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도전 (문단 편집) === 철학 사상 === 비록 [[역성혁명]]을 일으켜 보수적 [[성리학]]과 괴리되는 정치현실을 스스로 만들어냈으나, 성리학에 대한 이상과 믿음이 강했던 그는 당시 유학자들에게 사적으로 용인되거나 학문적으로 타협되던 [[불교]]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사실 성리학 자체가 당시 유학을 체계화시키기 위해 도교와 불교 사상을 결합하여 태어난 사상이다.] 《[[불씨잡변]]》은 그러한 정도전의 사상이 잘 드러난 책이다. 그밖에도 성리학 관련 저서들을 집필했다. 《[[고려사]]》 편찬에도 참여했는데, 이 부분은 [[태종(조선)|태종]] 및 [[세종대왕|세종]]대에 [[공민왕]] 이후 기록이 왜곡되었다는 지적을 받게 되고 그리하여 개수되기도 했다. 각종 필화사건이 난무하고 일원화된 사상적 압제가 통상화된 조선시대의 사상적 경향성에 있어, 정도전의 그림자가 언뜻 비추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고려조에는 [[승려]] 신분이었던 [[신돈]]의 경우, '[[공자]]는 만세의 스승'이라고 공인하면서 [[성균관]]을 재건했을 정도로 다른 사상에 대한 유연성에서 별 다른 경직성이 보이지 않으나, 정도전은 불교는 물론이고 [[풍수지리]] 같은 것도 술수라며 믿지 않을 정도로 다른 사상에 대해 지독히 배타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다만 정도전이 단순히 교조주의 일변도여서 다른 사상을 배척한 것만은 아니다. 우선 그가 불교를 비판한 것은 불교의 폐단이 극대화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불교의 폐단이라기보다는 [[타락]]한 [[종교]]의 폐단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고려 말은 [[절(불교)|사찰]]의 난립과 횡포로 인해 국고는 국고대로 탕진되고, 민생은 더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던 시기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왕조는 불교와 확실히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고, 그러한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쓰인 것이 《불씨잡변》이었다. 하지만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라고 해도 [[유교|유학자]]의 입장에서 불교는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불씨잡변》 중 '불씨지옥의 변'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옛날에 어떤 [[승려|중]]이 나에게 묻기를, "만일 지옥이 없다면 사람이 무엇이 두려워 악한 짓을 안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답하여 말하기를, > >"군자(君子)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마치 좋은 색을 좋아하고 나쁜 냄새를 싫어함과 같아 모두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이라도 악명(惡名)이 있게 되면 그 마음에 부끄러워하기를 마치 시장에서 종아리를 맞는 듯이 여기니, 어찌 지옥설 때문에 악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 > >하였더니, 그 중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여기에 이 사실을 아울러 써서 그 설에 미혹되는 세상 사람들이 분변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이것은 단순히 정도전 개인의 사상이 아니라 유교의 기본적인 사상이기도 하다. 유교는 뜬구름 잡는 [[개소리]]라 여기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유교는 현실참여형 정치사상이고, 그렇기에 특히 [[사후세계]]같은 것을 끔찍할 정도로 싫어한다. 왜냐면 이러한 사후세계관이 결국에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거지 같은 현실을 바꾸려는 민중의 의지를 꺾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건 곧 유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혹세무민이었고, 그래서 비판을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 후기에 [[천주교]]가 유학자들에게 [[극딜]]을 당하기도 했다. 유학자 입장에서 보면 이건 뭐 불교 시즌 2였으니까. 다만 [[제사]] 문제만 없었다면 천주교는 그럭저럭 조선에 융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천주교 전래 초기에는 제사 문제에 대해서 교황청 역시 타협의 여지가 없이 반대했기 때문에 동아시아 삼국 모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계속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존에 교조화되었던 유교의 세가 약해지고, 교황청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타 종교나 각국의 전통에 대해서 관용적인 태도로 받아들이면서 동아시아에서 천주교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즉, 대중들이 생각하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사상이 [[신분제]]와의 충돌 문제 때문에 천주교가 박해받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애초에 천주교가 평등을 외쳤다 한들 그것은 절대자이자 창조주인 신 앞에서 모든 인간의 평등이었지, 전근대의 신분 차별(조선으로 치면 반상의 구별)이나 남녀 차별까지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표면적으론 불교를 극딜했던 조선의 [[선비]]들이지만 그들도 죽을 때가 되면 불교의 승려들을 찾는 경우가 많았고, 백성의 종교에 대한 수요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유교 국가를 표방하는 조선이었지만, 중전이나 대비를 포함한 내명부의 여인들 중에는 불자들이 제법 많았다. 조선에서 불교에 대한 탄압은 종교적 탄압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탄압의 측면이 강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 유교가 교조화되던 시기에도 불교에 대한 탄압은 오히려 조선 전기보다 덜했다.] 하지만 위에서 본 것과 같이 《불씨잡변》에서 정도전이 전반적으로, 또한 궁극적으로 공박하는 대상은 단순하게 세속화된 불교의 통시적인 폐단 정도가 아니라 연기론이나 윤회론같은 불교의 핵심적인 이론이다. 유학자로서 사물의 생멸과 무궁한 변화를 전제하는 불교의 관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 그 비판에 있어 철학적인 사유의 한계가 다분하고 무엇보다 중국 당나라 시대 유학자인 한유의 배불론에서의 논리를 기계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유학의 관점이 크게 변하지 않았으니 같은 논리로 비판을 한 것이고, 또한 현대의 회의주의적인 관점으로도 불씨잡변과 같은 맥락에서 불교를 비판할 수 있다. 그의 스승이었던 목은 [[이색(고려)|이색]]의 불교 비판에 접근하는 방법론에 비교하자면 정도전의 불교에 대한 관점은 어디까지나 비판이 아닌 폭력에 더 가까이 접근해 있다.[* 또한 이러한 점이 프랑스의 [[자크 르네 에베르]]와 닮은 점이 있다 둘 다 종교에 비판적이고 급진적인 좌파 성향이며 숙청당했다는 것 또한 비슷하다.] 정도전 사상의 독창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정도전이 조선의 정치 체제 구상을 밝힌《[[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경제문감]](經濟文鑑)》같은 저술은《주례정의(周禮訂義)》,《산당고색(山堂考索)》,《서산독서기(西山讀書記)》등 중국의 [[주자학]]과 사공학(事功學)[* 정치적 실제 효과를 중시하는 학문.] 계열의 저작을 상당 부분 그대로 옮겨썼다는 것이다. 도현철 [[연세대]] 교수는 "정도전은 인용 전거를 밝히지 않고 자신의 의견처럼 기술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대의 기준으로 볼 때도 학문적 엄밀성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