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치장교 (문단 편집) == 탄생 == [[소련]]의 공산 혁명 이후 생겨났다. 당시 볼셰비키 정권은 각지의 반혁명군에게 밀리고 있었는데, 공산정부의 국방장관을 맡은 [[레프 트로츠키]]는 마르크스주의적 방법으로 전술을 다시 짜야 한다는 혁명가들의 몽상적인 주장에 대해 "닥쳐!"로 일갈했다. 그는 '''전쟁은 실험이 아니라 검증된 전술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러시아 제국]] 장교들을 과거를 묻지 않고 군사 전문가로서 붉은 군대에 대거 영입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군의 명장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장군도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참척|아들이 백군에게 죽은 후에]] 붉은 군대에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반혁명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외국군이 대거 개입하자 조국을 독일에 팔아먹었다던 공산당이 오히려 조국의 수호자가 되는 기묘한 상황이 되었다.[* 2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붕괴할 때 레닌은 체포를 피해서 외국으로 도망간 상태였다. 이후 제정이 붕괴된 사실을 듣고 나서 러시아로 돌아갈 때 독일의 협조를 받았는데, 당시 러시아 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독일과 계속해서 전쟁을 지속하고자 하였기에 독일로서는 전력분산으로 소모가 많아지고, 사방이 적으로 둘러쌓이면서 많은 압박을 받았기에 전황이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이러한 전쟁을 그만두겠다고 주장한 레닌은 독일로서는 거의 유일한 구원줄이었다. 실제로도 10월 혁명 이후 레닌이 정권을 잡으면서 곧바로 독일과 휴전에 들어갔는데, 당시 러시아 내에서 백군들이 들고 일어나는 어려운 상황이었고, 광대한 영역을 독일이 점유 중이었기에 레닌은 발트 해 연안 지역과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 서부의 광할한 지역을 독일에 넘기면서 휴전협정을 맺었다. 이는 사실상 독일에 항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레닌으로서도 할 말은 있는 게 러·일 전쟁 이후 러시아의 전체적인 상황이 나빴음에도 황제는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막대한 전력을 소모했으며, 임시정부 역시 이러한 문제로 타도된 제정의 잘못된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였기에 어쩔 수 없긴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시 독일의 상황 역시 좋지 못한 상황에서 독일군이 공격하지도 않은 지역까지 넘겨주었는데, 특히나 우크라이나 평야는 러시아의 생명줄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식량 생산지였음에도 넘겨주었다. 물론 동등한 위치에서 진행된 휴전협정이 아니었음은 감안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들어오는 장교들도 많아졌다. 그래서 내전 후에 붉은 군대의 사단장급 이상의 90% 가까이가 제정 러시아군 장교 출신이었다. 다만 이런 장교들의 붉은 군대 입대는 자발적인 것뿐만은 아니라 위협[* 트로츠키는 붉은 군대로 징병한 러시아 제국 장교들의 가족을 인질로서 '특별 관리'하다가 해당 장교가 탈영이나 반역 행위를 할 경우 그 가족들을 수용소로 보내거나 총살하도록 조치했다.]에 의한 것도 있었으며,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지휘한 렌넨캄프처럼 끝내 입대를 거절한 장교들은 처형되기도 했다. 결국 붉은 군대는 제정 러시아군의 후예라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당연히 트로츠키의 말은 백 번 옳았다. '''전문교육을 받았던 군사 전문가들이 들어오자 붉은 군대의 전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아울러 자칫 반혁명세력에 가담할 수도 있었을 옛 제정 러시아 장교들을 확실히 통제할 수 있도록 볼셰비키 정권 편으로 묶어두는 효과도 있었다. 당시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 그리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 대표되는 군사 엘리트의 정권 탈취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이 '정치장교'라는 [[개념]] 생성의 주 원인. 일단 장교에게 [[계급]]은 부여되었지만 애초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이념을 근저에 깔고 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체제 특성상 초창기에는 사병들이 장교에게 복종은 고사하고 경의를 표할 필요조차 없었으므로 지휘권이란 건 사실 [[개]]나 줘도 마땅할 정도였다. 여기에 충분한 군사 교육을 받은 사람, 특히 장교는 거의 예외없이 제국 시절의 군인들이었기 때문에 언제 정부, 그러니까 [[공산당]]을 배신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사실 당시에는 정말 정치장교 같은 걸 만들 만큼 우려할 만한 상황이었다. 장교들 중 공산당원의 비율이 턱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이런 저런 사정상 장교들이 당원이 되기 싫어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에 공산체제가 정착되고, 너나할거 없이 당원이 되려는 시대가 오자 장교들이 '''당원이 되는것이 어려워졌다'''. 군사 엘리트가 정권 탈취를 위해 당에 접근하려는 것이라는 선입견이 컸기 때문이다. 이때까지의 장교들 상당수가 차르 체제에서 교육을 받은 전 부르주아 계급이었기 때문에 그런 우려는 그리 이상한 건 아니었다. 따라서 당시 붉은 군대의 모든 명령은 지휘관의 사인과 함께 정치장교의 사인이 없으면 실행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런 이유로 정치위원 시스템을 군에 도입, 군이 당의 명령에 불복하거나 반란을 시도할 가능성을 없앰과 동시에 병사들에게 사상적 기반을 구축하고, 아울러 지나치게 급락한 군사 지휘관의 권위를 대신 행사할 수 있는 각급 부대의 정치 지도자로서 운용하려 했다. 문제는 이것 때문에 지휘권의 이원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만약 이 체제가 아직 소련군이 제대로 편성돼 있지도 않았던 [[적백내전]] 시기에만 있었다면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실제로 1930년대 소련의 신생 군사 엘리트들도 같은 문제를 인식해서 군 정치위원 및 정치장교들의 권한을 억제하려 했던 바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