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몽주 (문단 편집) == 평가 == 고려 말의 유능한 관리이자 뛰어난 성리학자였으며 성리학의 입장에서 고려를 개혁해보려고 애썼다고 한다. 스승인 [[이색(고려)|이색]]이 이르기를 '''동방 이학(理學)의 비조'''. [[고려시대]] 수도인 [[개경|개성]]에 5부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웠는데 이런 교육체제는 [[조선]]에서도 그대로 계승했다. 주자가례를 실천한 최초의 인물이라고도 한다. 외교적으로는 친명파로서 [[명나라]]와의 외교관계 진작에 앞장섰으며 [[일본]]과의 대외교섭도 맡았는데 실제로도 뛰어난 성과를 남겼다. 당시 [[명나라]] 태조 [[홍무제]]는 [[고려]]와 [[북원]]의 사이를 의심하고 또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 상당히 까다롭게 굴었는데 그 때문에 당시 대명외교는 지난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홍무제]]에게 억류당한 이전 고려 사신들을 풀려나게 해주고 고려의 입장을 이해시켜 목적을 달성해냈으니 그 능력을 보면 알 만하다. 이는 홍무제에게 감명을 준 여러 사건들 때문이기도 했다.[* 처음 사신으로 왔을 당시에는 태풍에 표류되었다 나중에 구조되었음에도 끝까지 서한만은 지켜내서 인상을 주었는데, 세월이 흘러 정몽주 반대파가 정몽주를 홍무제 손에 죽게 하려고 했을 당시 어떻게든 제 시간 안에 명나라로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홍무제는 보통은 신경도 안 쓰는 문서를 쓴 시기를 보고 당시 정몽주의 상황을 알아차렸으며, 이전의 그 사신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후히 대접했다고 한다. 홍무제는 관대할 때는 관대한 면모를 보이는 군주였다.] 대([[對]]) [[일본]]외교 또한 대단한 수완을 발휘하였는데 당시 포악하기로는 손꼽히는 왜구들한테 거의 단신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찾아가 국제관계를 설명하고 설득하여 잡혀온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구출했는데 이 때의 상황이 눈물겹다. 당연히 처음부터 왜구나 일본의 영주가 설득에 응한 것은 아니어서 시간이 걸렸고 준비해간 돈도 떨어져서 앞으로 어찌해야 하나, 하고 탄식하는 시도 남겼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애쓴 끝에 고려인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고 이후에도 왜구의 노비로 혹사당하는 고려 양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사재를 털고 다른 대신들을 설득하여 돈을 모아 그들을 고려로 데리고 오기도 했다. 정몽주의 이런 노력에 감탄한 일본의 영주가 그때마다 고려인 포로를 백여명씩 돌려보내주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통틀어 끌려간 양민구출에 이렇게 노력을 기울인 관리가 상당히 드물다는 것을 볼 때, 사재까지 털어가면서 그들을 구출한 점은 실로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이며 또한 언변이 대단히 뛰어났다. 스승인 이색은 정몽주를 가리켜 "횡설수설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횡으로 말해도 수로 말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원래 이 말은 언변이 매우 뛰어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라고 하면서 동방이학의 비조로 추대한다고 하였으며, [[명나라]]의 [[홍무제]] 또한 정몽주의 언변이 뛰어나서 고금의 예에 어긋남이 없다고 평하였다. 꼬장꼬장하고 문신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배포가 크고 호방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그가 남긴 시와 기록을 보면 당대에서부터 현재까지 호방하다는 감상이 꼭 등장한다. 또한 대단히 침착하여 큰 일을 결단하는데 낯빛이 변하는 일이 없었고 극비로 처리해야 하는 일에서 한 치의 허투름도 없었다고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왕좌지재]]라 하였다. 게다가 직접 왜구 토벌전에도 참전하는 등 무관의 경험도 있었다. 또한 명나라의 법인 대명률을 참고한 신율을 편찬해 법률의 정비로 국가의 혼란을 수습코자 노력했다. 군사적으로도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 [[이성계]]의 왜구토벌 등에 따라 여러차례 종군하면서 공을 세웠고 의창을 재건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후 이 의창은 조선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왜구의 침략으로 황폐화된 조운시설을 재건하여 국가 재정을 회복시켰고[* 조운제도가 황폐화된 시절에는 각지의 세금이 걷히지 않아 재정에 큰 지장을 초래했다.], 원칙도 없이 엉성하게 처리되던 회계출납도 개혁하여 담당관리를 두고 엄중히 관리하여 부정을 막았으며 인재를 뽑아쓰는 일에도 이전과 다르게 엄중히 살펴서 행하여 허투른 인물이 발탁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런 일화들을 볼 때 그야말로 만능 관리였던 것 같다. 한마디로 학문의 대가이면서 외교, 군사, 법률 및 행정에도 뛰어났던 대단한 인물이다. 이러한 능력과 인품으로 민중들 사이에서 인망도 대단히 높았다. 여말선초를 살았던 박신이라는 관리는 백성들이 무기의 병화를 입지 않고 편안히 먹고 자는 것이 모두 선생의 공적이라고 말할 정도. 게다가 한창 세를 불려서 고려에서 상대할 자가 없던 [[이성계]] 일파와 맞서 팽팽히 대결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정치력 또한 보통이 아니며 그만큼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용기도 강하였다. 하지만 끝내 [[이방원]]에게 살해당해 고려의 멸망을 막지는 못했다. 이렇듯 다방면에 걸친 뛰어난 능력과 업적에 더해 충절까지 겸했기에 후대에 평가가 매우 높았다. 정몽주의 충절은 조선 극초기에는 조선 건국에 반대했다고 하여 언급조차 안되었지만 [[세종대왕|세종]] 이후 유교적 충효를 강조하기 위해서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재미있게도 정몽주를 때려잡은 [[태종(조선)|태종]] 이방원은 자신의 즉위 원년에 '''정몽주를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으로 봉하였으며''' 세종은 삼강행실도에 정몽주의 충절 항목을 실어 그의 충절을 본받게 하고자 했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고려 왕조의 충신들에 대해서 상당히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중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여말 삼은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 목은 이색은 학문은 뛰어나지만 절의를 지키지 못했고, 관리로서의 재능이 낮으며 정치적 역량이 부족하다. * 야은 길재는 절의를 굳게 지켰지만, 성격에서는 모가 난 사람이었다. * 포은 정몽주는 절의를 지켰고 관리로서 뛰어나며 인품이 순후하고 성실하다. 라고 하여 이색이나 길재와 비교해도 매우 좋은 평을 내리면서 그가 충신임에 대하여 재론이 필요없다고 하였으며 그 학문적 능력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했다. 이와 같이 정몽주는 단순히 그 충절만 평가된 것이 아니라 외교적 업적같이 관리로서의 능력도 높이 평가되었는데 워낙 충성심이 강조되다보니 현대에 들어서는 충신이라는 것 빼고는 한 게 뭐가 있냐고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다만 객관적으로 보면 당연히 명신이자 충신으로 존경받을 인물이었지만 조선왕조 개국을 반대한 점 때문에 조선 왕들에게 많은 딜레마를 안겨주기도 했다. 실제로 위에서 정몽주를 높이 평가했던 세종대왕은 [[용비어천가]]에서는 정몽주를 반역의 괴수이자 천명을 거스르는 인물로 묘사했는데 읽고 있으면 거의 대마왕같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계속 높아졌고 조선 왕들도 후대로 갈수록 역적도당이 아닌 충신으로 인정하게 된다. [[중종(조선)|중종]]은 사림파의 요구를 받아들여 문묘에 정몽주의 위패를 안치하게 했고 [[명종(조선)|명종]] 대에는 정몽주의 고향에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임고서원이 창건 되었다. 중종은 정몽주가 이씨의 원수라고 하면서도 그 충절을 포장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성리학 윤리와 질서를 추구하며 건국되었으면서도, 건국과 찬탈 과정에서 그 윤리와 현실이 벌어졌던 조선의 정치와 윤리의 괴리를 보여주고, 그러면서 자신들의 명분이 손상됨에도 성리학 윤리를 버릴 수도 없었던 왕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훗날 숙종 대의 사육신 복권이나 영조 대의 추증, 두문동의 재발견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할 듯하다. 다만 이 경우는 국왕이 필요에 의해서 써먹었다는 느낌이 매우 강하다.] 정몽주의 묘에 비석을 세울 때는 그가 고려의 신하로 죽은 뜻을 더럽혀서는 안된다고 조선왕조가 추증한 벼슬을 기재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택리지]]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는데 조선에서 내린 의정부 영의정이라는 벼슬을 새긴 비석은 벼락을 맞았지만 고려의 문하시중이라 적힌 비석은 그대로 몇십년을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학맥의 문제이기도 하다. 조선의 극초기를 제외한 거의 전 시기를 점령한 사대부들, 관학파, 훈구파, 사림파의 학맥에서 정몽주는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특히 정몽주와 비슷한 연배의 인물들이 조선 건국에 부정적이었고 비판도 강했던 데 비하여, 정몽주는 다른 사람도 아닌 태종이 괜찮게 말을 해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밀어줘도 부담이 없었던 케이스이다. 그래서 정몽주의 입지 회복은 엄청나게 빠르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는 물론 훗날 [[송시열]]을 비롯한 사림파들도 정몽주를 찬양해 마지 않았다. 조선왕조 성종실록에 의하면 '그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만약 한 번 마음만 바꾼다면 개국(開國)의 원훈(元勳)이 될 것이니, 누가 그를 앞설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나, 정몽주는 끝내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켜 죽어도 의(義)를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라고 평가된다..또한 후대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은 현저해진다. 영조는 과거시험에서 정몽주의 후손이 장원급제한 것을 알고 기뻐하는 시도 남겼으며 숙종은 정몽주의 시를 모방하여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정치적 라이벌인 [[정도전]] 또한 그를 가리켜 "도덕의 으뜸"이라고 평가했는데 실제로 이 둘은 상당히 막역한 사이기도 했지만 청렴한 관리기도 했던 정몽주의 도덕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충신 이미지 때문에 간과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몽주는 상당한 경지에 들어선 시인이다. 위에서 정몽주의 능력을 설명할 때 유능한 관리이자 뛰어난 성리학자였다고 평한다. 성리학자로서 가진 사상과 식견을 자신의 시에 고도로 승화시켰다. 한문학이나 그에 관련된 전공을 한다면 한 번씩 짚고 넘어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