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세균/생애 (문단 편집) === [[민주통합당]] 시절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쉽게 당선될 수 있는 자신의 지역구를 마다하고, 격전지이자 정치 1번지인 종로구에 출사표를 던졌다. 종로구는 역대 대통령만 3명이나 배출한 곳으로서 정치적 상징성이 매우 높은 곳이지만[* [[윤보선]] 전 대통령은 종로에서 3선을 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도 여기서 지역구 의원을 지냈다.], 199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보궐선거 승리를 빼고는 1990년대 이후 모두 보수 정당 후보가 당선됐던 지역이라 야당 의원들에게는 험지(險地)에 속하는 곳이었다. 더욱이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때에는 민주당에서 [[손학규]] 대표가 출마했다가 한나라당 박진 후보에게 패해 고배를 마셨으니,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느냐는 반응이 나왔다. 원래 이명박 前 대통령 및 친이계는 종로구에 새누리당 후보로 친이계 최측근이자 소위 MB키즈로 불리는 [[이동관]]을 공천하려 했으나[* 실제로 친이계의 좌장 [[이재오]] 및 이명박의 최측근들이 이동관을 종로구에 공천시키기 위해 노력했고(이 당시 친이계가 이동관을 얼마나 밀어줬냐면, 이동관이 종로구에 예비후보 사무실을 차렸을 때도 친이계의 수뇌부로써 최상위 서열에 위치한 이재오와 최시중이 직접 이동관을 방문해서 격려하기까지 했다.), 이동관은 이 때 각종 종로구 행사에 정세균과 같이 참여해서 나름 각을 세우면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동관은 선거로 정계에 처음 입문하는 인물인데다[* 19대 국회 때 친이계가 친박의 세에 눌려 다소 공천을 받은 인물이 적어졌지만 당시에는 이명박이 대통령이었던지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이계의 최측근급 인물들은 거의 다 공천을 받았는데, 아무리 그래도 MB키즈로 불리는 정계 입문 희망자가 친박의 좌장으로 불리는 인물을 경선에서 이기고 공천받을 확률은 낮았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이 낮아진 상황에 이명박의 최측인 이동관을 공천했다면 오히려 정세균에게 대패하고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까지 타격을 입는 굴욕을 당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상대가 친박의 좌장인 홍사덕인지라 홍사덕에게 밀려 공천에서 탈락했다.[* 이 당시 새누리당의 종로구 국회의원 후보 공천은, 그 당시 지역구를 담당했고 현역 국회의원이었던 비박계의 박진, 친이계가 강력 지지한 이동관, 친박 중진에 속했던 홍사덕의 3파전이었다.] 어찌됐든 상대 후보는 친박의 좌장 중 한 명이자 6선 경력의 [[홍사덕]]으로, 워낙 지명도가 높은 데다 당시 [[새누리당]]의 차기 당대표로 지목될 만큼 주목을 받는 인물이어서 아무래도 불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다만 홍사덕은 지역구를 자주 옮긴데다가(16대 이전까지는 [[강남구 을]], 16대 전국구, 17대 일산동구, 광주시, 18대 대구 서 을, 19대 종로 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의 주역이라는 점이 페널티였다.] 하지만 결과는 5천 표 이상의 압승이었다. 득표율은 52.27%. 승리의 원인으로는 종로의 밑바닥을 거의 훑다시피했던 선거운동과 특유의 스킨십이 꼽혔다. [[https://www.youtube.com/watch?v=_HBYzDt9U-g|관련 동영상]] 이로써 정치 1번지인 종로구에 안정적으로 둥지를 틀었고, 5선 고지 등정에 성공했으며, `호남 정치인`에서 벗어나 `전국구 정치인`의 위상을 갖게 됐다. 어찌 됐든, 서울 도심이자 서울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종로에 입성하면서, 정세균은 점차 정계의 거물급 인사 중 한 명으로 성장하게 된다. 여기서 이 선거결과를 봤을 때, 이명박의 최측근 중 한 명이었던 이동관이 종로구에 새누리당 후보로 공천돼서 정세균과 붙었어도 득표율을 추정해 봤을 때 여전히 정세균이 무난하게 당선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가 친박의 홍사덕은 차라리 유명한 정계 중진이기라도 했지, 친이계의 이동관은 새누리당에서 확정해서 출마를 시켰다고 해도 초선도 아닌 정치 경력이 전무한 인물이었다.(설사 당선되었다 쳐도 초선 의원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또한 그 시기는 이명박 정부 말기인지라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상당한 시기였던만큼 이명박의 최측근인 이동관과 붙었다면 '''오히려 정세균이 홍사덕과 붙은 것 이상으로 이동관을 득표율에서 찍어 누르고 당선됐을 것으로 보이며 이명박 대통령 후반기 임기 당시의 지지율에도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이 '''제19대 국회의원 총선은 정세균이 정계의 중진으로 입지를 크게 넓히는 데 발판이 된 선거'''였다.] 그렇게 종로에서 압승한 기세로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당내 경선에서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전북에서만 1위를 했을 뿐, 전국적으로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결국 [[문재인]] 후보에게 패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상당한 선전이 기대되었으나, 의외로 경선주자 4인 가운데 꼴찌를 마크하였다. 경선 패배의 원인은 역시 대중성의 부족, 그리고 카리스마의 부족, 당시 같이 친노계의 좌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노 진영이 대부분 노무현의 후계자라 불리는 문재인에 결집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 시절에 [[김연경 흥국생명 이적 파동]]이 발생하자, 김연경을 위해 [[https://www.instagram.com/p/CRphhFGBUJ7/|힘을 써주었다]]. > '''당시 저와 동료의원들이 기자회견까지 열어 대한배구협회에 국제이적동의서를 발급해달라는 요청을 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합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