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도전 (문단 편집) === 최후 === 1398년 [[1차 왕자의 난]]에서 정적인 이방원에게 살해되면서 생을 마감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그의 최후는 매우 비굴한데 이방원에게 "예전에 정안군(태종 이방원)께서 저를 살려주셨으니 이번에도 저를 살려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빌자 이방원은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고도 그리 부족하냐? 어째서 이 지경으로 악행을 저지르느냐?"라고 일축하며 베어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그의 죄목은 반역을 꾸몄다는 [[역모]]죄가 아닌 [[종친]]들을 이간질시키고 해하려 했다는 종친모해죄였다.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끌려가기 전에 '침실 안에서 단검을 쥐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물론 실록 기록에서는 '단검을 쥐었어도 소심한 모습으로 걸어나왔다'고 하고 '곧 이방원의 종자 소근의 호통을 듣고 단검을 버린 뒤 끌려나와 비굴한 최후를 맞았다'는 기록으로 이어지지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다는 사람이 단검을 왜 쥐고 있었는지는 의문. 이 기록도 정도전이 끝까지 저항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으며 최후의 비굴한 모습은 정도전을 비하하기 위한 기록일 가능성이 있다. >(정도전 등이 있는) 집을 포위하고 그 이웃집 세 곳에 불을 지르게 하니, 정도전 등은 모두 도망하여 숨었으나 심효생, 이근, 장지화 등은 모두 살해되었다. 정도전이 도망하여 그 이웃의전 판사 민부의 집으로 들어가니 민부가 아뢰었다. >"배가 볼록한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습니다." >정안군(이방원)은 그 사람이 정도전인줄을 알고 소근 등 4인을 시켜 잡게 하였더니, 도전이 침실 안에 숨어 있는지라 소근 등이 그를 꾸짖어 밖으로 나오게 하니, 도전이 자그마한 칼을 가지고 걸음을 걷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 소근 등이 꾸짖어 칼을 버리게 하니, 도전이 칼을 던지고 문밖에 나와서 말하였다. >"청하건대 죽이지 마시오, 한마디 말하고 죽겠습니다." >소근 등이 끌어내어 정안군의 말 앞으로 가니 도전이 말하였다. >"태조 즉위년에 공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 주소서." >정안군이 말하였다.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부족하게 여기느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느냐?" >이에 그를 목 베게 하였다. >---- >태조실록 7년 8월 26일 하지만 실록에는 바로 뒤에 분위기가 다른 장면을 실어 놓았는데 아들 정담[* 정담은 아버지가 죽을 때 [[자살|자결]]했다.]이 "오늘은 정안군께 빌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하자 "내가 이미 고려를 배반했거늘, 또 [[이성계|이 쪽]]을 배반하고 [[이방원|저 편]]에 붙는다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느냐?"라고 거절했다. 절명시로 알려진 '자조'에서도 비굴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이 시는 정도전의 절명시가 아닐 가능성도 높다. [[http://www.pgr21.com/pb/pb.php?id=freedom&no=62849|참고]]. 현재 시중에 나온 <삼봉집> 단행본에는 '자조'가 맨 마지막에 실려 있지만 실제 <삼봉집>의 편제에는 '자조'가 맨 마지막이 아닌 <삼봉집> 시편 중간에 실려 있다는 것. <[[정도전(드라마)|정도전]]>이 참고한 <건국의 정치>에서는 정도전의 '자조'를 절명시가 아니라 이성계를 만나고 돌아올 때 즈음 지었던 시로 해석하고 있다. 이 해석대로라면 자조는 정도전의 절명시가 아니라 "고려를 부흥하기 위해 학문에 힘써 왔는데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나라를 뒤집을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라는 식의 자조가 되는 셈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송정' 이성계의 잠저 시절의 호 '송헌(松軒)'을 의미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도 시간이 촉박한 [[쿠데타]] 때 정도전에게 이렇게 시까지 남길 시간이 있었을지도 의문. 단, 정도전의 절명시 '자조'는 실록에 없고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에 있는 기록이다. >마음을 보존하고 성찰하기에 한결같이 공력을 다 기울여, >操存省察兩加功 (조존성찰양가공) >서책 속 성현의 교훈 저버리지 않았다네. >不負聖賢黃卷中 (불부성현황권중) >삼십 년 긴 세월 쉬지 않고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 >三十年來勤苦業 (삼십년래근고업) >송정에 한 번 취하니 모두 허사가 되었구나. >松亭一醉竟成空 (송정일취경성공) >---- >《자조(自嘲)》[* "스스로를([[自]]) 비웃다.([[嘲]])"라는 뜻이다. 자조적(自嘲的)이라는 표현또한 같은 한자를 쓴다.] 여기서 '송정(松亭)'을 남은의 [[첩]]이 있던 곳이자 한양의 지명인 '송현방'의 정자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송현방은 오늘날 서울특별시 [[종로구]] [[한국일보]] 사옥 주변. [[경복궁 동십자각]] 건너편 일대다. 정도전이 최후를 맞은 곳이며 여기서 '操存省察(조존성찰)'은 '[[맹자]]와 [[주자(철학자)|주자]]가 이야기한 [[성리학]]의 수양 방법'을 의미한다. 어쨌든 비록 '자조'가 절명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남아 있는 여러 기록들 때문에 실록 속의 비굴한 최후는 이방원 일파에 의해 비하된 감이 있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태조실록>에서 [[왕자의 난]] 부분은 다소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기도 하다. <삼봉집>의 부록 <사실>의 주석에 의하면 정도전이 죽을 무렵에 "남산에 가서 돌을 깨니 정(釘)이 남아나지 않는구나(南山往伐石釘無餘)"라는 [[노래]]가 돌았다고 한다. 여기서 '남'은 남은을 뜻하고 '정(釘)'은 '정(鄭)'과 읽는 음이 같아 정도전을 뜻한 것이라고 하는데 정도전과 남은이 같은 날에 살해되었다는 말하자면 [[사망 플래그]]가 당대에도 돌았다는 이야기. 다만, 사망 플래그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다소 있다. 만약 이것이 사망 플래그였다면 정도전이 방비함에 허술하지 않았을 것이고 가장 정적들을 급히 처리하고자 했을 것인데 당대에도 사망 플래그가 돌았다기에는 너무나 허술하게 죽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위의 노래는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도전의 반대파 측에서 정도전과 남은의 몰락을 암시하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를 민가에 퍼뜨렸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정도전의 [[자(이름)|자]]는 종지, [[아호|호]]는 삼봉이며, [[본관]]은 안동 [[봉화군|봉화]]이니, 형부 상서 정운경의 아들이다. 고려 왕조 [[공민왕]] [[1360년|경자년]]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임인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여러 번 옮겨서 통례문 지후에 이르게 되었다. 병오년에 연달아 부모의 상을 당하여 여막을 짓고 상제를 마치니, 신해년에 불러서 태상 박사로 임명하였다. 공민왕이 친히 종묘에 제향하니, 도전이 도면을 상고하여 악기를 제조하였다. 예의 정랑·예문 응교로 옮겨서 성균 사예로 승진되었다. 갑인년에 공민왕이 [[죽음#s-4|훙]]하여, 을묘년에 [[북원]]의 사자가 국경에 이르니, 도전이 말하였다. > >“[[공민왕|선왕]]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명나라를 섬겼으니, 지금 원나라 사자를 맞이함은 옳지 못합니다. 더구나 원나라 사자가 우리에게 죄명을 가하여 용서하고자 하니, 그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 >그때의 재상이 듣지 않으므로, 도전이 굳이 이를 말하다가, 노여움을 당하여 [[나주시|회진]]으로 폄직되었다. 갑자년에 하성절사 [[정몽주]]가 그를 천거하여 서장관으로 삼아 [[수도(행정구역)|수도]]에 갔다가 돌아와서 성균 사성에 임명되었다. 정묘년에 외직을 자원하여 남양 부사가 되었다. 무진년에 임금께서 국정을 맡게 되매 불러서 대사성에 임명하였다. 여러 번 계책을 올려 밀직 제학과 지공거로 승진되고, 십학 도제조가 되어 상명·태일 등 여러 산법을 가르치고, 예문 제학으로 옮겨서 《진맥도결》을 지었다. 기사년에 [[조준(조선)|조준]] 등과 더불어 사전을 혁파하기를 청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매, 삼사 우사에 승진되고 중흥 공신으로써 충의군에 봉해졌다. 경오년에 정당 문학에 승진되고, 윤이·이초의 무망한 옥사가 일어나자, 도전이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으나, 정몽주가 임금에게 말하여 이 일을 그만 중지하게 하였다. 도전이 계품사로써 수도에 갔다. [[1391년|신미년]]에 형벌과 상여의 잘되고 잘못된 점에 관하여 말씀을 올리니, 공양왕이 능히 용납하지 못하여 [[나주]]로 폄직되었으나, [[1392년|임신년]]에 불리어 돌아왔는데, [[남은]] 등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임금을 추대하였다. >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매, 공훈을 책정하여 1등으로 삼고 문하 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를 가하였다. 또 계품사로서 수도에 갔다가 돌아와서 판삼사사 겸 판삼군부사로 승진되고, 삼도 도통사가 되어 《진도》·《수수도》·《경국전》·《경제문감》을 제작하고, 또 악가를 지었으니, [[금척|몽금척]]·수보록·문덕·납씨·정동방 등의 곡이 있었다. 정총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를 수찬하였다. 봉화백으로 봉해지고, 관등은 특별히 숭록대부로 승진되었다. 병자년에 동지공거가 되어 처음으로 초장 강경의 법을 시행하였다. 정축년에 동북면을 선무하여 [[주(행정구역)|주]]와 [[군(행정구역)|군]]의 이름을 정하고 공주성을 수축하였다. 무인년 봄에 돌아오니, 임금이 맞이해 위로하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도전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널리 보아 의논이 해박하였으며, 항상 후생을 교훈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일찍이 곤궁하게 거처하면서도 한가하게 처하여 스스로 문무의 재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 >임금을 따라 동북면에 이르렀는데, 도전이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된 것을 보고 나아와서 비밀히 말하였다. >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 >“무엇을 이름인가?” > >도전이 대답하였다. > >“[[왜구]]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 >군영 앞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도전이 소나무 위에 [[시]]를 남기겠다 하고서 껍질을 벗기고 썼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 >“아득한 세월 한 주의 소나무 > >몇만 겹의 청산에서 생장하였네 > >다른 해에 서로 볼 수 있을런지 > >인간은 살다 보면 문득 지난 일이네.” > >개국할 즈음에 왕왕 취중에 가만히 이야기하였다. > >“[[한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고조를 쓴 것이다.”[* 즉, 자기가 [[장량(전한)|장량]]이고 [[한고조]]는 이성계니 자기가 이성계를 쓴 것이라는, 사내의 포부를 밝힌 혹은 오만할 수도 있는 발언이다. 다만 졸기에는 "그렇지만 임금이 그의 청을 다 들어주지는 않았다."는 기록도 나온다. 그래서인지 조선 개국 이후 이성계의 개인적 신임을 얻은 정도전이 권력을 잡게 된건 맞지만, 현대에 와서 정도전의 행보가 재발굴되면서 역설적으로 [[조준(조선)|조준]], [[남은]] 등 다른 공신들의 역할이 과소평가된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그와 대립한 이방원은 정도전 사후 실록 위조 논란도 있을 정도로 그의 공을 철저하게 깎아내렸기에 정도전은 조선 후기까지 역적으로 낙인 찍혀 있었는데, 이렇게 보면 정도전은 참 시기에 따라 평도 나뉘는 풍파가 많은 인물이긴 했다.] >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 >그러나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 그가 찬술한 《고려국사》는 공민왕 이후에는 가필하고 삭제한 것이 사실대로 하지 않은 것이 많으니,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처음에 도전이 한산 [[이색(고려)|이색]]을 스승으로 섬기고 오천 [[정몽주]]와 성산 [[이숭인]]과 친구가 되어 친밀한 우정이 실제로 깊었는데, 후에 [[조준(조선)|조준]]과 교제하고자 하여 세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어 원수가 되었다. 또 외조부 우연(禹延)의 장인인 김진이 일찍이 중이 되어 종 수이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으니, 이가 도전의 외조모이었는데, [[우현보]]의 자손이 김진의 인척인 이유로써 그 내력을 자세히 듣고 있었다. 도전이 당초에 관직에 임명될 적에, [[고신]]이 지체된 것을 우현보의 자손이 그 내력을 남에게 알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여 그 원망을 쌓아 두더니, 그가 뜻대로 되매 반드시 현보의 한 집안을 무함하여 그 죄를 만들어 내고자 하여, 몰래 [[황거정]] 등을 사주하여 그 세 아들과 이숭인 등 5인을 죽였으며, 이에 [[남은]] 등과 더불어 어린 서자의 세력을 믿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여 종친을 해치려고 모의하다가,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708026_002|태조 14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8월 26일(기사) 2번째기사]] 정도전의 출신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방원 세력이 정도전의 출신을 문제삼고 왕자의 난을 정당화 하기 위해 일부러 종의 자식으로 교묘하게 [[조작]]하였다는 것이다. 실록의 왜곡을 지적하는 이들은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의 행장에는 외조부의 이름을 영천 우씨 우연(禹淵)으로 적었지만 실록에서는 단양 우씨 우연(禹延)으로 적어 [[한자]]가 다르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http://m.chosun.com/svc/article.html?contid=2007060700001&sname=news|관련기사]][* [[후손]]들은 부정하지만 현대인들은 모계 노비 혈통이라는 것과 그가 [[혁명가]]의 길을 간 것이 [[드라마]]틱하기에 연관시켜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정도전은 신원되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흘러오면서 [[무덤]]이 실전되어 후손들은 가묘를 만들어 제사지내고 있다. [[족보]]에는 [[경기도]] [[광주시]] 사리원이며 부인 최씨의 묘는 양재역 상초리에 있다고 적혀 있다. 또 반계 [[유형원]]이 쓴 《동국여지지》에 의하면 '정도전의 무덤은 과천현 동쪽 18리[* 지금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역]] 인근 국립외교원 우면산 기슭.]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곳에는 오래된 무덤 몇 기가 있었는데 그 중 정도전의 무덤으로 보이는 무덤을 1989년 [[한양대학교]]에서 발굴했다. 그러나 이 무덤은 오래 전에 [[도굴꾼]]들이 여러 번 [[도굴]]한 탓에 [[유물]]이 적었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질이 우수한 백자들이 다수 발견되었으며 목관에서 [[머리]]만 있는 [[유골]]이 발견되었다. 몸통이 없는걸로 보아 애초에 머리만 묻힌 무덤으로 보였다.[*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발굴 당시 찍은 [[사진]]이 있다.] 무덤의 규모는 조선개국 1등공신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초라했지만 부장품의 질, 남아있는 인골의 상태 등으로 볼 때 [[참수]]당한 정도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도굴꾼들이 가져갔는지 지석이 있을 자리에 지석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에 문중에서는 결정적인 증거인 지석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배하고 찾아다녔으나,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 정황상 유골이 자신들의 조상일 가능성은 높아도 물증이 없었지만 문중에서는 일단 정도전이 아니라고 해도 오래 전에 돌아가신 우리의 조상이라면서 삼봉사 뒤편에 일단 가매장했다. 언젠가 정도전의 것으로 확정이 되면 정식으로 매장하려는 듯. 그래서 삼봉의 가묘는 양재동[* 다만 정도전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된 자리에는 서초구에서 '삼봉 정도전 산소터'라는 표석을 세워 두웠다. [[양재고등학교]] 바로 옆에 있다.]에 있는게 아니라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산대마을에 있는데 산대마을은 정도전의 후손인 봉화 정씨 집성촌이다. 정도전의 사당인 문헌사와 정도전 기념관도 이 곳에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