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치장교 (문단 편집) === [[독일]] === 전쟁초기 독일은 소련만큼 강한 권한의 정치장교를 운영하진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나치당은 독일국민의 투표로 정권을 잡았으며 정권 자체도 국방군 장교단으로 대표되는 프로이센 귀족들과 SA 돌격대를 숙청하는 등의 일연의 정치적 타협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히틀러는 장교들에게 나치당 가입을 강요하진 않았지만 당 차원에서 현역 장교들을 대상으로 나치당 이념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프로이센 전통상 가장 중요시 여겨지는 충성 맹세선언을 하도록 하였다. 여기에 더해 야전 장교들의 수행 장교나 선전 장교로 나치당원 출신 장교들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히틀러도 패전이 계속되자 병사들 사이에서 나치당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하며 스탈린의 정치장교 제도와 비슷한 국가사회주의 지휘 장교단을 신설한다. 이들은 나치당의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붉은 군대의 정치 장교가 소련 병사에게 공산주의 철학을 주입하듯이 독일 병사들에게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주입하는 것이 목표였다. 다만 이들 대다수가 원래 참모장교 지원을 했다가 거부 당한 집단이란 것을 숨기기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도는 좌절된다. 그 다음으로 국가사회주의 지휘 참모부를 설치해 결국 신입 장교 선발 및 훈련에 나치당이 전면적으로 참여하는데 성공한다. 이 '총통의 구세군'은 점차 독일군 장교에게 전문 군사기술 보다 이념적 충성심이 중시되는 경향의 상징으로 일반적인 공보정훈장교보다 정치장교에 가깝다.[* 제프리 메가기,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 422~424쪽. 정작 소련군은 이때 문민통제가 적정 수준 확립됐다고 보고 정치장교가 전술전략에서 배제되고 전문장교의 지휘가 확대되었다.] 그리고 헝가리에서 소련군에 참패를 당하자 분노하여 사형집행분견대를 두어 탈영병이나 전선 이탈자를 재판없이 즉결처형 가능하도록 만들려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