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만식 (문단 편집) === 사망 === 1946년 1월 북한 정권에 자택 연금된 뒤 4개월 후인 5월 3일, 아내인 전선애 여사와 자녀들에게 월남을 권유하며 떠나기 직전 자신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남겨주었다고 한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그의 묘역은 바로 그 머리카락과 손톱을 안장한 것이다. [[6.25 전쟁]]이 발발한 이후 북한 당국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유엔군과 국군에게 넘겨지지 않도록 끌고가던 중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그의 시신이 어디있는지 모른다고 주장하고있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도 여러가지 의견이 많다. 평양이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살해당했다는 주장이 있고, 훗날 모든 정치활동이 배제된 채 [[시골]]로 추방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택연금이 오래된 탓에 고령의 조만식이 허약해졌고, 계속되는 6.25전쟁 중의 [[폭격]]에 적절한 대피를 하지 못하여 사망했다'[* 이미 구금될 당시 그는 고령의 노인이었는데, 노인을 4년 동안 연금시키면 어떻게 되는지는 불보듯 뻔하다.]라는 설도 있으나 북한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가 남한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세한 사실관계 파악에 어려움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북한의 불법 감금이 조만식의 사망에 이르게 된 큰 요인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사실 조소앙보다 2살 많은 독립운동가 [[김규식]]도 비슷한 시점에 죽었는데, 그도 625때 서울에서 북한군에 납치되어, 당시 928 서울수복을 당한 후 유엔군에게 쫓기던 상황의 북한군에게 압록강까지 끌려갔다가 납치된지 2개월여만에 순국했다. 항간에는 [[NKVD]]가 친일파라는 모함을 믿고 [[굴라그]]에 끌고 가 죽였단 얘기도 있다. 조만식의 1948년 이후 행적이 불분명한 것을 볼 때 소련으로 북송된 것도 일리가 있는 얘기다. 더구나 당시 조만식은 고령이어서 [[시베리아]]의 혹독한 추위와 간수로 있는 소련군인들의 학대를 못 견뎠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비서였던 [[백선엽]] 전 대장이 월남을 권유하기도 했다. 1991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조만식의 최후가 밝혀졌다는 주장이 실렸다. 기사는 전 북한 내무상 강상호와 외무상 부상 [[박길룡]] 등(이들 모두 북에서 숙청되어 소련으로 망명함)의 증언에 기초한다. 그들의 증언은 공통적으로, 조만식은 50년 10월 평양이 국군에 의해 탈환되기 전에 평양형무소에서 총살당했다고 전한다. 좀 더 자세한 증언으로, 박길룡은 당년도 10월 18일 밤에 [[허가이]]의 지시로 조만식을 총살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전 북한 고위 간부로 망명한 인사(익명 처리됨)의 증언에 의하면 당년도 9월에서 10월 초순 사이에, 방학세의 결정과 허가이의 형식적인 재가로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 및 반공주의자 500여 명을 총살할 계획이 정해졌고, 사후에 김일성에게 보고되었다 한다. 떠도는 소문에는 김일성 등의 지시로 북한군이 조만식의 눈을 파 버리고 대동강 강변에 방치하여 죽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평양이 떨어지는 긴박한 순간에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조만식이 그런 상태로 살아서 국군 등에게 발견, 구조된다면 김일성에게 좋을 리 만무하다. 이런 소문이 돌던 80, 90년대 초까지는 대한민국에 반공 분위기에 편승한 카더라 수준의 소문이 마구 양산되던 시기였다. 80년대만 하더라도 북한 사람들은 머리에 뿔난 줄 아는 국민학생들이 꽤 있었다. 또 공공연하게 주간지에서 가십성으로 북한지도부의 비도덕적 행위들을 과장하거나 지어내기도 했다. 다만 나중에 그 과장의 많은 부분이 사실로 드러나기도 했지만 말이다. (대표적으로 [[기쁨조]]) 1991년 11월 5일 [[국립서울현충원]] 제2유공자 묘역에 그의 유발(遺髮:고인의 머리카락)이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