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종(조선) (문단 편집) == 평가 == 흔히 [[권력]]에 대한 [[욕심]]이 일절 없었다고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적자가 없는 상황에서 자기 [[서자]]를 [[원자(왕족)|원자]]로 봉하려다 정안공 [[태종(조선)|이방원]]의 [[압력]] 탓에 취소되고 그가 [[조선/역대 왕세자|왕세자]]가 된 기록이 남아 있다.[* 《[[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11월 7일 (기묘)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711007_001|#]].] 정치적 야심이 분명히 있었음을 알려주는 대목. [[적장자]] [[조선/왕사|왕위 계승]]이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의 가장 강력한 [[명분]]이었으니만큼 [[진안대군|이방우]] 사후 [[적장자]]가 된 그가 명분상 밀릴 일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태조실록]]》에서 [[태조]]와 [[정도전]]에 대한 곡필을 행한 것이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정종 실록이라고 곡필이 없으리란 법이 없다. [[태종(조선)|태종]]이 [[조선]] [[개국]] 과정에서 세운 공로도 과장되었다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는 만큼 개국 과정과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까지 정종의 역할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필요성이 있다. 사실 정종에 대한 연구는 많지는 않아도 1990년대부터 꾸준히 있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가지 의문점에 부딪히게 된다. 개국 과정에 세운 공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큰 방원과 달리 [[태조(조선)|이성계]]를 따라 [[황산대첩]]에도 나섰고 조정의 중신으로 자리잡은 탓에 개국과정에서 세운 공도 상당하며 강건한 무장 출신에 중앙군 지휘권을 행사한 [[정도전]]을 위시한 공신그룹과 대치하던 왕자들의 가장 큰 형님이라 할 수 있는데 정작 [[무인정사]] 때는 동복 아우 전원, 숙부에 조카까지 다 참여하고 심지어 [[의안대군(이방석)|이방석]]의 형 [[무안대군|이방번]]에게까지 회유가 들어간 마당에 혼자 아무것도 모른 채 제사나 지냈다는 실록 기록 때문이었다. [[승정원일기]]가 없어 교차검증도 안되는 탓에 결국 [[태종(조선)|태종]]의 역사를 그대로 따랐고 다른 의견들이래야 만만찮은 배경을 가진 형을 제치기 위해 [[태종(조선)|방원]]이 일부러 배제시켰을 가능성을 소극적으로 제시하는 정도였다.(윤두수, 조선 정종에 관한 연구, [[1990년]]) 그러다 [[2000년대]] 이후 [[태조(조선)|태조]]에서 [[정종(조선)|정종]], [[정종(조선)|정종]]에서 [[태종(조선)|태종]], [[태종(조선)|태종]]에서 [[세종(조선)|세종]]으로 넘어가는 [[조선/왕사|왕위 계승]] 과정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면서 다른 의견이 제시되기 시작했다.(윤정, 정종의 즉위 과정과 즉위 명분, 2013년) 연구자에 따라서는 [[정몽주]] [[척살|격살]]은 물론 [[제1차 왕자의 난]] 주동자를 [[태종(조선)|태종]]이 아닌 [[정종(조선)|정종]]으로 보는 경우도 더러 있다.[* [[조선]] 후기는 [[승정원일기]]의 존재덕분에 실록에서 비롯된 역사 인식을 재고하게 된 케이스가 꽤 있는데 [[조선]] 전기는 [[승정원일기]]가 전란과 여러 반란으로 인해 소실되어 그게 힘들다. 게다가 이 설이 맞다는 가정에서 생각해보면, [[태종(조선)|태종]]이 [[정몽주]]를 [[추숭]]한 일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 [[태종(조선)|태종]]이 만약 [[정몽주]] [[척살|격살]]을 주도했다면 [[정몽주]] [[추숭]]은 군신 간에 충의(忠義)를 강화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동시에 [[태종(조선)|태종]] 자신의 [[조선/왕사|왕위 정당성]] 손상이라는 리스크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선죽교]]에서의 사건을 주도한 인물이 [[정종(조선)|정종]]이었다고 하면, [[태종(조선)|태종]]의 정몽주 추숭은 이런 모순에서 [[태종(조선)|태종]]이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정몽주]]를 죽인 정종의 [[조선/왕사|정당성]]을 상당히 실추시킬 수 있는 한 수였던 셈이다. 실제로 [[정몽주]] [[추숭]]은 [[태종(조선)|태종]]의 즉위 원년([[1400년]])에 이루어졌다.][* 다만 [[정도전]]과 그 일파를 제거한 [[태종(조선)|이방원]]으로써는 고려의 유신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포은을 추숭하였을 수 있다. 당장에 [[태종(조선)|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로 아비인 [[태조(조선)|태조 이성계]]를 사실상 몰아냈기에 [[조선/왕사|정당성]]이 원래부터 취약했다, 이에 통 크게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을 충신의 대표로 세워서 [[조선]] [[건국]]이라는 불변적인 사실을 인정하기만 하면 과거에 적대하였던 사람이라도 포용할 수 있음을 보였을 수도 있다. 당장에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에서 [[살해]]당한 [[남은]]과 이복동생([[경순공주]])의 남편인 매제 [[이제(조선)|흥안군 이제]] 같은 경우에도 [[태조(조선)|태조]]의 [[종묘]] 배향공신으로 올려주었다.][* 하지만 애시당초 태종의 왕권은 강하면 강했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통성 면에서 이방석 쪽이 더 낮았고 거기다 태종은 정종의 양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약점마저 없앴다. 정몽주를 추숭한 것은 애시당초 태종 자신도 유학자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유학자들에게도 정몽주는 이색과 더불어 조선 유학계의 거두였던 만큼 추숭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즉, 조선의 지배층인 유학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도 있지만 학문적으로 봐도 정몽주를 추숭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태종(조선)|태종]]의 [[조선/왕사|집권 명분]]과 [[정종(조선)|정종]]이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이후 [[조선/왕사|왕위]]에 올랐다는 점에 주목한다. 정종은 아버지 [[태조(조선)|태조]]에게 [[양위|전위]]를 받을 때 [[장남]]이란 [[명분]]으로 물려받았고 길지 않은 재위 기간 동안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된 게 적장(嫡長)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태종(조선)|태종]]의 즉위 명분은 이와 대척점에 있는 택현(擇賢)이다. [[개국]]에 가장 공이 컸고 재주가 뛰어난 [[왕자]]이기에 국가를 반석에 올릴 재목으로서 [[조선/왕사|왕위를 계승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조선/왕사|후계자]]가 [[적장자]]가 되면 자기 권위가 흔들리고 골육상쟁을 거쳐 [[조선/왕사|왕위]]에 오른 [[태종(조선)|자신]]의 도덕적 결함이 강조될까 두려워 [[양녕대군|자기 맏아들]]의 비행을 일부러 드러내고 택현에 맞는 [[조선/왕사|후계자]]([[충녕대군]])를 세운 사람이 [[태종(조선)|태종]]이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태종(조선)|태종]]이 택현을 통해 [[세종(조선)|세종]]을 즉위시켜 자신의 즉위까지 택현으로 포식한 과정, [[양녕대군|양녕]]의 비행을 일부러 드러내고 그를 몰아붙인 상황은 최승희의 논문 太宗末 世子廢立事件의 政治史的 意義와 太宗朝의 王權과 政治運營體制, 윤정의 논문 태종 18년 開城 移御와 한양 還都의 정치사적 의미를 참고. 물론 언제까지 택현의 [[명분]] 아래 [[폐위|폐세자]]를 거듭할 순 없으니 [[세종(조선)|세종]]은 자신의 [[조선/왕사|후계자]]([[문종(조선)|문종]])를 누가봐도 완벽한 [[조선/왕사|차기 국왕]]으로 육성하고 [[단종(조선)|세손]]까지 자기 살아 생전에 정해 놓는다.] [[태종(조선)|태종]]이 모든 걸 주도했다고 보기엔 자신에겐 별 도움이 안 되는 [[적장자]] [[조선/왕사|계승]]이란 [[명분]]을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택현을 명분으로 즉위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형(정종)의 [[아들]]이 되는 [[무리수]]를 감행했고[* 이것도 많은 논란이 있는데, '''[[왕세제|세제]]'''가 아닌 '''[[왕세자|세자]]'''로 지칭된 것과 정종이 [[묘호]]를 받지 못한 것을 연결시키면, 이때의 子는 정종의 子이라기보다는 [[태조(조선)|태조]]의 子라는 것을 지칭한다는 의견도 있다.] 뒷날의 [[용비어천가]]에서 빼버리는 건 물론 [[폐위]]당한 [[조선/왕사|왕]]이 아님에도 [[묘호]]를 바치지 않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졌다.[* [[세종(조선)|세종]]이 벌인 일이긴 하나 정종이 [[사망|승하]]할 때 [[태종(조선)|태종]]이 [[상왕]]으로 여전히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누구의 의중일지는 뻔하다.] 이 때문에 [[제1차 왕자의 난]]까지의 [[정종(조선)|정종]]과 [[태종(조선)|태종]]의 행보에 왜곡이 적잖이 들어갔다 보고 둘째 형 밑에서 세력을 키워간 [[태종(조선)|태종]]이 [[적장자]]가 없는 정종의 약점을 노린 [[회안대군|넷째 형]]과의 경쟁([[제2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해 형의 [[조선/왕사|왕위]]를 가져갔다는 해석이 나온 것이다. 즉, [[태조(조선)|아버지]]와 [[의안대군(이방석)|이복 동생]]을 끌어내린 것은 큰 형 정종이고 그 형을 무력으로 끌어내리고 모든 걸 빼앗은 사람이 바로 [[태종(조선)|태종]]이 된다. 사실 위의 내용은 학계에서도 비주류 의견일 뿐이고 정종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배후설을 밀어붙이기에는 당시 상황을 봤을 때 많은 무리가 있다. 애초에 정종의 [[원자(왕족)|원자]] 책봉 시도의 진정한 배후로 생각되는 사람이 바로 [[태조(조선)|태조 이성계]]로 지목되고 있는데, [[정몽주]]를 죽이고 [[이방번|자기]] [[의안대군(이방석)|형제]]마저 비명에 가게 한 [[이방원|패륜아]]가 [[조선/왕사|왕]]이 되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태조(조선)|태조]]가 정종을 앞세워 [[태종(조선)|이방원]]의 [[조선/왕사|왕위 계승]]을 방해하려 했다고 보는 게 더 그럴 듯한 흐름이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조선/역대 왕세자|세자]]로 추대된 점을 볼 때 당시 정종 본인이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 조정의 세력이 모두 [[태종(조선)|이방원]] 휘하의 인물들로 가득 채워진 상황을 보면 정종을 주동자로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즉 정종 배후설은 [[원자(왕족)|원자]] 책봉시도와 같은 몇 안되는 기록을 보고 제시한 설일 뿐, 실록 및 타 기록에서 [[태종(조선)|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난]]의 실질적인 주체라고 적은 내용은 압도적으로 많다. 위에서 언급한 [[정몽주]] [[척살|주살]] 주체가 정종이라는 설은 굉장히 논파의 여지가 많다. 재반론 때문에 덧붙이지만 나중에 [[조선]] [[개국]]의 중추가 된 [[정도전]]과 [[조준(조선)|조준]], [[남은]] 등을 모조리 죽이려고 했었던 [[정몽주]]를 어떻게든 살려두려 했던 [[태조(조선)|이성계]]와 달리 [[태종(조선)|이방원]]은 그를 사람들이 보는 길거리 한가운데서 죽였고 또 [[태조(조선)|이성계]]의 질책을 받자 사죄는커녕 반항하기까지 했다.[* 면전에서 '[[태조(조선)|아버지]]가 제게 화내시는데 어머니([[신덕왕후]])께서 제 편을 좀 들어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로 [[신덕왕후|강씨]]도 [[태종(조선)|이방원]] 편을 들어 주었다.] [[태조(조선)|이성계]] 또한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라고까지 발언했고 나중에도 계속 이 일로 [[태종(조선)|이방원]]을 미워한 것으로 보아 [[태조(조선)|이성계]]가 [[정몽주]]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리는 없고 [[태종(조선)|이방원]]도 [[정몽주]]에 대해 극한의 친밀감과 존경심을 갖고 있는 [[태조(조선)|아버지]]가 [[정몽주]] [[살해]]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다 알고 있었을 것이 확실하다. [[태종(조선)|이방원]]이 바보 멍청이가 아닌 이상 그런 반응을 보인다고 당황했을 리도 없고[* [[태조(조선)|이성계]]의 반응이 [[태종(조선)|이방원]]을 당황시킨 게 아니라는 근거는 [[정몽주]] [[척살]]을 논의하기 위한 회합 당시 이지란의 발언이다. 당시 그는 어르신(이성계)이 반대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즉 [[태조(조선)|이성계]]가 [[정몽주]]를 제거해야만 한다는 데 납득했다는 것은 이러한 사료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야말로 [[끔살]]을 각오하지 않으면 이렇게 총대를 매고 어그로를 끌 수 없는 것인데, 정종의 성격상 자기 막내 동생보고 진짜 주동자인 자기 대신 [[정몽주]]를 [[살해]]한 다음 혼자서 [[태조(조선)|아버지]]의 모든 분노를 감당하며 칼맞고 죽으라고 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게 시킨다 한들 모양새가 굉장히 이상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혁명]]이 성공한다 해도 어차피 [[조선/왕사|계승 순위]]가 다소 먼 [[태종(조선)|이방원]]이 형님들 대신 목숨을 내놓고 [[척살]]모의를 주도하였고 정종은 문중의 실질적인 대표로서 사후처리를 맡은 것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물론 그보다는 가장 큰 벽인 [[정몽주]]를 제거함으로써 [[역성혁명|새 나라 건국]]을 앞당기고 동시에 문중 및 혁명세력 내부에서 자신의 입지를 늘려서 궁극적으로는 [[태조(조선)|아버지]]의 [[조선/왕사|뒤를 이을 야망]]이 가장 컸을 것이다.][* 그리고 이방과가 한 일도 이방과가 주도적으로 맡았다거나 동생 이방원과 연계해서 벌였다고 볼 수는 없고 그냥 뒤처리를 맡을 만한 사람이 그밖에 없으니까 맡았을 듯하다.] 즉 [[태종(조선)|이방원]]은 단순히 [[정몽주]]를 죽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정종(조선)|형]][[익안대군|님]][[회안대군|들]]과 [[전주 이씨|가문]] 전체를 구하기 위해 [[정몽주]]를 [[살해]]한 자라는 세간의 비난과 [[정몽주|친구]]를 잃은 [[태조(조선)|아버지]]의 [[분노]]를 한몸에 받고 비명 횡사하는(죽진 않았지만)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입지가 크게 올랐다고 볼 수 있는 것이며, [[제1차 왕자의 난]]에서도 [[이방번|동]][[의안대군(이방석)|생들]]을 죽인 [[금수]] 같은 놈이라고 [[태조(조선)|아버지]]에게 집중적으로 [[욕]]먹고 [[야사(역사)|야사]]에서는 진짜로 [[태조(조선)|아버지]]에게 [[화살]] 맞고 [[철퇴]] 맞아 죽을 뻔 했던 점, [[정도전]]과 같은 친 [[의안대군(이방석)|이방석]] 세력의 [[살해|주살]] 등의 주체가 [[태종(조선)|이방원]]인 점이나 정종의 짧은 재위 기간 및 숨은 배후라 보기엔 매우 지지 기반이 약했던 점 등 여러 가지 주 기록들을 볼 때 정종 배후설이 [[태종(조선)|이방원]]이 주도한 사건이라고 보는 기존의 통념을 뒤집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도 [[태종(조선)|이방원]]은 무인출신 가문에서 나온 과거급제자로 이 인물 하나로 [[이성계]] 가문의 위격이 달라졌음은 부정 할 수 없다. 또한 과거급제 홍패를 보고 [[이성계]]가 절을 했을 정도로 감격했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정몽주]] [[척살]] 같은 정도가 아니라면 미움을 받을 일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또한 [[위화도 회군]]시기에는 [[개성시|개경]][[집]]으로 달려가서 [[신덕왕후]]와 [[이방번|이]][[경순공주|복]][[의안대군(이방석)|동생]]들을 직접 탈출시키기까지도 하였다.)] 그리고 정종은 무력은 강했지만 본래 야심이 별로 없고 웃어른들에게 순종적인 타입이었다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전주 이씨]] 가문은 [[고려]] [[귀화|귀순]] 전부터 가주 자리를 놓고 문중 내의 내홍이 격심해서 당장 정종의 할아버지인 [[이자춘]]조차 적장손인 조카 [[이천계]]한테서 가주 자리를 먹튀해서 얻었을 정도인데 차남인 정종이 [[욕심|야심]]만만했다면 장남인 [[진안대군|방우]]를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는 만큼 [[동북면]] [[가별초]]를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후에 이루어진 정종의 [[원자(왕족)|원자]] 책봉 시도는 결국 [[태조(조선)|태조]]가 그나마 당시 동원할 수 있었던 패였던 듯하다. 거의 [[유폐]]당하다시피 했지만 [[태조(조선)|아버지]]의 명을 거스를 수 없었던 둘째 아들의 순후한 성품을 이용한 정치적 시도였다는 것.[* 게다가 정종은 아버지 [[이성계]]가 [[고려]]의 [[무장|무신]]으로 활약하던 시절 오랫동안 부관으로서 보좌했었다. [[아버지]]인 동시에 자신의 직속상관이기도 했었던 [[이성계]]의 말을 정종이 거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태조(조선)|태조]]가 보기에 [[태종(조선)|이방원]]의 편을 들어준 둘째 또한 밉긴 했지만, 주체인 이방원보다는 나아보였을 것이다. 정종이 그동안의 사건의 배후였다면 [[원자(왕족)|원자]] 책봉 시도 방식 자체가 매우 부실한 점 등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막후라는 사람이 그런거 하나 공론화시켜서 정치 싸움을 못할 정도로 지지 기반이 없었단 말인가? 결국 축출당한 [[이성계]]가 정종을 앞세워서 [[태종(조선)|이방원]]의 [[조선/왕사|왕위 등극]]을[* 이전에는 왕위 찬탈이라고 했지만 [[태종(조선)|이방원]]은 [[이방번|동]][[이방석|생]]들을 죽이고 [[정종(조선)|형]]을 쫒아내는 등 [[패륜]]을 저지르긴 했지만 결코 [[명분]]에 어긋나는 짓을 하진 않았다. 정말로 [[태종(조선)|이방원]]이 [[조선/왕사|왕위]] [[찬탈]]을 꾀했다면 형 정종을 굳이 [[조선/왕사|왕위]]에 올리고 그 [[양자(가족)|양자]]로 들어가는 귀찮은 짓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미 이 시점에서 [[태종(조선)|방원]] 외에는 [[조선/왕사|왕위]]에 오를 만한 자도 없었을 텐데 굳이 [[신진 사대부|사대부]]와 척을 지면서까지 급하게 [[조선/왕사|왕위]]에 오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정치 9단인 [[태종(조선)|태종]]이 모를 리도 없고.] 어떻게든 막아보려 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위의 본문에도 있지만, [[태조(조선)|태조]]는 정종에 대해 '한번도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한적이 없다'고 했다. 정종이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의 실제 배후였다면 나올수가 없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동생인 [[태종(조선)|이방원]]을 [[왕세제|세제]]가 아닌 [[조선/역대 왕세자|세자]]로 책봉한 것은 단순히 [[태종(조선)|이방원]]의 '[[왕세자|세자]]' 타이틀에 대한 욕심도 욕심이지만 정종 본인이 먼저 적극적으로 추진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리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태조(조선)|태조]]의 뒷공작이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친자가 후계구도에 거론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향후 정치권에서 '''[[상왕]]의 친자'''라는 명분으로 [[반역]]에 엮이기 딱 좋은 일이고, 그렇다면 아예 [[태종(조선)|이방원]]을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자신의 [[적장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들들이든 본인이든 목숨 부지하기가 훨씬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종은 이후 문제의 [[불노]]를 내내 '''자신의 친자가 아니라며''' 부인으로 일관했다. 실제 친자가 아니건 불노의 목숨을 부지시키기 위한 눈물겨운 부성애건 간에 배후니 흑막이니 하는 타이틀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보다.[* 실제 친자가 아니라면 집안도 좋고 확실한 친자이기도 한 [[성빈 지씨]] 소생의 [[덕천군]] 같은 선택지도 있었다.] 하지만 정종의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배후 여부와는 별개로, 정종이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계획 자체를 몰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일찍이 후계구도에서 배제된 형 [[진안대군|방우]]를 대신해 장자 노릇을 해오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방과가 과연 동생 [[태종(조선)|방원]]의 권력욕이나 [[의안대군(이방석)|방석]]이 [[조선/역대 왕세자|세자]]가 된 것에 대한 친동생들의 불만을 몰랐을까? 그럼에도 방과는 딱히 이와 관련해 [[태종(조선)|방원]]을 제지하거나 반대의사를 표했다는 기록이 없다. 난이 일어난 이후에도 이에 관해 한탄하거나 방원을 꾸짖었다는 기록도 전혀 없다. 이를 보면 정종은 [[제1차 왕자의 난]]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더라도, 암묵적으로 [[태종(조선)|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난]]을 일으키는 것에 동의, 하다못해 최소한 묵인 정도는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몰랐을 수도 있다. 정종은 효자로 유명했고 애시당초 무관으로서 아버지 [[이성계]]를 보좌해왔던 사람이고 온화한 성격이라 만약 사실을 알렸다면 여차했을 때 [[태조(조선)|아버지]] 편을 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애시당초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자체도 이리저리 알리거나 한 것도 아니었고 이 사실은 [[태종(조선)|이방원]], [[이숙번]], [[하륜]], 민씨 [[민무구|형]][[민무질|제]]들 정도만 알고 있었지 기밀사항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면 어떻게 될 지 모를 사람들도 아니었다. 당장 [[종친]] [[이천우]]는 왜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냐고 말했을 정도였으니 정말로 보안은 철저했을 것이며 또다른 방증으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정종은 선조의 묘에 [[제사]]지내러 갔다가 소식을 듣고 숨었다고 하니 만약 알았다면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정종 배후설과 같은 주장은 [[조선]]전기에 기록된 [[승정원 일기]]의 소실, 현재로서는 1차 사료라고 봐야 하는 [[조선왕조실록]]에서의 모순점 등을 근거로 연구하고 있는 학설이라 아직 이를 뒷받침할 확실한 물증이 확보되어 정설로 확정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는 주의해야 한다. [[하륜]]이 주도한 [[태조실록]]의 곡필 범위를 확정하는 것도 애매하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