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성태 (문단 편집) == 생애 == 1915년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군]]에서 태어나 1940년에 [[보성전문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자신의 [[보성전문학교]] 재학 당시의 스승이었던 설산 [[장덕수]]의 권유로 [[한국민주당]]에 입당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탈당했다. 이후 [[이범석]]의 족청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50년 공무원을 사퇴하고 고향인 광주에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무소속 [[박철웅]]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그 후 광주상업고등학교(현 광주동성고등학교)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임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광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민주당(1955년)|민주당]]이 창당하자 이에 참여하여 민주당 구파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광주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대에는 정치판이 혼탁하여 선거판에 나온 사람들 모두 돈을 물 쓰듯 쓰는 것이 예사였으나, 정성태는 리어카를 타고 다니면서 연설을 할 정도로 검소한 선거운동을 하였다. 지역구 유권자들에게는 물론이고 선거운동원들에게도 제대로 식사를 챙겨주지 못할 만큼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선거운동을 했지만, 매번 당선되는 기염을 토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전라남도 광주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4년 [[한일기본조약]] 반대운동에 참여했으며, 1965년 8월 13일 [[한일기본조약]] 비준에 항의하는 뜻으로 [[민중당(1965년)|민중당]]에 탈당계를 제출해 [[윤보선]], [[김도연(1894)|김도연]], [[서민호]], [[정일형]], [[김재광]] 등과 함께 국회의원직이 자동 상실되었다. 이로 인하여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는 [[정민회]] [[유수현(정치인)|유수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1966년 [[신한당]]에 참여하였다가 다시 통합야당 [[신민당(1967년)|신민당]]에 참여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전라남도 광주시 갑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1970년 6월부터 1971년 6월까지 국회부의장직을 역임했다. 1969년 8월 31일 광주에서 ‘3선 개헌반대 천리길 헌정수호행진’을 시작해 11일 동안 걸어서 서울에 진입하려다가 정사복 경찰중대에게 저지당하고 서울 삼청동 자택으로 이끌려갔다. 당시에 정성태의 천리도보 행진은 전국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전라남도 광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통일당]] [[김녹영]] 후보와 [[민주공화당]] [[박철(정치인)|박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2000년]] [[8월 17일]]에 사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