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조(조선) (문단 편집) === [[정조 어찰첩|정조의 비밀 편지들]] === [[2009년]] 2월 발견된 [[심환지]]와 교환한 서신첩인 [[정조 어찰첩]]을 보면, 학자 군주답지 않고 왕의 표현이라 볼 수 없는 표현들을 많이 쓰고 있다. 특히 자유자재로 [[욕설]]과 [[막말]][[욕쟁이|을 구사하는 모습]]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 예를 들면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구상유취라는 사자성어에서 따온 욕설이다.] 사람 꼴도 못 갖춘 새끼와 경박하고 멍청하여 동서도 분간 못하는 [[병신]]이 감히 그 주둥아리[* [[의역]]이 아니다. 원문에 쓴 글자도 새부리 훼(喙)자를 썼다.]를 놀린다."'''라거나, '''"대신 ○○○는 몸에 동전 구린내가[* 역시 후한 말기 매관매직으로 벼슬을 산 [[최열]]에서 유래된 [[동취]]라는 성어에서 나온 표현이다. 최열은 [[제갈량]]의 친구 박릉 사람 [[최주평]]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나 주변이 모두 기피하는 놈이다"''', '''"[[호로]] 자식"'''이라든지.[* 현대엔 호로자식이라는 욕이 그렇게 심한 욕으로 느껴지지 않을지 몰라도 효의 예를 [[성리학|나라의 도로 삼던]] 조선 시대에선 상대 뿐만 아니라 그 부모님까지 싸잡아 욕하는 패드립이나 다름없는 심한 욕이었다.] 어전 회의 중에 신하들이 조금이라도 실수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보이면 바로 욕설을 구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조가 [[성군]]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자기 기분이 틀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신하들의 처벌이나 유배 등으로 이어지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할아버지인 [[영조]]는 상벌이 밥먹듯이 바뀌었다. 영조 48년에는 3명을 번갈아 총합 열 번이나 [[영의정]]을 갈아치울 정도였다.] 실제로 당하관 대신 중 한 명이 '''"전하의 업무 처리 방식이 아주 글러먹으셨는데 그 이유는 전하의 급한 성질 머리 때문으로, 요즘 옥체가 자주 편찮으신 이유도 그 때문인 줄 아뢰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다. 상당히 무례한 내용의 상소였고 중신들도 중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청을 올렸으나, 정조는 끝내 그 신하를 용서하고 더 높은 벼슬을 주었다. 어떤 편지에는 '아놔, 내가 새벽 3시까지 잠 못 자고 이러고 있다.'라는 말 뒤에 '가가(呵呵)'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것은 웃음소리 '껄껄'을 뜻한다. 현대로 치면 "[[ㅋㅋ]]"와 다를 바 없는 표현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090210034946a000a010-001.jpg|width=100%]]}}} || || {{{#gold ''' 1797년(정조 21년) 4월 21일(음력)에 쓴 정조의 편지 '''}}} || 이 편지에도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이 많다. 대표적으로 '요즘처럼 벽파가 뒤죽박죽되었을 때는...'이라고 쓰는데 마땅한 [[한자]]가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 보통 뒤죽박죽이 된 상황은 한자로 亂場(난장)이라 칭하는 경우가 많다. 난장판 할 때 그 난장이다. 어쩌면 정조가 마땅한 한자가 생각나지 않았다기 보다는 생생한 표현을 위해 고유어를 한글로 옮겨적었을 수 있다. 유사한 뜻이더라도 난장과 뒤죽박죽의 어감은 다르기 때문이다.] 갑자기 [[한글]]로 써놓아서 ''''近日僻類爲뒤쥭박쥭之時...''''이 되어있다. 본문 왼쪽에서 세 번째 줄 가장 아래 쪽부터 '뒤쥭박쥭'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조선시대]] 글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읽는다. 수신인 [[심환지]] 본인에게도 '''"갈수록 입조심 안 하는 생각 없는 늙은이"'''라며 면박을 주는 편지도 있다. 한자로 쓴 편지에도 [[한국어]]에서 표현하는 [[속담]]을 자주 한자로 옮겨 인용하고, [[이두]]식 표현도 많이 등장한다. 어쨌든 정조 자신이 소설 장르를 탄압하고 이를 따라하는 신하들에게 바른 문체를 강요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이중적인 면모라고 할 수 있다.[* 정조는 실제로 소위 '이단사설'이라는 [[양명학]]과 [[고증학]]의 [[청나라]] 본토 학계의 트렌드와 한참 뜨는 학자들의 저서와 개념을 쭉 꿰고 있었고, 패관 문학과 소품에 대해서도 상당히 잘 알았다. 이런 것들을 독파했기에 잘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정조는 무턱대고 탄압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정론과 문체를 세워야 한다는 스타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타고난 성정의 한계가 있었을 뿐, 유학 군주로서 모범이 되고자 노력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 정조는 곧잘 세종과도 비교되는데, 뼛속부터 유교적 성현이었던 세종과 견주어 이율배반적이라 평가하는 것은 정조로서는 억울할 수 있다.] 물론 면박뿐만 아니라 [[심환지]]를 격려하는 편지들도 종종 있다. 사실 이 기록이 남은 것은 후대인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야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기 때문에 다행인 일이지만, [[심환지]]와 정조 사이의 관계만 놓고 본다면 심히 잘못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임금이 자신의 사람이라 믿는 신하에게 이런 편지를 쓰면 신하는 [[다테 마사무네|편지를 다 읽은 후 태워 버리는 게 예의]]였다. '''한 마디로 심환지가 혹시 모를 상황에 보험을 들기 위해 남긴 편지 혹은 정조의 약점으로 잡으려 남긴 편지가 그대로 내려와 현대에 발견된 것.'''[* 그러나 사실 군신 관계라는 게 항상 불안정한 정치적 관계이고, 특히 정조처럼 왕이 다혈질일 때에는 신하 입장에서 불안감이 생기고 혹시 모를 일에 대해 보험을 들어 놓는 일을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후로 [[심환지]]는 정조를 죽인 역적쯤으로 취급당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이 편지가 남아 있었다는 게 후손들 입장에선 정말로 다행한 일이다.] 한편 이 어찰첩은 독살설이나 [[노론]] 만악 근원설을 논파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서의 가치도 가지고 있다. 첫째, 정조가 [[죽음|승하]]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심환지]]에게 보낸 이 편지에는 '눈이 너무 침침해져서 책도 읽을 수가 없다.'라거나 '어디가 아프고 언제 약을 얼마큼 먹고 있는데, 아파 죽겠도다.' 하고 병세의 위중함[* 정조의 공식 사인은 종기로 되어 있으나, 어찰에 적어 놓은 정조의 말에 따르면 온갖 종류의 병에 시달리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읽는 사람이 다 안타까울 지경이다.]을 호소하는 대목이 자주, 그리고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은 《[[정조실록]]》에서도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딱히 [[심환지]]에게만 알려진 사실이 아니라는 점과 정조 본인이 고의적으로 병을 키워서 적었을 가능성이 보이는 부분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심환지]]를 측근이라기보다는 같이 해야 할 한 당의 영수로 봤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둘째, 그 동안 [[심환지]]를 비롯한 [[노론]] 영수들은 정조의 답이 없는 정적쯤으로 치부되었지만, 이 서찰을 통해 '''노론 역시 정조의 국정 동반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독살설보다 일리가 있는 설명이다. 정조가 쓴 편지글의 자세한 내용은 [[정조 어찰첩]]이란 제목으로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했으니 그쪽을 참조하길 바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