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몽주 (문단 편집) === 충신은 미화이다 === 정몽주의 행적을 연구한 일부에서는 정몽주를 충신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미화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런 시각에서는 정몽주는 충신이 아니라 단지 대세를 잘 살펴서 줄타기를 잘한 노회한 정객일 뿐이라고 평가된다. 이러한 정몽주가 충신으로 미화된 것은 그를 충신으로 미화, 격상하여 표본으로 삼음으로써, 조선조가 가장 두려워하는 역성혁명을 방지하기 위한 선전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소지는 정몽주가 이인임의 친원정책에 반기를 들어 같은 신진 사대부들과 함께 반대운동을 벌인데서부터 시작된다. 얼핏 이인임의 친원정책에 반대한 것은 외교문제일 수도 있었지만 속내는 친원파인 이인임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그러나 신진 사대부들의 반이인임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정몽주를 비롯한 반이인임 운동에 관여한 자들은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정몽주는 1년만에 유배에서 풀려나왔다. 이는 강경파로서 완전히 찍혀 유배지에서도 훼방을 받았던 정도전은 물론[* 당시 정도전의 외조모가 우현보 일족의 종이라는 루머가 돌고 있었기에 더욱 차별받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빠른 것으로 능숙한 외교관이었던 정몽주는 당시의 집권세력인 친원파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정몽주는 줄타기를 매우 잘한 것이다.[* 그러나 [[염흥방]]처럼 변절 후 [[이인임]]과 결탁하여 토지침탈과 월권 등의 부정부패와 비리+횡포를 부리는 것도 아니었고, [[이색(고려)|이색]]처럼 이런 무리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고 친교를 가지면서 이들의 옳지 않은 행동(최영의 무리한 요동정벌과 북원과의 친교시도를 말리지 않은 것, 토지제도(과전법)개혁을 반대한 것 등)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몽주를 충신으로 보기에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이성계]]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위화도에서 회군]]하는데에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회군 결정에 대해서 찬성하였으며 [[최영]]의 죽음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을 폐위하려 할 때 이를 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찬동해 [[공양왕]]을 옹립하기까지 했었다. 우왕을 자기 집에 초대해서 성대한 잔치까지 벌였던 사람이 말이다. 물론 이성계가 [[역성혁명]]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걸 처음에는 몰라서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이성계의 초반 행보에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 동참했다는 것은 이성계와 손을 잡고 권력을 잡으려는 목적에서 그랬다는 시각이 생겨 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정몽주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했던 건 고려에 대한 충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역성혁명에 찬동해도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이 적다면 고려 왕실을 유지해서 자신이 권력을 잡는 편이 낫다고 계산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몽주가 백성을 위한 민본주의적 성리학을 도입했다는 걸 충신의 예로 들기도 하는데 백성에 대한 애민은 '''고려 왕실에 대한 충성'''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역사적 평가를 봐도 고려의 멸망은 백성들에게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왔다. 즉 정몽주가 고려의 멸망을 막으려고 한 시도는 애민의 입장에서 볼 땐 뻘짓이 되는 것이다. 고려 왕조와 고려 백성을 분리시킨 다음에 백성에 대한 애민정신도 뛰어났으므로 그는 충신이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논리적 근거가 없는 그냥 끼워맞추기에 불과하다. 애초에 전근대시대에 백성이란 윗 사람이 혜택을 베푸는 대상이었지 충성의 대상이 된 적은 없다. 성리학적 민본주의 또한 백성은 나라의 토대이므로 나라가 잘 돌아가기 위해선 윗 사람들인 왕실이나 관리들은 그들을 함부로 괴롭히면 안 되고 관대한 마음으로 시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 결단코 백성에게 주권이 있으므로 그들이 충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주권은 천명을 통해 하늘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군주에게 존재했고 따라서 오로지 군주만이 충성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자유권을 가진 개개인에게 일단 주권이 있고 정치인의 통치권은 정치시스템을 통해 국민에게 위임받은 것에 불과하므로 국민이 충성의 대상이 된 근현대의 민주주의와는 엄연히 다르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인품이 고결하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점도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 예로 이성계가 낙마한 틈을 타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시도할 당시 정몽주의 행동을 보면 고결한 도덕군자의 모습은 보기 힘들다. 간관들을 조종해 공양왕에게 정도전 일파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몰아붙이는가 하면, 관원들을 시켜 정도전 일파를 고문해 죽여야 한다고 엄명을 내리는 등 대단히 냉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참고로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은 정몽주 일파인 이숭인, 이종학 등에게 이 방법을 똑같이 행하여 보복한다. 공식적으로는 곤장 100대를 치게 한 다음, 엉덩이뿐만 아니라 몸통 전체를 때려서 죽게 만든 것. 참고로 이숭인의 경우는 그가 특별히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뛰어난 문재를 정도전이 시기해서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당시 고려의 상황을 보아야 한다. 정몽주가 죽기 직전 공양왕의 왕권은 이성계보다 못한 수준이었고, 사실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성계 입장에서는 명분과 정통성, 모양 좋게 선위 받아서 조선을 건국하고 싶었던 입장이었기에 이러한 상황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인데 수틀리면 이성계가 군사로 역성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심지어 이성계가 정몽주를 죽이고 싶거든 언제든 처단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공양왕과 정몽주로서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사직을 지켜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런 정몽주가 만고의 충신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조선 왕조가 역성혁명에 부정적인 성리학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성리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는 정몽주를 미화하고 떠받들었다는 것이다. 정몽주가 충신으로 미화된 근본적인 이유는 새로운 역성혁명을 방지키 위한 측면이 크다 할 수 있다. 역성혁명으로 건국된 조선왕조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다른 역성혁명에 의해 전복되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왕조의 건국을 가장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몽주를 성인으로 격상하면서 충의 표본으로 삼아 그를 통해 전 대신과 백성들에게 충효사상을 주입하여 역성혁명을 근원적으로 방지하려는 했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