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공 (문단 편집) === [[유럽]]의 경우 === 전근대 유럽은 기본적으로 종교의 영향 아래 있다는 전제 하에서[* [[가톨릭]]의 경우에는 [[교황]]의 영향 하에, [[정교회]]의 경우에는 [[로마]]를 제외한 5대교구의 나머지 총대주교나 각국의 총대주교의 영향 하에 있다는 전제로 군주나 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개신교]]의 경우에도 자국에서 국교로 지정한 종파의 수장이 나라의 영적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면서, 군주나 정치인들의 세속적인 권력을 뒷받침하였다.] 서양의 왕, 공작, 선제후들은 [[동군연합|한 군주가 동시에 여러 지역의 군주]]가 될 수 있었고, [[백작]], [[후작]], [[공작(작위)|공작]] 등의 제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신하였다. 선제후국들의 선제후들은 영토 내에 봉건적으로 존재하며, 비독립적이고 병역과 세금의 의무가 있었다. 유럽의 중세 초기에는 전근대 동아시아와 유사하게 각국의 왕이 명목상 [[로마 제국]]의 신하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여러 [[게르만족]]들이 난립하여 왕국을 세웠고, 게르만족 장군인 [[오도아케르]]가 [[동로마 제국]]에게 왕위를 인정받고 서로마를 한때 지배하기도 했다. [[동로마 제국]]의 경우, 동로마 제국에 위협이 되는 [[소아시아]] 지역 또는 유목 민족들을 상대할 때 군사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게르만족]]이 필요하였고, [[교황]]도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아예 유력한 [[서유럽]] 왕국의 군주를 [[카롤루스 대제|새로]] [[오토 1세|황제]]로 [[프랑크 왕국|옹립]][[신성 로마 제국|하고]]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책봉하였다. 이 경우, 서로마 제국 또한 선제후국들을 거느리는 이중 제국의 형태가 되었다. 프랑크 왕국이 세 개로 분열된 후 중세에는 신성 로마 제국 안에 로마 황제에 대한 의무를 지닌 선제후들이 존재하였고, [[동로마 제국]] 또한 [[러시아]]의 공국들에게 공작을 봉하는 봉건 제도가 존재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고대 로마|통일 로마 제국]] 시기부터 내려온 전통인데, 고대 로마 제국도 이런 식으로 자국의 속국이나 주변국의 군주 또는 유력자를 현지의 왕으로 책봉하였고[* [[성경]]에 나오는 [[헤로데 대왕|헤롯 왕]]이 대표적이다.], 일부는 그 대가로 그 나라의 왕족이나 귀족에게 [[로마]]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유학을 오도록 하여 로마식 교육을 시켜주고[* 표면적으로는 볼모 신분이었으나, 실제로는 [[로마 제국]]을 방문한 귀빈 겸 유학생으로 간주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로마의 속국이나 주변국의 유력자들이 로마 제국에 볼모로 보내지는 것을 선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작위를 책봉받기 전까지 [[고관대작]]으로 임용하는 특혜를 제공하기도 했다. [[안도라]]는 [[1993년]]에 국민 투표로 헌법을 제정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공동영주인 스페인 우르헬 주교와 프랑스 대통령에게 조공을 바쳤다. 워낙 작은 나라고 유럽의 정세구도상 관심 밖이었기 때문에 심각한 인권 유린이나 탄압이 없어서 이 낡은 제도가 20세기 말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안도라는 1년씩 번갈아가며 프랑스 대통령에게는 현금 960프랑(약 14만원)을, 우르헬 주교에게는 현금 460페세타(약 3,000~4,000원)와 햄 6개, 치즈 6개 그리고 닭 12마리를 보냈다. 이것이 그들이 바치는 조공이었다. 안도라의 조공은 1993년에 안도라가 입헌공동군주제로 변화하면서 폐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