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통제 (문단 편집) == 명사의 논찬 == >영종은 인종과 선종의 대업을 이어받아 해내가 풍부해졌고 조야가 태평하고 편안하였다. 삼양(三楊)[* 양사기(楊士奇), 양영(楊榮), 양부(楊溥)를 말한다.], [[호영(명나라)|호영]], 장보(張輔)와 같은 대신들은 모두 역대의 훈구들로 유조를 받들어 정사를 보좌했으며, 기강이 아직 느슨해지지 않았다. 홀로 [[왕진(명나라)|왕진]]이 권력을 독점하고 전쟁을 일으켜 결국 승여가 파천하기에 이르렀다. 비로소 복벽한 뒤에야 오히려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도대체 얼마나 심한 유혹에 빠졌는가? 전후로 24년을 재위하면서 매우 불량한 시정은 없었다. 공양후(恭讓后)라는 시호를 올리고 [[주문규|건서인]]의 유폐를 풀고 궁비의 순장을 폐지하기에 이르렀으니 곧 성대한 덕업이 가히 후세 사람들이 본받을 만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