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용환 (문단 편집) === 플레이 스타일 === > '''“우리가 평상시 운동장에서 뛰는 운동은 기본적인 근육밖에 발달시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헬스는(= 근력운동은) 짧은 시간에 강한 운동을 할 수 있잖아요. 게다가 평소에 쓰지 않던 근육도 단련시킬 수 있기 때문에 부상당할 위험도 줄어듭니다. 근력운동을 하면서 가장 도움을 받은 것도 부상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죠. 몸의 탄력적인 부분. 그래서 바른 자세 같은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 2010년 정용환 감독 후원회 결성식날 인터뷰 [[홍명보]] 이전 대한민국 제1의 수비수.[* 홍명보가 역대 1등이고 정용환이 2등이라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다.] 꾸준하고 성실한 몸관리로 만든 탄력좋은 신체와 + 이를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해보는 선수였다고 한다. '''개인 훈련으로'''[* 수험생이 혼자 공부한 과목에서 한국 상위 0.1 ~ 0.5% 안에 드는 실력을 갖춘 격이다.] 197cm 외국인 선수와의 공중경합에서 안 밀리는 특급 도약력과 헤딩 능력, 긴 체공시간을 갖췄으며 '''선견(先見), 선구적인'''[* 이 때만 해도 근력은 달리기 능력과 반비례 관계라는 식으로 저평가 받았다고 한다] 근력운동([[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탄탄한 몸을 만들어, 크지않은 신장(178cm)을 극복한 대표적인 노력형 인물. '''틈틈히 적어둔 연구자료를[* 동료들과 지도자들의 견해를 기억해두었다가 따로 정리한 것들이었다고 한다.] 활용'''해 남다른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당시 한국 수비의 대세였던 '''대인 방어능력(맨마킹)이 가장 뛰어난 한국 선수'''로 평가받았다. 전문 센터백임에도 불구하고 프로 생활 11년 동안 단 한 차례도 [[레드카드]]와 [[자책골]]을 경험하지 않을 정도로 선을 넘지 않는 깔끔한 수비력을 보여주었다. 상술했다시피 경고를 처음 받은 게 프로 9년차인 1992년이었다고 하니. 신인선수 시절에는 '''"힘으로만 승부하는 선수라 오래 못갈 것"'''이라 악평 또는 충고를 들었다고 한다. 사실, 이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국내에서는 "몸을 키우면 달리기가 느려진다."는 선입견으로, 날렵하지만 몸싸움에는 경쟁력이 약한 선수들이 양산되고 있었기 때문. 국가대표 코치진들은 선견(先見)적으로 근력운동을 권장했으나, 아직 소수의견 수준이었던 관계로 정용환에 대한 오해는 한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의 오해와는 다르게, 발목 부상으로 국가대표를 그만두기 전까지 13년 동안 국가대표 부동의 수비수로 있었으며, 대한축구협회 최우수 선수상에 1회, 대한축구협회 베스트11에 4회, K리그 베스트11에 3회 선정되었다.[* 그중 84년, 87년은 중복이다.] 전 국가대표선수 [[김도근(축구)|김도근]](1972년생)이 92년 올림픽대표 시절 [[태릉선수촌]]에서 정용환과 같은 방을 썼는데[* [[파주NFC]]가 완공된 건 2001년 11월이었고, 그 이전까지의 축구 국가대표팀은 연령대 가리지 않고 태릉선수촌에서 더부살이했다.][* 띠동갑이었던 관계로 정 선수를 [[삼촌]]이라 불렀다고 한다], 술담배를 않고 적절한 휴식으로 몸을 관리하는 정 선수 모습이 매우 인상깊었다고. 참고로 김도근 역시 성실한 몸관리와 다양한 위치소화능력으로, 98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하였다.[* [[거스 히딩크|히딩크]] 감독의 부름도 받았지만, 역시 멀티플레이어로 97년 국내 MVP 선정 경력의 경쟁자 [[유상철]]에게 밀려 02년 대회에는 나가지 못했다.] 또한 학구파 기질도 강해서 아직 인터넷과 PC가 보급되기 전인 1990년대 중반에 일찌감치 하이텔에 개인 홈페이지를 개설해 축구 관련 자료를 손수 아카이빙해놓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