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용환 (문단 편집) === [[개화기(꽃)|개화(開花)]] === 고려대로 진학했으나 구타에 신물이 난 그는 대학교 3학년 때도 얻어맞자 운동을 접을 결심까지 하지만 결국 축구와 헤어지지 못하고, 이 3학년 때 인도네시아의 마라하림컵에서 고려대가 우승을 차지하고 국가대표로까지 발탁된다. 정용환은 브라질 [[포르투게자]]와의 친선전에서 데뷔, 국가대표 데뷔골을 뽑아낸다. 또한 대표팀에서 '''근력운동'''([[웨이트 트레이닝]])을 처음 접했는데, 세간의 오해[* ex.달리기가 느려진다]와 정 반대로 이제까지의 노력을 웨이트 트레이닝에 쏟아붓기 시작한다. 휴식시간이 주어져도 당구 등으로 모처럼 여가를 보내는 동료들과 달리, 국대훈련에서 처음 접해본 근력운동에 몰두했다는 후문. 그 결과 하체(근력운동, 높이뛰기)와 상체(근력운동)가 골고루 발달해 [[박종환]] 감독이 '''"스프링처럼 탄력있는 몸"'''이라 평할만큼 탄탄한 근육을 갖추게 되었다. 대학교 생활을 마치고 대우에 입단한 정용환은 프로 데뷔 첫해에 우승을 맛보게 되며, 베스트 11과 감투상을 수상한다. 신인왕 상이 이듬해 만들어졌는데, '''감투상으로는 정용환의 활약을 기리기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속설도 있다. 정용환은 1985년부터 2년 간 대우에서 총합 5경기밖에 못 뛰는데 [[이동국]] 등이 경험했던 청대와 국대 돌림빵 때문이었다. 다행히 정용환은 이미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1년이 지난데다가, 웨이트를 열심히 하는 선수였고, 포지션 역시 상대적으로 활동량이 적은 수비수였던 관계로 큰 부상이 없이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한국은 월드컵 본선에 정말 오랜만에 진출하게 되는데, 정용환은 주전수비수로서 커다란 활약을 했다. 특히 일본과의 홈경기, 원정경기 2경기에서는 신들린 활약을 했던 것으로 회자되며, 원정경기에서는 일본 공격진들을 다 잡아먹음은 물론 선제 중거리포까지 터트리며 승리의 1등공신으로 활약했다. 월드컵 본선을 나름대로 치러낸 정용환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도 뽑혀, 짠물수비로 한국 대표팀의 금메달에 일조한다. 이로써 [[예술체육요원]]에 편입되면서 병역문제를 해결했고,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는 대선배 [[조광래]]의 고별전을 빛내주었다.[* 한국은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야 다음 금메달을 차지한다.] 이듬해 정용환은 시즌의 반 정도는 대우에서 뛰게 되는데, 그럼에도 베스트 11으로 선정되며 대우는 32경기 20실점을 기록하는 짠물수비를 통해[* 현대가 40실점으로 그 다음이었다.] 우승을 차지한다. 이듬해 대우는 아시안클럽챔피언십 우승을 바탕으로 1회 아프로-아시안클럽챔피언십에 출전, 우승을 거두며 2대륙 종합 챔피언의 좌를 차지한다. 이 후 정용환은 1987년 [[유니버시아드]], [[1988 서울 올림픽]],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예선 및 본선,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남북통일 축구대회 등에서 변함없이 국가대표팀의 주전 센터백으로 활동한다. 1991년 프로축구팀에 매진하게 된 정용환은 30대로 선수생활의 전성기에 접어들어, 33경기 2골을 기록하며 대우에 우승을 안기며, k리그 MVP마저 차지하게 된다. 베스트 11, 모범상까지 3관왕을 차지하며 [[홍명보]] 이전 최고의 수비수임을 증명해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