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동 (문단 편집) === [[혐오]] === 그간 가장 비상한 관심을 받았던 구조적 정동은 역시나 혐오[* 혐오라는 단어의 선정과 번역 자체부터 이미 무수한 논란을 낳고 있지만, 일단 여기서는 구조적 정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분야에서 혐오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므로 마찬가지로 혐오라는 표현을 채택하기로 한다.]일 것이다. 이는 흔히 '''타자에 대한 [[대상화]]'''(또는 객체화; objectification)를 지칭하며, 자신과 상대방의 주체로서의 동등함을 부정하고, 오염의 메타포를 포함한다. [[실존주의]] 철학의 거장 [[장폴 사르트르]]는 자신의 저술 속에서, 주체가 불멸과 초월로서의 실존을 지향할 때 그것은 '''물질성'''에 대한 혐오를 갖는다고 하였으며, 특히 이는 물질성이 갖는 속성인 '''점액성'''에 대한 혐오를 포함한다고 하였다. 체액을 상기하는 것은 인간의 주체로서의 초월과 불멸을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계보를 이어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이를 [[페미니즘]]과 접목시켜서 주체로서의 남성은 자신에게 침범하는 객체로서의 물질성을 갖는 여성들을 [[대상화]]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남성들은 여성의 몸과 그 여성성을 끈적거리는 점액으로 이해한다는 설명이 가능해지게 되며, 이를 다시 말하면 여성만의 신체적 특징인 [[월경]]과 [[질]], [[분만]] 등에 대한 끈적거리는 이미지와 연결됨으로써 여성의 신체에 대한 혐오가 형성된다고도 볼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또 '혐오'라는 단어가 이해하기 어려우면 대상화로 바꾸어서 보면 이해하기 쉽다. 즉, 여성을 주체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어떤 물건 혹은 도구처럼 본다던지. 극단적으로는 여자를 오나홀처럼 본다는 서술을 생각해보자. 오나홀에 대해 혐오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도 다양하겠지만, 최소한 오나홀을 자기와 같은 사람처럼 보지는 않는다는 점은 모두 동의할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이렇게 만들어진 혐오감이 객체화된 타자에게 투사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투사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면 차라리 "우웩 에퉤퉤!"(…)에 가까울 정도의 급격한 반응이라고도 볼 수 있다. 초월과 불멸을 목표로 삼은 주체들은 자신의 영역에 침입해 들어온 혐오감의 근원을 "내뱉고", "추방시키며", "쫓아내 버려야 할" 긴급한 필요성을 느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함께 오염'''되고 썩어 문드러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의 권력적 우위항의 강자들에게 [[여성]]'스러움', [[외국인 노동자]]'스러움', [[흑인]]'다움', [[장애인]]'스러움', [[동성애자]]'스러움' 들은 일종의 [[기생충]]이자 이물질과도 같은 것으로, 이것이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넘어서 침입해 들어오는 것은 주체에게 극도의 위협감을 줄 수 있다. 가장 직접적인 투사의 방식은, 결국 이런 성질들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 것이다. "Misogyny" 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여성 이슈에 끌고 들어온 이브 세지윅(E.K.Sedgwick), 그리고 그 이론을 [[일본]]과 국내에 소개한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의 저자 우에노 치즈코에 따르면, 여성에 대한 혐오, 즉 타자화는 오히려 [[동성사회성]](homosociality), 즉 '''남성들 사이의 연대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요청되었다'''고 설명될 수 있다. 이들에 따르면, 남성들은 강력한 연대를 바탕으로 그들의 기득권을 체계적으로 유지하며, 다른 남성들에게도 이 연대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는 포섭을 시도한다. 헌데 여기서 동성 간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을 촉진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소유물로서의 여성을 교환하고 거래하는 [[여성혐오]]가 나타났고, 반대로 동성 간의 관계가 과도하게 친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가 나타났다는 것. 물론 동성사회성에 대해서는 여성학계 외부로부터 많은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 관점에서 본다면 어째서 이브 세지윅이 처음으로 여성혐오를 주창했던 책의 이름이 《Between Men》 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을 차용한 문화비평을 시도하는 쪽에서는 이런 혐오를 '''[[무의식]]적 억압'''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즉 사람들은 마음 속에서 객체화된 대상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함으로써 그들의 혐오를 작동시킨다는 것이다. 헌데 정신분석학에서 가정하는 기본적인 전제는, 그렇게 억압한다고 해도 그 무의식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때로 그 무의식은 기괴하게 왜곡되고 일그러진 형태로 다시금 귀환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조적 정동은 종종 정반대로 뒤집히기도 한다. 여성에 대한 맹렬한 숭배와 미화가 어느 한 순간 [[여성혐오]]로 돌변하고,[* 실제로 정신분석을 파는 문화비평가들은 [[데이트 폭력]]을 이 방향으로 접근한다.] 부모와의 관계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어린아이가 뜻밖에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친부살해의 욕망]]으로 불타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얘기다. 특히 이는 심리내적으로 미분화된 사람일수록 거의 종이 한 장 차이 수준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휙휙 바뀔 수 있다. [[자크 라캉]]은 상징적 거세를 당해 자신의 육체를 잃은 [[남성]]들에게는 (상징계에 진입하지 못하여 그런 거세를 당하지는 않았다고 여겨지는) [[여성]]의 존재가 끊임없이 자신의 거세를 되새기게 하므로 그들에 대해 혐오를 느끼게 된다고 하였으며,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자본주의]]나 [[가부장제]]와 같은 지배 질서에 도리어 오이디푸스적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혐오는 결국 '''우위항이 열위항에 대해서 보이는 정동으로, 주체가 주체로서 실존하기 위해서 객체에게 보이는 반응'''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주체는 초월과 불멸을 지향하려 하고, 그러려면 자신의 발목을 잡는 열등한 객체를 어떻게든 털어내고 내몰고 쫓아내야만 한다. 객체는 자신의 영토에 스물스물 기어들어와서 자신을 더럽히는 끈적한 오염물인 것이다. 그런 객체를 조금이라도 용납했다간, 그것만으로도 주체는 더 이상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렇게 본다면 주체가 객체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째서 '혐오' 인지도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성혐오]]자들은 제 아무리 여성들에게 사근사근히 대하더라도 정작 자기 자신이 '계집애 같다' 는 말을 들으면 펄쩍 뛰고,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자들은 늘상 쿨한 태도로 [[취존]]을 외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만큼은 '게이 같다' 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한다. 그런 것들이 자신을 열등한 객체로서 타락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들은 혐오가 권력적 우위항의 강자들에 의해서 어떻게 표출되는지에 관심을 가져 왔다. 가장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신체적이거나 언어적인 폭력, 즉 [[살인]]([[대량학살]])이나 [[성범죄]], [[욕설]]과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기사도]]처럼 언뜻 호의적으로 보이는 태도 역시 구조적 수준에서는 혐오 정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인 수준에서는 그것이 베풀어지는 상대방에 대한 분명한 호의적이고 이타적인 모습이 나타나지만, 사회적 구조 수준에서는 "상대방이 여러 이유로 '''자신과 대등한 주체가 되지 못하기에''' 우월한 [[나님]]이 친히 도움을 주어야 한다" 는 암묵적 전제가 반영되어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혐오 내지 증오(hatred)나 경멸(contempt), 역겨움(disgust)이 구조적 정동으로서의 혐오와 동일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 반면 구조적 정동이 권력적 열위항의 약자들에게는 어떤 효과를 갖는지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다. 일차적으로 이는 '''탈권력화'''(disempowerment), 즉 상대방 주체에게 주체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그 과정을 좀 더 구체화하려는 많은 노력들이 있어 왔다. 예컨대, 약자들은 즉각적으로 '''모멸감'''이라는 구조적 정동을 경험하며, 그에 대한 정동적 반응으로서 두 갈래의 기로에 서게 된다. 첫째, 만일 이들이 구조적 정동으로서 '''[[분노]]'''를 선택한다면 이 정동은 약자들의 권력감을 다시 회복시키며 저항과 항의라는 전복적 실천을 이끌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변화(social change)까지도 기대할 수 있다.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표가 바로 이것. 둘째, 반대로 이들은 구조적 정동으로서 '''수치심'''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때 약자들은 스스로가 마치 평가 받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자기 스스로도 [[자기대상화]](self-objectification), 자기검열, 자기규율을 통해 가능한 한 강자들이 부여하는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결과적으로 약자들은 억압의 구조에 공모함으로써, 상기했던 탈권력화가 나타나게 되고 구조적 현재상태(status quo)도 지속된다. [[교차페미니즘]] 연구자들이나 퀴어 연구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소수자성이 존재함을 가정하기에, 혐오 정동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소수자성을 성찰하지 못한 것으로 설명한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아무도 진정한 의미의 우위항에 속한다고 장담할 수가 없으며, 모두가 혐오의 표적으로 노출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실의 많은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한 채로 우위항의 이데올로기를 사회화하여 살아가게 되며, 자신이 그것을 사회화했다는 사실만으로 자기 자신이 그 우위항의 일원이 되었다고 지레짐작하곤 한다. 반대로 자신이 소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자기 내면의 다수자성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루인(2015)[* 루인 (2015). 혐오는 무엇을 하는가: 트랜스젠더퀴어, 바이섹슈얼 그리고 혐오 아카이브. 김수기 편저,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pp.165-226.) 현실문화, 서울.]이 언급한 [[TERF|페미니스트들에 의한 MTF혐오]], 동성애자들에 의한 바이혐오를 들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