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전제 (문단 편집) == 개요 == 井田制[* 정전법(井田法)이라고도 한다.] 기록상 등장하는 [[중국]] 최초의 토지 제도이다.《[[맹자#s-5|맹자(孟子)]]》, 《[[주례#s-3|주례(周禮)]]》, 《[[춘추#s-4|춘추(春秋)]]》 등에서 언급된다. 하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주공]](周公) 단이 창안했다는 설이 있으나, 《맹자》에서는 100무(畝)를 1전(田)으로 했다는 [[주나라|주]]대(周代)의 정전법을 기준으로 하여 설명할 뿐, 창안자는 거론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주(周)나라 이전부터 미진하게나마 시행했다는 암시를 하는 듯한 구절이 있다.[* 《맹자》, 〈등문공 상〉, 3장을 참고하라.] [[맹자]]의 영향으로 후대에도 지속적으로 정전제 논의가 나오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 일단 농지가 현대의 경지정리된 밭처럼 네모로 나올 리가 없다. 모양이 당연히 다를테니 소출이 다를건데 누구나 좋은 땅을 가지고 싶을 것이다. 일단 분배받은 후도 문제인데 가정마다 노동력의 차이도 존재하는데 밭 크기가 똑같으면 아들을 많이 낳아서 10대 초반의 아들들처럼 가용 노동력이 많은데 먹일 입이 많은 가정은 어쩌란건지, 아들을 못낳았는데 가장이 힘이 약하거나 병에걸려 누워있거나 심지어 죽었다면 어쩌란건지, 아무런 대책이 없다. 상식적으로 엄청난 변수가 발생할텐데 고작 9/1세로 이 행정력은 어덯게 확보할 것이며 이걸 어덯게 납득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도 대책이 없다. [* 예를들어 가장이 죽었고 자식들이 노동력이 안되면 땅을 도로 회수한다는 원칙이 있다치자. 그러면 과부와 자식들은 굶어죽으란 이야기가 된다. 아들이 많고 노동력도 많은데 아직 성인이 안되어 결혼을 못시켜서 조혼을 시켰다고 치자. 그러면 이 10대 초반 아동부부와 20대 건장한 부부가 똑같은 땅을 분배받으면 노동력 투입의 극심한 비효율과 논쟁이 발생한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없고 쓸데없이 복잡한 법칙만 무한히 늘어나는데 이걸 정리해줄 군사력 행정력을 꼴랑 9/1세로 확보할 방법이 없다.] 이런 문제 때문에 [[왕망]]이 정전제를 강행했을때 극심한 혼란이 발생했고 무엇보다 조세가 안걷혀 [[신나라]]는 바로 망하고 [[한무제]]로 넘어간다. [[상나라]] [[춘추전국시대]]가 철기로 넘어가는 시대이기 때문에 여기서 착안해 정전제를 당시 아직 철제 농기구와 [[우경]]이 등장하기 이전이라 조잡한 농기구만으로 농사를 짓기에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야만 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농업 방식이라는 설명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일단 그 제도의 존재 자체가 의심받는 판국에 거기에 또다른 [[가설]]을 얹은 것이 증거가 있을 리도 없고 무엇보다 공동 경작을 할거면 그냥 여전제처럼 공동농장을 해서 공동경작 공동분배를 하지 굳이 우물 정자로 집집마다 땅을 나눠줄 필요가 없다. 사실상 존재 자체가 매우 의심스러운 제도고 실험해본결과 작동 자체가 하지 않는 제도지만 [[맹자]]가 워낙 칭송하면서 뻥카를 쳐놔서 유학자들은 정전제를 수립하려는 시도를 ~~특히 자기가 지주가 아닐때~~ 끊임없이 했다. 유학자들은 기본소양으로 누구나 [[맹자]] [[춘추]] [[예기]]를 읽어보기 때문에 정전제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이 뻘소리에 낚여서 여러번 상소를 했지만 [[지주]]가 많은 관료들이 당연히 묵살했으며, 무엇보다 제도 자체가 현실에서 동떨어져있어 실험적으로 특정지방에서 테스트해봐도 분쟁만 생기고 조세가 걷히지 않고 굶어죽는 사람이 계속 나오는 등[* 이 제도는 가구당 50무라 자식 많은 가족은 자식들이 굶어죽는다. 애 안낳거나 1명인 집은 쌀이 남아돈다.] 결과가 좋게 나온적이 없다. 그럼에도 가난하고 원리주의적 성향이 짙고 현실과 괴리된 유학자들은 야인일때는 누구나 일기장에 끄적거려보지만, 과거에 급제해 [[지주]]가 되면 입장이 바로 달라졌다. 따라서 사실 정책 추진 자체가 된 적도 거의 없다. 다산 [[정약용]]도 유배당하고 가난해지니 정전제하자고 징징거렸고 교과서에서도 실렸지만 사실 유학자 모두가 아는 내용이니 특별히 획기적인 내용도 아니고 막상 [[정약용]] 본인이 [[관료]]나 [[지주]]였다면 입장이 전혀 달랐을 것이다. 중국사에서 땅을 나눠주는 개혁 중 유일하게 성공한 제도는 [[균전제]]와 그 셋트인 [[부병제]]였다. 이 제도는 [[북위]]에서 시작하고 [[수나라]]에서 그 효험을 입증했다. [[북위]] [[수나라]] [[당나라]]는 이민족인 [[선비족]] 혹은 그들과 [[관롱집단]]지방 호족 혼혈들의 정복왕조들이라 실행할 수 있던 제도다. 당의 [[이세민]]은 [[한족]] [[신사]] 지주층 눈치볼 필요없이 반항하면 가차없이 죽였기 때문에 전부 몰수해서 막대한 [[국유지]]를 확보했고 이걸 [[선비족]] 공신들에게 나눠주는 뻘짓을 하지않고 백성 정남 1인에게 100무씩 뿌렸다. 대신 [[자영농]]으로 인정하고 정전제에서 언급한 우물정자 한가운데 [[공전]]같은 꿈같은 헛소리는 안하고 [[조용조]]로 아주 높은 세율을 적용해 조세와 병력을 긁어냈다. 물론 나라가 거저 땅을 줬기 때문에 농민들은 이런 높은 세금을 군말없이 받아들였고 [[당나라]]는 중원을 통일한다. 이후 호족들의 불법적 [[토지겸병]]이 일어나기 전까지 국가 운영은 성공적이었다. 물론 이것도 백성들 인구가 늘어나는만큼 줄 땅이 무한하지가 않아 유지하는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긴 했다. [[정도전]]도 야인일때는 원리주의적으로 [[정전제]]를 칭송하고 [[균전제]]를 회의적으로 보았으나 막상 실무를 해야하는 입장에 처하자 결국 경기도에만 관료수조권을 남겨두고 나머지 지역엔 [[균전제]]를 실시하는 [[과전법]]을 지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