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일권/생애 (문단 편집) == 6.25 전쟁 == [[6.25 전쟁]]이 발발한 뒤 [[채병덕]] 육해공군총사령관이 서울 함락으로 해임되자, 1950년 7월 육군 [[소장(계급)|소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육-해-공 3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50년 4월 22일부로 미국 육군참모대학으로 유학갔으나, 전쟁초기 육군참모총장이자 3군총사령관인 채병덕 소장이 방어작전에 대한 무지함으로 인하여 미군의 불신을 받았고, 미군정시기 양성한 주요 지휘관들--당시 미군은 광복군이나 일본군, 중국군(중화민국군), 만주군 출신자들의 계급과 경력을 거의 다 무시하였다.--이 전선에서 부대를 지휘하여 했기에 참모총장으로 임명받을 수 있었다.] 이후 낙동강 방어전, 인천상륙작전, 북진, 중국의 참전에 따른 후퇴, 38선 일대 재탈환으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미국이 주도하는 UN군 사령부 지휘 하의 한국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 사건]]이 드러나면서, 그에 따른 문책 차원에서 총사령관 직에서 사임하였다.[* 1951년 7월 15일 국민방위군 사건 재판정에서 증인으로 나왔을 당시의 발언도 여론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검찰관이 정일권에게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씨름)|김윤근]]은 일등병의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별을 달고 사령관이 될 수 있느냐"고 묻자, 이에 정일권은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이다"라고 발언했는데 정일권의 발언에 격분한 [[김석원]]이 "이봐! 오늘 답변 그게 뭐야! 당장에 계급장을 떼어버려!"라고 일갈했다. 당시 정일권은 소장, 김석원은 준장이었기 때문에 김석원에 대한 징계 얘기가 나오기도 하였으나 정일권은 만주군 대위, 김석원은 [[일본군]] 대좌 출신이어서 그냥저냥 무마되었다.] 총사령관 사임 직후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미국으로 파견되어 미국 육군참모대학에 입교해 1952년 7월 졸업하였다.[* 정상적인 군대라면 야전의 실병력을 지휘하는 코스를 거친 후 참모총장이 되어야 하는데 정일권은 그런 거 없었던 게 문제. 정일권 자신은 이 인사 조치를 일종의 좌천으로 여겼다 한다. 정일권 입장에서는 그도 그럴 것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때는 문제없이 지나가더니, 국민방위군 사건에는 걸려서 물러났으니 말이다. 이 때문에 사단장에 임명된 정일권은 상심해 전역을 할 생각이었는데 백선엽 등 다른 장군들이 말려 하지 않았다.] 귀국 후 [[제2군단|2군단]]장으로 영전하여 [[저격능선 전투]][* 저격능선 초반 전투가 바로 중국군이 아직도 승전으로 여기는 [[상감령 전투]]이다.], [[금성 전투]] 등을 지휘한 후 휴전을 맞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