에서는 이런 일도 제법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집성촌|6촌을 넘어서는 친척들까지도 한 집이나 바로 옆 집에 사는 경우]]도 흔했다. 이 경우는 한 집에 살면서 호적과 족보만 옮겼다고 보면 된다.] 이 배경으로 훗날 양가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아 하늘이 내린 백만장자, 어쩌면 억만장자가 되는데 전형필이 막대한 양의 국보급 문화재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24살 때 이러한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문화재적 관점으로 보면 전형필이 집안의 유산을 물려받은건 참으로 다행이지만 전형필 개인 사정으로 보면 딱한 일이었다. 조부모, 삼촌, 부모가 거의 같은 때에 돌아가시자 물려받을 사람이 없어서 전형필이 가족과 친척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은 것이다.]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서울효제초등학교]])와 [[휘문고등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라잃은 백성을 도와주는 [[변호사]]가 되어라"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지만 평생의 스승 위창 [[오세창]][* 1864년~1953년. 개화 사상가 [[오경석]]의 아들이며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예가로 유명하다.]을 만나며 민족의 혼과 얼을 지켜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우리 조선은 꼭 독립되네. 동서고금에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는 없고, 그것이 바로 '[[소프트 파워|문화의 힘]]'이지.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문화 유적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려고 하는 것일세."''' 전형필은 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오세창이 건넨 '근역화휘'와 '근역서화징'으로 문화재를 감식하는 눈을 기른다. 겸재 [[정선(화가)|정선]]의 '인곡유거'를 시작으로 본격 우리 문화 유산을 수집하는데 헌신한다. 전형필은 1900년대 초부터 [[일본인]]들의 손에 흘러 들어가거나 훼손될 위기에 처한 우리의 문화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 붓기 시작한다. 고서화 수집의 전진 기지로 한남서림을 인수하고 이후 고려 청자, 조선 백자, 돌로 만든 탑과 부도, 금동여래입상 등 보기 좋은 예술품을 지켜낸 것이 아닌 예술적 가치를 넘어선 그 안에 담긴 우리 민족혼을 지켜낸 것이다. 고려 청자의 대표작인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청자상감포류수금문정병]](국보 제66호),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국보 제68호),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국보 제270호) 등은 모두 전형필이 일본으로 팔려갈 뻔한 것을 거액을 주고 사들여 지켜낸 작품들이다. 1938년 서울 한복판에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이며 한국의 [[대한민국의 국보|국보]]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 중 하나인 [[간송미술관]]이 세워진 것은 전형필에 의해서다. 설립 당시 오세창이 ‘빛나는 보배를 모아 두는 집’이라는 뜻에서 ‘보화각’이라고 이름붙였다. 1940년대 [[일본 제국|일제]]는 [[한국어|조선어]] 사용 금지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등 민족 말살 정책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3년 6월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전형필은 판매자가 천원이라고 했지만 귀한 물건은 제 값을 치러야 한다며 당시 집 10채 값인 만원을 주고 천원[* 당시 금액을 현재 [[환율]]로 보면 만원은 대략 70억, 천원은 7억에 해당하는 금액이다.]은 수고비로 주며 사들였고 [[한국전쟁]] 때는 몸에서 떼지 않은 채 지켜[* 남쪽으로 피난갈 당시 전형필이 직접 품에 안고 걸어갔으며 밤에는 베개 밑에 두고 잘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귀한 것을 귀하게 보는 눈으로 먼 미래까지 보며 내 나라를 지켜낼 방법을 알았던 전형필이기에 기와집 400채 값으로 영국인 존 개츠비에게 고려 청자와 조선 청화백자 20점을 사고[* 이때 사온 고려 청자와 청화백자 [[도자기]]들을 한데 묶어서 이를 먼저 수집했던 "존 개츠비 컬렉션"이라 명명하기도 한다. 현재 원화로 약 1,200억 원.][* 원래는 22점이었으나 개츠비가 2점만 기념으로 가져가고 나머지를 전부 넘겨서 20점이다.] 이미 일본으로 넘어간 우리 문화재 특히 혜원 [[신윤복]]의 그림 '[[혜원전신첩|혜원 전신첩]]'을 찾아온다. 1945년 [[광복]]이 되어서도 '고적 보존 위원'으로 피촉되어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를 정리해 보존하는 일에 참여하느라 박물관 개관은 뒤로 미룬다. [[6.25 전쟁]] 때 북한군들이 훈민정음 해례본, 고려청자 등 국보급 문화재를 포장할 것을 명령해 도난당할 위기에 맞았으나, 문화재들을 일부러 늦게 포장했다고 했다. 당시 북한군은 서울 점령 후 유물들을 [[평양시|평양]]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포장하라고 협박했는데, 북한군의 선전으로 인해 경계가 다소 약해진 것과 문화재에 대한 지식이 적은 점들을 고려해서 문화재 포장을 지연시켰다고 한다. 당시 전형필은 모처에서 훈민정음 해례본 등 가장 중요한 문화재 몇 점만 간신히 들고 은신하면서 지냈고 전형필이 소장한 문화재들의 가치를 익히 알고 있었던 [[최순우]][* 6.25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개성에 있었던 고려청자들을 당시 개성에서 벌어지던 남북 간의 교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놔서 한국이 북한보다 고려청자를 더 많이 소장할 수 있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손재형]] 등의 도움을 받았다. 이미 포장한 유물들도 이런저런 이유들을 갖다 붙이면서 다시 꺼냈다 포장하기를 반복하고 문화재를 나무 궤짝에 담아야 한다며 궤짝이 제작되기까지 시간을 끌었다고 하며 심지어 어느날은 일부러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다리를 부러뜨리기 했으며 허구한날 북한군에게 [[화이트 홀스|화이트 홀스 위스키]]와 [[우키요에]], [[춘화도]]를 주면서 경계심을 풀게 했다고 한다. 마지막에는 이를 들키고 말았으나 고작 3일만에 서울이 탈환되면서 북한군들은 결국 문화재를 챙기지 못한채 헐래벌떡 평양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다만 1.4후퇴 때는 어쩔 수 없이 적지 않은 소장품들을 놔둔 채 피난을 가야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적지 않은 유물들이 유출되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전형필이 부산으로 피난을 가자 전형필 본인보다 먼저 소장품들이 부산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풀려서 골동품상에 팔리고 있기도 했다고. 1953년 휴전 후 남은 소장품들을 정리하며 미술학자들과 함께 보다 규모있는 박물관을 구상하였고 아버지의 유언으로 현재 서울의 [[보성중학교(서울)|보성중학교]]와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고등학교]]를 인수하는 등 교육 사업도 하였지만[* 현재 보성중고등학교 중시조 급의 인물로, 지금도 보성고등학교 교정에 [[동상]]이 있다.] 1959년 엄청난 재정 사고가 발생해 그 빚을 갚기 위해 가족들까지도 극심한 쪼들림에 시달려야 했다. 재단에서 빚을 갚지 못해 학생들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아 돈을 댔다. 사실 서화와 도자기 몇 점만 팔았어도 충분히 해결하고도 남았겠지만 전형필은 끝까지 자신의 문화재 수장품들을 지켜 낸다. 이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서 재단의 빚을 모두 갚은 후 갑작스레 들이닥친 병마인 급성 신우염으로 쓰러져서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하다 1962년 자택에서 향년 55세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보성중고등학교 교정에서 영결식을 행하였으며, 장지는 양주군 노해면 원당리의 집안 선산이다. 행정구역이 바뀐 현대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431번지이다. 이후 보성중고등학교 재단법인 '동성학원'의 이사장직은 전형필의 후손들이 맡고 있다. 그 뒤 후손들은 선친 전형필의 수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하기 위해 1966년 봄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여 그를 중심으로 간송 전형필 수집품에 대한 본격적인 정리와 학문적인 연구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1971년 가을부터 매년 5월과 10월에 소장품 [[전시회]]를 연다. 2018년 4월 6일 사망한 [[전성우]] 이후 새로 취임한 전인건 둘 다 간송 전형필의 후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