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몽주 (문단 편집) == 여담 == * 정몽주의 10대 조인 [[정습명]](1094-1150)은 [[인종(고려)|고려 인종]] 때 추밀원 지주사에 오른 사람으로, [[태안군|태안 반도]]에 운하를 뚫는 공사를 맡기도 하는 등, 당시 고려 내에서 경륜을 인정받은 행정가였다. [[삼국사기]] 편찬과 [[인종(고려)|세자]]의 교육을 맡는 등 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의종(고려)|의종]] 대에 이르러 목숨을 걸고 왕의 잘못을 간하다가 말년에 자신의 제자이기도 한 의종의 버림을 받고 자결한다. * 조선 [[왕조]]의 창립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충절은 충효를 제일로 치는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도 높이 숭상되었기에 그의 [[후손]]은 조선 왕조 내내 혜택을 받았다. * 정몽주의 아들 정종성(鄭宗誠)은 대단한 [[효자]]였는데 고려 말 아홉 효자 중 1명이었다고 한다. 정몽주가 참살당하자 [[태조(조선)|이성계]] 일파가 그를 [[역적]]으로 선포하고 효수했기 때문에 가산은 모두 적몰되었는데 정종성은 동생과 함께 피신하여 숨어살았다. 지방에 있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근근히 살았다고 하며 [[태종(조선)|태종]] 때 정식 복권된 뒤에도 "정씨의 아들인데도 전하가 봐줘서 살아있는줄 알아라."라는 식으로 폭언을 들었고 조정 [[권신]]들에게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부친의 복권 이후에는 조선 조정에 출사했다. 정종성의 딸은 조선 [[정종(조선)|정종]]의 서자로 5번째 아들인 선성군과 [[결혼]]하였으며 서녀는 [[양녕대군]]의 장남 이개의 첩[* 혹은 후실이지만 정보가 단종과 연루된 일로 첩으로 강등되었다는 얘기가 있다.]이었으므로 아이러니하게도 정몽주는 조선 [[왕실]]과도 인척지간이 된다. 정종성의 얼녀는 세조 집권을 도운 [[한명회]]의 첩인데[* 한명회의 정실부인도 아닌 [[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명부]] 1품 정경부인이었다고 한다.] 반대로 아들이자 정몽주의 장손인 정보(鄭保)는 단종에게 충의를 다해서 [[사육신]]을 옹호하여 그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두둔한 죄로 [[거열형]]에 처해질 상황에 놓였다. 정보가 끌려나간 후에 세조가 정보가 어떤 사람인지를 주변에 묻자 [[신하]]들이 정몽주의 장손이라고 대답하여 이에 놀란 세조가 "충신의 자손을 죽일 수는 없다"고 하면서 형을 중지하고 영일로 [[귀양]][* 유배지 및 관련 사적은 [[경상남도]] [[산청군]]에 남아있는데, 실제로 나중에 단성(現 산청군)으로 이배되었다고 한다.]을 보내며 가산을 적몰하는데 그쳤다.[* 2007년 [[KBS2]]에서 방영되었던 [[북한]] 사극 <[[사육신(드라마)|사육신]]>에서 정종성의 얼녀와 한명회의 관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각색해서 그렸다. 극 중 정종성의 얼녀는 ‘정소연’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이복오빠 정보와 친분을 가졌던 [[성삼문]]을 연모하고 있었다. 한명회는 당시 개경에서 경덕궁지기를 하고 있었는데 정보를 필두로 한 [[개성시|개경]] 사대부들에게 고작 경덕궁지기 따위라면서 [[욕]]을 있는대로 먹자 정보를 엿먹이고자 하는 차원에서 정소연을 다짜고짜 납치해버린 것이었다. 납치하고 나서 비록 [[겁탈]]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한 집에서 하룻밤 지낸 걸로만으로 이미 정소연은 한명회의 첩으로 [[낙인]]이 찍힌지 오래여서 결국 연모했던 성삼문과 이복오빠 정보에게마저 버림받아 결국 [[기생]]이 되버리는 처지가 된다. 그래도 실제 역사와 달리 한명회의 첩이 되지는 않는다.] 중간에 단성(現 산청군)으로 유배되었다가, 거기서 참소를 받아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한명회는 정몽주의 또다른 아들인 정종화의 딸도 자신의 첩실로 두었다. 정보 사건 때문에 이후로 [[가문]]이 기울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과거에 급제해 벼슬한 이들은 계속 나오기는 했다. 정보는 후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표창되었으며 조선 후기 신료들에게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다."는 평을 받는다.[* 이게 그냥 보기에는 별로지만 사실은 엄청난 평가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가문의 명성이란 정몽주를 가리키는데 정몽주가 받는 평가를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평가.] 단종의 충신들을 복권한 [[정조(조선)|정조]] 또한 정보를 가리켜서 "과연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다."라고 하며 [[생육신]]들보다도 윗 줄에 있어야 할 것이라고 평하였다. 정보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차남 정윤화는 과거에 급제해 출사한지 얼마 안 되어 [[면신례]] 때 혹독한 신고식을 당해서 사망하고 만다.[* 후에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정보는 정윤화가 살아있었다면 반드시 이 일에 참여했을 것이니 차라리 일찍 죽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 정몽주의 손녀가 명당터를 얻어서 자신의 시갓집을 잘되게 하려고 무덤자리에 물을 부어서 정몽주의 원래 무덤자리로 예정되어 있던 명당을 훔쳤다는 [[야사(역사)|야사]]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야사에 나오는 손녀는 실제로는 정몽주의 손자인 설곡 정보의 딸인데 그 딸이 이석형이라는 인물에게 시집가 자식을 낳고 젊은 [[나이]]에 죽자 정보가 원래 자기 무덤자리로 찍어놓은 곳에 딸을 묻었고 이석형도 후에 죽어서 아내 무덤 가까이에 묻히게 된 것이다. 이 야사는 후에 이석형의 자손이 크게 번창하자[* 조선의 명문인 [[연안 이씨]] 약 70개의 파가 되는 판사공파에서 단 5개 파를 제외한 나머지 파들은 다 이 사람의 후손들이다.] 생긴 이야기다. 실제로는 두 집안이 서로 가까워서 정씨 [[가문]]의 선산에 이씨 가문의 묘소가 같이 혼재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선산 분쟁이 일어나 이씨 가문의 묘소가 모두 이장되어 나가고 이석형의 무덤만 남은 것이라고 한다. * 정보의 [[사위]]인 이석형 또한 [[조선]] 생원시, 진사시, 식년문을 1년에 세 번 장원하여 이래 없는 일을 탄생시킨 천재로 뛰어난 문장가이며, 판중추부사 등 고위 [[관직]]을 지낸 사람이다. 세조 밑에서 벼슬했고 그의 총애를 받기는 했지만 역시 사육신의 절의를 기리는 [[시]]를 남겼다. 정몽주의 [[라이벌]] 정도전의 증손자 정문형이 절의를 지키기는커녕 [[단종(조선)|단종]]을 배신하고 [[세조(조선)|수양대군]]에게 붙어 평생 잘먹고 잘살며 아무런 업적을 남기지 않은 것과는 비교된다. * 조선 [[인조]]와 [[효종(조선)|효종]] 때 우의정을 지낸 정유성 또한 정몽주의 자손으로 그 손자 정제현은 효종의 딸 숙휘공주와 결혼하여 인평위가 되었다. 또다른 손자 [[정제두]]는 [[양명학]]의 거두로써 이름을 떨쳤다. * 조선 후기에 종가의 대가 자주 끊어져서 그 후계 문제로 여러 차례 조정에서 논쟁이 일어났으며 이와 관련해서 조정 대신들이 옛 일을 상고하거나 종손으로 양자입적할 후손들을 물색하였고 왕명으로 양자입적의 예외를 인정하는 등 중요한 사안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정몽주가 조선 후기를 지배한 사림파의 비조였기에 그 종가의 후계 문제가 [[정치]]적인 색깔을 띄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러한 종손의 후계 문제를 다른 가문들이 따라하기도 하여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 아이돌 [[신화(아이돌)|신화]]로 활동하고 있는 [[신혜성]][* 신혜성은 [[예명]]이며 본명은 [[신혜성|정필교]]로 포은공파 32세손 '教'자 항렬이다.]이 정몽주의 32대 후손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신혜성의 친가에 포은 정몽주 선생의 서찰 교지가 남아 있는데 모두 [[대한민국의 국보|국보]]급 [[문화재]]라고 한다. * 정몽주의 제자 중에 권우라는 인물이 있는데 후에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했고 [[세종(조선)|충녕대군]]이 [[세자]]가 되자 그 빈객이 되어 [[학문]]을 가르쳤다. 이런 관계로 세종은 정몽주의 손[[제자]]격이 된다. * 정몽주의 제자 또는 사제(師弟)인 [[권근]]은 그 파에 속하여 [[태조(조선)|이성계]]의 반대파에 섰으나 스승이 [[태종(조선)|이방원]]에게 피살된 이후에는 바로 이성계 측에 붙어 조선에서 높은 벼슬을 지내고 태종 이방원의 딸 [[경안공주]]를 [[며느리]]로 들이는 등 권세를 누렸다. 후에 정몽주의 신원을 적극 주장하여 태종이 정몽주를 복권시키는 단초를 마련하였다. 비록 절의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하여 후학들에게 [[변절]]자로 비난받기는 하지만 [[외교]]면에서 공을 세웠고 문필과 학문에 뛰어났다. 권근의 손자가 한명회와 함께 세조를 옹립하고 [[훈구파]]의 대표 인물이 된 [[권람]]이다. * 태종과 세종 때 명신으로 높이 평가받은 [[변계량]] 또한 정몽주의 제자로 외교 문서를 전담할 정도로 뛰어난 문장가이자 중신이었다. 선대를 모시는 법도를 엄격히 하여 정몽주의 행한 바를 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 세종 시절 명신으로 이름을 남긴 영의정 [[하연]]은 그 부친이 정몽주의 옆집에 살았던 인연으로 그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마지막 제자이기도 했다. 그의 강직함에 감탄한 태종이 그의 손을 잡고 치하할 정도였다고 한다. * 이외에도 [[길재]], [[이숭인]]과 같이 지방으로 내려가 지역 사회에 성리학을 보급한 제자들도 있었다. 종국적으로 정몽주는 죽었지만 정몽주의 제자들은 훗날 사림파를 형성하여 풍파는 있었지만 조선 왕조 500년의 세월 동안 지배층으로 자리잡았다. * 후에 [[정적]]이 되는 [[정도전]]과는 동문수학 사이이며 야사에서는 서로를 동심(同心友, 같은 뜻을 가진 벗)이라 부를 정도로 가까웠다고 하며 [[맹자]]에 관한 서적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 맹자는 [[역성혁명]]을 다룬 서적으로 정도전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정몽주는 오히려 고려 왕조 최후의 보루로서 정도전과 대립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정도전은 정몽주를 "도덕의 종장, 문채의 으뜸"이라고 평하였고 항상 "선생"이라고 부르며 존경심을 표현[* 꼭 그렇지만은 않았고 정도전이 정몽주에게 사적으로 보낸 서신에서는 격의 없이 자인 '달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정도로 허물없는 막역지우였던 사이였다.]했으며 정몽주 역시 정도전에 대해서 "정생은 막빈에 든 사람 중 가히 으뜸"[* 당시 정도전은 이성계의 막료가 되어 막 [[함흥시|함흥]]으로 나아가는 때였다. 이성계의 사람들 중 정도전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이라는 내용의 시를 지어 보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친우였고 역사적으로는 이상을 부딪히는 정적이었으며 한 사람은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한 사람은 새로운 세상을 열려 했다는 점 등 인상적인 대비점이 많아서 자주 함께 거론된다. [[태종(조선)|태종]]의 집권 이후 조선의 설계자인 정도전은 [[간신]]으로 비하되고 고려의 [[충신]] 정몽주는 동방의 성현으로 [[성균관]]에 모셔지는 등 후세의 아이러니컬한 평가도 눈길을 끈다. * 극심한 반불론자였던 정도전과는 달리 [[불교]]를 그렇게까지 배척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정몽주는 "[[삼한]]에 불교가 바야흐로 유행하니 [[마가다|왕사성(王舍城)]]에까지 가서 구할 필요가 있겠나"라고 말할 정도로 불교가 유행했던 사회 환경에 살았기 때문에 불교와 인연을 끊을 수는 없었다. 정몽주가 승려와 자주 접촉했던 시기는 [[공민왕]] 5년으로 그의 나이 20세되던 해인데 이 해 여름에 김중현(金仲賢)이란 친한 벗과 함께 [[책]]을 가지고 원증국사 보우(圓證國師 普愚, 1301∼1382)를 방문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따라서 정몽주가 불교의 여러 [[경전]]을 통해 불교 교리를 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시문을 통해 불교 교리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심지어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자중을 바라는 서한을 보낸 일도 있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결코 유학의 도를 떠나 불교에 탐닉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그가 한편으로는 불교를 이해하는 측면이 있지만 역시 유자로서 불교를 비판하고 있는 사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공양왕]](恭讓王)이 찬영(粲英, 1328∼1390)을 맞아들여 왕사(王師)로 삼으려는 것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으며 유불이 높은 경지에 있어서 서로 통할 수 있음을 한편으로 인정하지만 구체적 현실을 논할 때 불교는 미흡함이 있으며 불교처럼 현실을 벗어나 도를 찾기보다는 유학 경전을 통해 현실 속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정몽주의 불교관은 많은 당시 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단순히 불교의 폐단뿐만 아니라 불교의 [[이론]]적인 부분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 여말선초 사상적 패러다임의 전환 탐구, 정성식.] 불교 [[절(불교)|사찰]]을 공격한 [[유생]]들을 옹호하며 처벌하지 말 것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린 적도 있다. * 당대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왕을 보필할 재주라 하여 [[왕좌지재]]라고 칭하였는데, 같은 평가를 받았던 역사적 인물로는 [[순욱]]이 있다. 공교롭게도 순욱은 정몽주처럼 당시 무너져가는 [[후한]]을 일으키기 위해 진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으며, [[조조]]를 보필하여 권력을 잡았으나 오히려 나중에 가서는 조조의 역심을 알고 이에 대립하다 죽었다는 점에서 많은 부분이 유사하다. 특정 권력가(이성계, 조조)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였고, 그 세력의 힘을 통해 무너져가는 나라(고려, 한)를 다시 일으키려는 생각이었으나, 오히려 그 권력가(이성계, 조조)에게 역모의 마음이 있어 이를 계기로 관계가 틀어지고 대립하다 죽음을 맞이하며 후에 결국 왕조가 교체된다는 점까지도 똑같다. 혁명파와 개혁파의 정치 성향이 같아 친하게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이 와 혁명파의 본심이 드러나면 서로 갈라지게 되는 숙명으로 보인다. *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시]]에서 상당히 밀어주는 인물로, 임고면에 위패를 모신 임고서원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허가 돼 있다가 1965년에 대충 건물만 복원한걸 2009년부터 증축하여 지금은 상당히 으리으리하게 꾸며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인근에 있는 면사무소보다 더 크다. 때문에 [[포항시]]에서 불편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포항시와 영천시는 서로 우리가 포은 선생의 고향[*포은 선생이 태어나신 곳은 영천임이 분명하다. 포은 선생이 태어나실 때에 그의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고려시대의 풍습도 또한 그와 같다) 포은 선생의 외가 후손들 또한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이라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143&aid=0000056808|분쟁을 벌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포은 선생의 또다른 고향인 포항시 남구 오천읍 문충리는 오천 읍내에서 꽤 떨어진 한적한 곳이고, 동해고속도로 포항~울산구간 공사 때문에 동네 주민들이 개발에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기에[* 고속도로가 통과하는 산이 마을 선산이었던지라 묘소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를 노려 영천시가 포은 유적지 개발을 선점한 것. [[영천시]]에서는 포은 선생의 생가, 임고서원, [[선죽교#s-3|가설 선죽교]]를 새로 복원했으며 영천에는 '''포은'''초등학교와 [[포은고등학교|'''포은'''고등학교]][* 이전에는 금호여고였으나, 남녀공학으로 변경되면서 이름을 바꿨다.]가 있다. 그리고 포항에는 '''포은'''중학교와 '''포은'''중앙도서관, [[정몽주로]]가 있다. * 묘소가 있는 [[경기도]] [[용인시]]에서도 밀어주고 있다. 수지구를 관통하는 국도명이 '''[[포은대로]]'''이며, 수지구에 위치한 대규모 문화시설인 '''포은'''아트홀과 '''포은'''아트갤러리가 그의 호를 따서 명명되었다. * 김씨 [[정권]]의 붕괴를 우려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역사 [[교과서]]를 통해 [[권력]]에 눈이 멀어 나라를 팔아먹고 [[고구려]] 영토를 되찾을 기회를 날려버린 대역죄인이라고 가르치는 [[북한]]에서도 정몽주를 고려의 충신으로 강조하고 있다. 비록 김씨 정권에게 충성하라는 뜻이 깔린 것이지만 북한에서도 정몽주의 충심을 인정하고 있는 모양.[[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2582106|#]] * <[[고려사]]> [[이색(고려)|이색]]전에 따르면 [[술]]에 취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주사가 있었다고 한다. * '음주(飮酒)'라는 제목의 시도 지었는데 그 호쾌한 내용 덕에 고려-조선조 선비들에게 즐겨 낭독되었다고 한다. > 飮酒(음주) >---- > 客路春風發興狂 [객로춘풍발흥광] > 나그네 길 봄바람 만나니 미친 흥 절로 난다 > > 每逢佳處卽傾觴 [매봉가처즉경상] > 아름다운 곳 만날 때마다 술잔을 기울이네. > > 還家莫愧黃金盡 [환가막괴황금진] > 집에 돌아와 돈을 다 썼다고 부끄러워 말자 > > 剩得新詩滿錦囊 [잉득신시만금낭] > 금낭(錦囊)[* 지갑]에 한 가득 신시(新詩)를 얻었으니.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묘살이 3년상을 최초로 이룬 고려 사람이라고 한다. * 9살 때 쓴 [[편지]]가 있는데 지금 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글솜씨가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9살 당시 외삼촌인 판서댁에서 머물던 중 한 여종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남편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했는데 [[글]]을 몰라서 쓸 수가 없자 정몽주에게 대신 써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여종의 남편도 글을 모르니 주변 선비에게 부탁해 읽었고, 그 선비는 여종의 글솜씨에 감탄하여 주변에 소개하게 되면서 소문이 났다고 하는데, 당시 여인들의 연서에 즐겨 사용하는 문구가 되었다고 한다. 결국 소문의 근원이 궁금한 사람이 찾아와 정몽주가 쓴 것이 밝혀졌다고. > 相思曲(상사곡) >---- > 雲聚散月盈虧 [운취산월영휴] > 구름은 모였다가 흩어지고 달은 찼다가 이지러지나 > > 妾心不移 [첩심불이] > 첩의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 > 緘了却開添一語 [함료각개첨일어] > (편지를) 봉함하였다가 도로 열어 한 마디 덧붙이는데 > > 世間多病是相思 [세간다병시상사] > 세간에서 병 많은 것이 상사(병)이라 하더이다. >---- > 정몽주가 9살 때 여종을 위해 대필해준 연애편지 * 고려에 나타난 [[요괴]]를 보고 소년 정몽주가 혼란스러운 고려말을 예견하는 민간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https://blog.naver.com/szvaxx/222126018945|#원문]] * 흔히 정몽주의 학맥은 [[사림파]]로만 이어지고 [[훈구파]]와는 반대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의 제자인 매헌 권우는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하며 [[세종(조선)|세종]]의 [[스승]]이 되어 가르쳤고 정몽주의 [[성리학]]적 민본주의는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세종의 치세에 영향을 미쳤다.[* 일부 [[사극]] 등의 영향으로 세종이 정도전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의 사상을 이었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으나 실제 [[사료(역사)|사료]]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세종이 정몽주의 손제자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편이 맞다. 이외에도 세종 치세의 [[신하]]들 또한 정몽주의 학통이 대부분이다.] [[기술]] 관료로 이름을 날린 [[정인지]]도 권우의 제자였으므로 정몽주의 학통에 속하고 정몽주의 제자나 가까운 사형제(師兄弟)들이 조선 초기 훈구파를 이루었던 관계로 이들 또한 정몽주의 학통을 일부 잇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권근과 변계량 등이며 세종 시절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영의정 [[하연]]은 정몽주의 마지막 제자였다.] 조선 왕조의 개창을 반대했으면서도 조선의 양대 정치사조에 모두 영향을 끼친 인물로 [[여말선초]]에 어지간히 [[이름]]을 남긴 인물치고 정몽주의 [[제자]]나 [[문인]]이 아닌 사람을 찾기가 힘들며 그들을 통해 조선 개국 이전에 죽었지만 조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 [[연산군]] 때 밉보인 죄로 처형당한 연산군의 [[스승]] 조자서의 아내는 남편이 죄인으로 처형당했지만 정몽주의 증손녀라서 [[연좌]]되는 것을 피했다. 그의 무덤도 처음에는 [[태조(조선)|이성계]]에 반대한 죄인이라 하여 [[승려]]들이 몰래 묻어줘야 할 정도였지만 조선 건국 이후에 복권되면서 [[왕릉]]에 비슷할 정도로 우대받으면서 관리되었다. 오히려 조선 개국의 1등공신이지만 [[역적]]으로 찍혀 조선 말기 때 신원해준 [[정도전]]과는 대접의 차원이 달랐다.[* 다만 정도전의 후손들은 정도전과 무관하게 역적으로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고 대대손손 [[고관대작]]을 지냈다. 연산군 때 정도전의 증손자인 정문형이 [[우의정]]에 제수될 정도였는데 얼마 안 가서 대간의 [[탄핵]]으로 물러났다. 그때 대간이 꼬집은 이유도 정도전의 후손이라는 이유가 아닌 50년이나 [[벼슬]]하면서 큰 실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정작 정도전 본인은 [[시체]]도 제대로 수습이 안됐고 [[장례]]는 치렀는지, 묘소는 어디인지 자손들도 모른다.] 몇몇 일화에서 보듯이 조선 시대 손꼽히는 [[폭군]]조차도 그 후손들을 죽이는 것은 피했을 정도이다. 이 정도면 중국 [[한나라]] [[소하]]의 자손들에 대비될 정도의 특혜. * 1990년대부터 그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나오고 재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정도전에 대한 인식이 대중적으로 재평가되었던 것과 맞물리는 편인데[* 이 시기에 전체적으로 [[원균]], [[광해군]], [[정도전]] 등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 붐이 일어났었다. 이는 직전까지 군사정권 아래에서 대체로 고정된 [[이미지]]로 가르쳐진 역사와 인물들에 대해 [[정치]]적 입장과 더불어 새로 평가하게 된 경향이 있다. 그 때문에 한동안 이런 흐름이 지속되기는 했으나 다시 연구가 활발해지고 붐이 가라앉으며 객관적 시각이 늘어났다. 원균은 다시 개노답으로 내려왔고 광해군 역시 명암이 뚜렷한 인물이 되었다. 정도전은 [[드라마]]로 대표되는 재평가를 이어받았고 정몽주는 [[충신]]을 넘어서는 능력자로서 평가받고 있다. 결론적으로 1990~2000년대 역사의 재평가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자리잡은 시기에 일어난 일들이다.] 정몽주가 충신인가 아닌가 하는 내용은 이와 관련이 있다. 다만 지나치게 고려의 마지막 충신 이미지만 강조되다 보니 고려 말 혼란기 속에서 제도 [[개혁]]을 위해서 노력한 점, [[왜구]] 토벌에서도 활약한 점, 왜구에게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활약한 점 등의 능력있는 [[정치인]]으로서의 모습이 가려지는 경향도 크다. * 원래는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으로 이장하려고 관을 옮기던 중 명당자리를 발견하여 그 자리에 이장하고 자손들이 터를 잡게 된 것이 현재 묘소라고 한다. 상당한 [[명당]]인데 후에 [[선조(조선)|선조]]의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여 그 능터를 찾던 지관이 적당한 곳을 발견했는데 그 곳이 바로 정몽주의 현 묏자리였다. 이에 선조는 난색을 표하면서 명당을 얻기 위해 충현의 무덤을 파헤칠 수 없다 하여 다른 곳을 찾아 의인왕후를 매장토록 했다. 정몽주의 무덤이 있는 곳 일대를 능골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러한 일화에 따라서 왕릉 자리로 택지될 정도의 명당터라는 뜻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복권되면서 무덤 또한 대단히 크고 화려하게 단장하여 거의 왕릉 수준으로 다듬어져 있다. 유림의 정몽주에 대한 존경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 정몽주가 죽자 이성계는 그렇게도 아끼던 자신의 아들인 이방원을 증오하게 되고 막내아들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다. 어찌보면 정몽주의 죽음이 [[1차 왕자의 난]]의 간접적인 원인이 된 셈이었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드라마)|태종 이방원]]에서도 정몽주의 죽음 이후로 이방원과 이성계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는 묘사가 나오고, 조선이 건국되고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며 조만간 이방원이 큰일을 벌일 거라는 암시를 준다.] * 의외로 정몽주는 [[발해]]와도 관련이 있는데 그는 발해고성(渤海古城)이란 시를 써서 발해 유민에 대한 소회를 남긴 적이 있다. 아마 요동지역을 지나갈 때 썼을 가능성이 높다. [[https://cafe.daum.net/dobulwonin/MJS7/305?svc=cafeapi|#]]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