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공 (문단 편집) ===== 원 간섭기 이전 ===== 새로운 군주와 창업 군주는 권서국사, 권지국사, 권리국사 등을 자처하며 책봉을 청하는데, 한국사에서는 [[왕건]]이 후당에 먼저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를 자칭하고 책봉을 청하여 명분상으로는 상하관계임을 나타내고 5년 뒤 책봉을 받아 의례상 군신관계를 수립한 것을 시초로 국내외적으로 이러한 지위를 활용했다.[* 이정란(2016), "高麗末의 易姓革命과 조선 ‘제후국’의 성립", 《한국중세사연구》 46.] 이는 책봉을 받지 못한 군주는 외교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11~12세기 다원적 국제질서 하에 거란과 송의 황제가 대등한 지위를 상호 인정하고, 고려를 비롯한 여타 국가들의 군주가 외적으로 제후에 가까운 위상에 위치하여 위계질서 형식을 갖춘 것은 사실이나, 원명대와 같이 필요와 선택에 따른 조공과 책봉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원적, 체계적 질서는 아니었다. 즉, 고려 역시 다원적 국제질서 속에서 중요한 행위자로서 참여했던 것이다.[* 계승범(2010),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p. 260; 정동훈(2016), "高麗時代 外交文書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147~148.]] 이러한 의례적인 자칭은 [[왕건]]의 후계자들인 [[혜종(고려)|혜종]], [[정종(고려 3대)|정종(定宗)]], [[광종(고려)|광종]], [[성종(고려)|성종]], [[정종(고려 10대)|정종(靖宗)]], [[숙종(고려)|숙종]], [[우왕]] 또한 그대로 따르면서 일종의 관례가 되었다. 또한 원나라 이전의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사회는 고려, 송, 거란, 금, 서하와 같은 국가가 병존한 국제체제로, 이 체제에서 각 국가는 외교력을 발휘해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이 체제에서 이들 국가는 중국 중심적 국제질서에 특유한 외교형식인 책봉과 조공제도와 규범에 따라 행동했다. 고려는 동아시아의 국제체제에서 생존과 영토의 확장이란 국가이익을 위해서 신축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했다. 즉 송과 거란, 거란과 금, 송과 금의 갈등 속에서 책봉과 조공제도를 통해서 필요한 경우 강국에 사대를 행해 그 국가의 위신을 존중해주고, 상대적으로 약세인 국가가 강국에 적대 적인 군사작전을 벌이며 원병을 청할 때는 동참하지 않는 등강국의 이익에 배치되는 행동을 자제함으로써 손실을 예방하였다.[* 이재석(2008년), 고려 전기 국제관계의 특질, 한국정치외교사논총 29권2호, 103-128(26pages)]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