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규제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원래 '''[[오른손잡이]]'''었지만, 중3 때 '''장난삼아''' '''왼손'''으로 피칭한 것이 140Km/h 가까운 속도를 내자 아예 좌완으로 전향했고, 군산상고 시절 전국구 좌완 에이스로 명성을 날리며 [[동대문야구장|동대문]]을 평정하고 [[연세대학교 야구부|연세대]]에 진학했다. 1986년 4월 27일 [[경남고등학교 야구부|경남고]]와의 제20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연장 11회 접전 끝에 극적인 역전승(2-1)을 거두고 팀에 우승을 안긴다.[* 경남고는 2023년 현재까지도 이상하리만큼 대통령배를 단 한 차례도 품에 안지 못하고 있다. 반면 [[청룡기]] 9회(청룡기 1위), [[황금사자기]] 7회(8회의 신일고에 이어 황금사자기 2위), [[봉황대기]] 2회 우승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대학 시절에도 국가대표로 꾸준히 활약을 보였으며 170cm에 불과한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140킬로 중반대의 강속구를 던질 수 있는 당시로서는 국내에서 드문 유형의 좌완투수였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최고구속 145km 이상을 던지는 투수가 프로야구 전체를 통틀어 10명 남짓한 시절이었다.][* 대학 시절에는 최고 146~147km까지 나왔다는 평이 있었으며, 당시 이 정도면 흔치 않은 최정상급 좌완 강속구투수였다. 90년도 즈음엔 최고구속 140Km만 넘으면 정통파 투수로 인정받던 시대였다.(평균 140이 아니다!) 당시 한국에서 최고구속 145Km를 넘는 좌완은 프로에서도 [[송진우(야구)|송진우]]와 가을까치 [[김정수(1962)|김정수]] 둘 뿐이었다.(물론 아마야구의 괴물 좌완 [[구대성]]이 일본과의 경기에서 152Km을 던져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우선 지명권을 가지고 있는 쌍방울로서는 연고지 전북 출신 조규제는 이미 찜해놓았고, 해태가 1차 지명자로 [[오희주]][* [[진흥고등학교 야구부|진흥고]]-한양대 출신의 우완투수. 광주일고-인하대 출신 내야수 '''[[김기태(1969)|김기태]]'''와 1차 지명을 두고 저울질 대상이 됐던 선수였는데 그 오희주는 해태와 LG에서 선수 생활을 했지만 조규제와 김기태보다 못했으며 심지어 자기관리에 실패하며 결국 방출의 쓴 맛을 보고 만다. 입단 후 [[김응용]] 감독과 첫 대면에서 파마머리에 반짝이 옷을 입고와서 야구선수가 아니라 가수인줄 알았다고 했으니..어찌보면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 중 가장 '''큰 [[흑역사]]'''라 할 수 있다.]를 선택하며 2차 지명 최대어로 나온 김기태 역시 자동으로 획득한 상태였다. 다만 이때 조규제는 2차 1순위로 지명하면 절대로 입단하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으며, 당당하게 1차 지명자로 고향팀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하게 되었다. [[파일:/image/047/2006/12/21/1166668924.079474_punctum_287885_27[562793].jpg]]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입단 첫 해에 규정이닝을 채우며 1.64의 [[평균자책점]]에 9승[* 선발승 2승 포함] 27세이브를 기록하여 팀 동료 [[김기태(1969)|김기태]]를 제치고[* 그래도 김기태 역시 입단 첫해부터 20개가 넘는 홈런을 날리며 장종훈에 이은 2위를 기록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94년에는 '''[[이승엽]]'''보다 앞서 좌타자 '''최초의 홈런왕'''과 처음이자 마지막인 타격왕을 차지한다. 이 홈런왕에 대해서는 의미있는 홈런인데. 바로 '''[[방위병]]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저런 성적을 낸 것이다.] 신인왕에 오른다. 쌍방울 레이더스 역사상 유일한 신인왕이 되었다. 참고로 조규제의 데뷔 시즌 WAR는 KBO [[http://mlbpark.donga.com/mlbpark/b.php?b=kbotown2&id=2197666|역대 신인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링크된 순위가 2015년 기준이지만 2020년에도 여전히 1위이며, '''[[류현진]]'''급의 [[에이스(야구)|괴물투수]]가 나오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깨지기 어려운 대단한 기록이다. 상위에 랭크된 대부분의 선수들은 투수보직, 관리가 지금보다 미흡했던 시절에 '''혹사'''를 당하면서 거둔 기록이며, 리그수준의 상승에 따라서 포지션을 떠나 신인이 괴물같은 활약을 보이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또한 잠재력 있는 선수는 고등학교 졸업 후 프로에 바로 입단하는 것이 당연시 된 요즘은 체력적인 문제로 신인이 1년 내내 1군에서 꾸준히 맹활약 하는 것이 쉽지 않다. 2017년 신인 관련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신인왕에 오른 '''이정후'''의 WAR이 3점대이며, 이듬해 신인왕인 2018년 강백호는 2점대이다.] 특히 [[선동열]]의 프로 입단 후 6년간 아무도 [[선동열]]의 평균자책점에 도전할 수 있는 선수가 없었는데, 조규제는 모처럼 선동열과 평균자책점 경쟁을 하는 선수였다. (선동열 1.55, 조규제 1.64)[* 이후 2년 뒤 [[OB 베어스]] 신인 [[마무리 투수]] [[김경원(야구)|김경원]]이 '''1.11'''로 [[선동열]]과 [[평균자책점]] 1위 경쟁을 한다.] 시즌 후 [[한일 슈퍼게임]]에 참가했고, 1차전에서 5회 선발 [[박동희(야구선수)|박동희]] 다음으로 등판하여 2아웃까지는 잘 잡았지만 일본의 3/4번 타자인 '''[[아키야마 코지]]'''와 '''[[오치아이 히로미츠]]'''에게 연속타자 홈런[* 언급한 두명의 일본 타자들은 각각 홈런왕과 타격왕을 받아본 [[명구회]] 선수다.]을 맞으면서 체면을 구겼다.[* 1차전 객원해설을 맡았던 [[장훈(야구선수)|장훈]]이 체구가 작은 걸 보니 구원투수인 거 같다라고 평한 적이 있다.] 이 일로 '국내용'이라는 이미지가 박힌 셈.[* [[2006 WBC|2006년 WBC]]가 열리기 전 까지만 해도 [[한일전|한국이 일본에게 이긴 횟수]]가 그다지 많지 않다. 과거로 돌아가면 원로 야구인들에게 아직도 회자 되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1982년|개구리 번트와 극적인 [[한대화]]의 역전 3점 홈런으로 빛난]] 단 한 경기이고 20세기 초에 열린 [[2000 시드니 올림픽]]의 일본 야구팀, 2000년대에 들어 현재로 유명한 [[베이징 올림픽/야구|김경문호]] 이런 것들 밖에 없었다. 그리고 2006, 2008, 2009 WBC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는 등 선전했지만 [[2015 프리미어 12]]에서의 [[도쿄 대첩(야구)]]를 끝으로 2021년 현재까지 한일전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입단 초 보직은 [[선발 투수]]였고, [[빙그레 이글스]]와의 데뷔전에서 '''[[송진우(야구)|송진우]]'''를 상대로 승리투수가 되었지만 그 후로 4연패를 했는데 경기에 나갈 수 있지만 긴 이닝을 던지기 어려울 정도로 몸 상태가 안 좋아진데다 당시 쌍방울의 구원진이 [[영 좋지 않다|영 좋지 않았기]] 때문에 '''[[김인식]] 감독'''의 지시로 짧은 이닝을 던지는 클로저로 전향했고, 이 후 [[김현욱(야구)|김현욱]][* '''불펜 사상 첫 20승 투수'''라는 대기록을 작성했다.]과 함께 쌍방울의 구원투수진[* 투수난이 심각하여, 에이스 [[김원형]]과 2선발 [[김기덕(1968년 6월)|김기덕]]도 가끔 구원진에 추가되었다.]을 책임지다시피하며 매년 20세이브 이상을 기록하게 된다. 프로 2년째인 1992년에는 7승 7패 8세이브로 다소 부진했다. 2년차 징크스라고 불리우는 소포모어 징크스인줄 알았는데 선수 생활 내내 끊임없이 괴롭힌 [[목디스크]]가 원인이었다. ||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19990321000041800.jpg]]||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19990607000033738.jpg]]|| || (출처 : 포토로) ||<-2> (출처 : 포토로) || [[현대 유니콘스]] 시절.[* 좌측 사진은 1999년 스프링캠프에서, 우측의 호투하는 사진은 현재 사라진 [[숭의야구장]]에서 호투하는 모습이다.] 그러던 1998년 7월[* 모기업 [[쌍방울]]의 부도로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단이 심각한 자금난에 허덕이던 시절이다. 이 시절 쌍방울은 구단을 살리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주력 선수들을 냅다 팔아치웠는데 1997년 시즌 후 [[박경완]]이 현대로 먼저 팔려갔고[* 현대는 쌍방울에게 포수 김형남 + 내야수 이근엽 + 9억을 대가로 넘긴다.] 1998년 시즌 중 조규제를 현대로 보낸 뒤에는 팀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기태(1969)|김기태]]와 불펜 에이스였던 [[김현욱(야구)|김현욱]]까지 1998 시즌이 끝닌자마자 삼성에 내주게 된다.] 현금 '''3억'''+'''[[박정현(투수)|박정현]]'''+[[가내영]]과 맞바뀌어 [[현대 유니콘스]][* 이 당시 국내는 '''[[IMF]]'''였는데 머니 파워중에서 가장 꿀리지 않는 팀이 현대, 두번째가 '''[[삼성 라이온즈]]'''였다.]로 이적했고, 현대에서 2(+1)개의 우승반지를 수집했다. 현대 이적 초기에는 선발투수로 뛰었다. [[1998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 선발 등판했지만, 우타자만으로 타선을 구성한 [[천보성]] 감독의 [[LG 트윈스]] 및 상대 선발 투수였던 [[손혁]]에게 완패했다. 1999년 마무리 [[조 스트롱]]이 미국[* 대신 스트롱은 41세의 나이로 2000년 당시 가장 늦은 [[메이저리그]] 최고령 신인으로 데뷔를 했다.]으로 돌아가자 마무리로 전업했지만, 부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해 다시 선발로 돌아왔다. [* 4월 말 이후에는 [[김수경(야구)|김수경]]이 기용되었으나 역시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쳐 [[정명원]]이 다시 마무리로 돌아왔다.] 2000년에는 좌완 신인 [[마일영]][* 마일영은 원래 [[쌍방울 레이더스]]가 지명했지만 돈이 없어 '''5억원'''에 지명권을 양도했다. 이후 KBO는 신인 지명권을 현금으로 양도하는 일을 금지 시켰다.]이 입단하고 고질적인 목부상으로[* 현역 시절의 피칭 영상을 보면 피칭을 하기 전에 유독 목 근육을 요란스럽게 푸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 목부상으로 인해 [[병역면제]]를 받았다.] 9경기에만 출장하는 등 [[김동식(슬램덩크)|김동식]]스러운 모습을 선보이면서 [[원 포인트 릴리프]]로 간간히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2000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에 출전하여 우승반지를 또 가져갔다.[* 전 년도를 끝으로 OB에서 데려온 [[김익재]]가 방출되며, 현대의 당해년도 좌완은 [[김홍집(야구)|김홍집]]과 [[마일영]] 두 명 뿐이었고, 나머지는 죄다 우완 투수들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김홍집은 조규제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서 거의 기회를 받지 못 했다. ][* 사실 현대 유니콘스에서 선발 10승을 기록한 좌완투수는 '''[[오주원|오재영]]'''과 '''[[장원삼]]''' 둘 뿐이다. 마일영은 중간계투에서 얻은 것이 반이다.] ||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605201841974G.jpg]] || || (출처 : 포토로) || [[SK 와이번스]] 시절. 결국 신생팀 SK의 전력 보강을 위해 우승 팀에서 선수 2명을 현금트레이드로 영입이 가능하다는 지원책 덕분에, 2001년 초 [[조웅천]][* 전년도 신설된 초대 홀드왕에 등극했고, 현대왕조의 허리를 지탱하는 리즈시절이었다.]과 함께 현금 '''15억원'''[* 모기업의 재정지원이 컸던 초창기와 달리 2000년부터의 현대는 모기업인 [[하이닉스]]와 같이 자금난으로 [[부도|망해가고]] 있었다.]에 SK로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전성기가 지났다는 예상과는 달리 노익장을 과시하며,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며 당시 약했던 SK의 투수진에서 쌍방울 시절의 후배 [[오상민]][* 여담으로 [[박명환야구TV]]에 오상민이 출연했을 당시 현역시절 롤모델로 삼았던 선수이자 가장 존경하는 선배가 조규제라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둘 다 군산상고 선후배 사이고 얼굴도 조금 닮은 편이다.]과 함께 전천후 좌완으로 활동하였다.[* 2001년 전천후로 46경기에서 106⅓이닝을 던졌고 2002년에는 46경기에서 78⅔이닝을 던졌다.] SK 시절이던 2002년 8월 16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8회 1사 2루서 등판, 1⅔이닝을 1안타 무실점으로 막고 프로 통산 150세이브(역대 세 번째)고지를 밟았다.[* 그의 역대 최소경기 100 세이브는 [[조용준]]에 의해 깨졌다. 단, 조용준의 통산 세이브는 116개에 그쳤다.] 하지만 2002년 시즌 후 FA '''[[박경완]]'''[* 쌍방울에서도 배터리를 맞췄고, 이후 현대에서도 배터리를 맞추며 두 번의 우승도 같이 해본 후배였다. 공교롭게도 조규제와 박경완 둘 다 쌍방울의 자금난으로 인해 현대 유니콘스에 현금 트레이드됐다는 공통점도 있다.]의 보상 선수로 지명되어 다시 [[현대 유니콘스]]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2003년 한 시즌은 현대 유니폼을 입고 좌완 불펜으로 뛰며 쏠쏠하게 활약해줬고, 그 해 현대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3번째 우승반지를 획득했다. 2003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었다. ||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50120163707000.jpg]] || || (출처 : 포토로) || [[KIA 타이거즈]] 시절. 그러나 원소속팀 현대를 비롯해[* 물론 현대 유니콘스는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아서 FA를 다 놓치고 있었다. 전년도인 2002년에도 주전포수 [[박경완]]을 놓쳐서 신인 [[강귀태]]와 [[이택근]]으로 주전포수를 시킬 구상을 하고 있었으니...그리고 2003년에는 FA 시장에서 [[이숭용]] 한 명만 붙잡고 조규제와 [[박종호]]를 놓쳤고, 이듬해에는 [[박진만]]과 [[심정수]]까지 못 잡으며 선수진이 붕괴한다.] 우리 나이로 38살이 된 조규제를 원한 팀은 딱히 없었고 결국 [[KIA 타이거즈]]와 2년 총 4억 5000만원에 계약해 이적했다.[* 한편 현대는 조규제가 FA로 이적하자 보상 선수 대신 보상금만 받았다.] 그러나 KIA 시절에는 앞선 SK, 현대 시절과 다르게 노쇠화가 급격히 찾아오면서 별 활약을 하지 못했고, FA 계약이 만료된 2005 시즌 후 '''[[홍현우]]'''[* 특히, 홍현우의 경우 [[LG 트윈스]]에서 [[먹튀]] 행각을 벌이다가 고향 팀으로 [[트레이드]] 왔다. 그러나 거기에 딸려서 온 '''[[이용규]]''' 선수가 큰 '''대박'''을 터트렸다], [[이강철]][* [[KBO 준플레이오프/2004년|2004년 준플레이오프]]에서 거대한 삽질을 하며, 노쇠화가 진행 중이였다.] 등과 함께 KIA에서 [[방출]]당해 그대로 은퇴했다.[* 이렇게 된 것은 2005년 창단 첫 최하위를 기록한 KIA가 감독을 [[서정환]]으로 교체함과 동시에 리빌딩을 시도하며 선수단을 대거 정리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40살에 접어든 조규제는 자리가 없었다.] 그나마 [[쌍방울 레이더스|고향팀]]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해서 [[KIA 타이거즈|고향과 가까운 지역의 팀]]에서[* 넓게 보면 인연이 아주 없던 팀은 아니었다. 조규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당시만 해도 해태는 광주·전남·전북을 아우르던 호남 유일의 프로야구팀이었기에 만약 고교 졸업 직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면 해태 선수가 될 가능성이 컸다. 아울러 조규제가 KIA로 들어갔을 때는 전북지역 고교에 대한 지명권이 KIA로 환원된 시점이었다.]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것이 나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