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만식 (문단 편집) == 기타 == * '조선의 간디'란 [[별명]]이 있었으며 한 일화에서는 일제의 패망 직전 "내가 죽거든 비석에 눈을 그려달라. 죽어서라도 일본이 망하고 독립을 되찾는 것을 보고야 말겠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나마 생전에 광복을 보았지만 뒤이어 벌어진 승전국의 점령과 분단을 겪고 끝내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만다. * 그의 [[아들]]이 중학교를 졸업했을 때 늘 신고 싶어하던 구두를 모처럼 1켤레 사 가지고 집에 왔는데 그는 아들에게 그 구두를 갖고 오라 하더니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 버리고 아들에게 “공부하기 위해서라면 아까울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 신분에 맞지 않는 사치는 결코 용서할 수가 없다.”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 [[숭실대학교]]에 위치한 '조만식 기념관'은 학교 동문인 조만식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로서 인문대학 및 사회과학대학의 강의 및 연구동으로 쓰이고 있다. * 시인이자 조만식의 제자[* 조만식이 [[오산학교]]에서 교장을 했을때 백석이 그 학교 학생이어서 인연을 맺었는데, 조만식은 그시기 백석에 대해 동기들에 비해 나이가 어려서 친구가 거의 없었는데, 암기력이 특출나고 문학과 외국어 회화에 능통하여 성적이 좋고 우수한 학생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였던 [[백석(시인)|백석]]이 해방 정국 당시 조만식의 [[비서]]였다. 특히 백석이 오산학교 재학 시절 조만식은 스승이자 교장이었으며 조만식이 백석의 집에서 하숙도 했다. 백석 시인 어머니는 [[요리]] 솜씨가 정갈하였는데 조만식이 매우 좋아했다고 그래서 정주에 오면 언제나 백석 시인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한다. 이런 인연과 함께 백석의 유창한 [[러시아어]]([[영어]], [[독일어]], [[일본어]]도 능통) 실력도 한 몫하여 비서가 되었다. * 만화가 [[조경규(1974)|조경규]]가 조만식의 손자다. 조만식의 4남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97%B0%ED%9D%A5|조연흥]] 전 조선일보 기자의 아들. 실제로도 조만식 선생의 젊었을 때 외모와 많이 닮았다. * 시인 [[김소월]]이 [[오산학교]]에서 조만식을 만나면서 사상적 스승으로 대했다고 한다. 조만식을 소재로 JMS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절대 [[정명석|해당 이니셜로 유명한 사이비 교주]]가 아니다!'''] * 동향 사람이기도 한 [[백선엽]] 장군이 전후 만주군을 떠나 귀국하여 [[평양]]에서 조만식의 비서[* [[경호원]]이었다는 설도 있다.]로 일했다. 1945년 12월 [[월남]]하기 전에 백선엽은 조만식에게 같이 내려갈 것을 권유하였으나 조만식은 이를 거부했고 5년 뒤인 1950년 10월 19일(전 날인 18일에 총살) [[6.25 전쟁]] 때 [[제1보병사단|1사단]]을 이끌고 [[평양 탈환|평양시에 입성]]한 백선엽은 자신의 옛 상관을 다시 찾았지만 조만식은 이미 행방이 묘연해진(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은) 상태였다. * [[국제태권도연맹]]의 고당 틀이 조만식을 뜻하는 틀이다. * [[서울어린이대공원]]과 [[파주시]]의 [[오두산통일전망대]]에 조만식의 동상이 있다. 서울에 있는 동상은 1976년, 파주에 있는 동상은 1992년에 세워졌다. * 북한에서는 그를 [[친일파]]로 몰아 죽였으며 남한에서는 우익 진영이 그를 [[반공주의]]의 상징으로 여기나 그가 친일파라는 북한측 주장은 당연히 근거없는 왜곡이고 일각의 주장과 달리 마냥 반공주의적이었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는 인물이다.[* 우익 진영에서 그를 반공주의자의 상징으로 드는 가장 큰 근거가 '신탁통치 반대'를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인데 반공보다는 '신탁통치는 자치론과 비슷한 것'으로 여기면서 신탁통치='독립을 유보하자'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일제강점기 [[신간회]] 당시와 마찬가지로 비타협적 무저항의 시민 불복종 노선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하는 편이 보다 정확하다.] 사실 신탁통치 반대보다는 북한의 회유와 협박을 거부하다 죽어간 점 때문에 반공 우익 [[민족주의]]자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물론 조만식의 [[정치]] 사상이나 노선은 당시 남한 내 주류 강경 반공 진영인 [[이승만]] 진영이 주장하는 바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다.[* 조만식은 이북 지역을 대표했던 지도자로 신망이 높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한국 전쟁]] 때 살아남아 3백만의 실향민과 함께 남으로 왔으면 [[조봉암]] 못지 않은 이승만의 강력한 [[정적]]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조만식은 이승만이 아니라 조선로동당과 김일성 일당에 의해 희생되었으며, 오히려 이승만은 월남민들을 대변하는 조선민주당이 제헌의회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협조했으며 조선민주당 부당수인 이윤영을 장관으로 기용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이는 의미없는 가정이다.오히려 300만 실향민들의 지지를 흡수하기 위해 이승만이 조만식과 적극적으로 정치적 연대를 맺으려고 했을거라는 가정도 충분히 가능하며, 오히려 실제 역사에서는 이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오히려 그는 [[김규식]],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 [[안재홍]]처럼 좌익과의 대화나 타협도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고 봤다. 실제로 그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과 [[무신론]]에 대해서는 반대했지만 [[사회주의]]적 정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대표적인 예로 신간회 활동 당시 그가 사회주의자와 어느 정도 연계를 맺기도 했고 남한에서는 [[여운형]], [[홍명희]]와 친분이 있었다.[[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Print.html?idxno=75930|#]][* 참고로 해당 링크는 NL 성향의 매체의 관점에서 조만식을 조명한 것이다. 판단은 알아서] 그의 정치 노선은 북한 [[공산당]]의 급진적 노선을 거부하고 회유에도 거부한 우익 민족주의자로 적어도 [[현준혁]] 같은 토착 공산주의자하고도 같이 협력할 수 있을만한 역량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소련군 치하에서 소군정측의 철저한 정치적 계산 및 인민전선전략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순전히 자발적인 협력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조만식은 처음에는 마지못해 소련군정과 어느 정도 타협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나중에는 자신을 인민민주주의 체제의 얼굴마담, 꼭두각시로 내세우고 철저하게 모든 권력을 독점하려는 좌익과 소련측의 의도를 간파하고 이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뿌리친 인물로, 처음에는 좌익과의 타협이 불가피하다고 봤다가 나중에 이들의 의도와 술수를 간파하고 비타협적인 입장으로 입장을 선회한것에 가깝기 때문에 과연 좌익과 마냥 타협적이었다거나 이승만 등 해방정국의 반공주의 성향의 우익 민족주의자들과 다른 성향의 인물이라고만 보기도 어렵다. 또한 좌익과의 타협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보았던 다른 우익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조만식의 경우 지역 기반이 소련군 점령 하에 있었던 이북이기에 현실적인 이유로 소련군 및 좌익과 어느 정도의 타협은 불가피했다는 지역적인 맥락이 있기 때문에 다르게 볼 여지가 상당하다.[* 한마디로 조만식의 경우 자신의 활동 지역이 소련 군정의 지배 하에 있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 아무리 공산주의 이념에 반대하더라도 모든 통제권, 행정권을 쥐고 있는 소군정측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고 최소한의 교섭이라도 않을 수 없었던 현실적인 제약 하에 있었고, 이러한 현실 인식에 기반해 좌익과 어느 정도 타협적 입장을 취했고, 남한에 남아 좌익과 타협을 주장하는 일부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신탁통치 및 분단이라는 현실 인식에 기반한 판단보다는 민족 화합이라는 이상을 목적으로 좌익과의 타협 및 대화를 주장했기에 맥락이 상당히 다를 수 밖에 없다.] 또한 조만식은 끝까지 북한 내에서 할 수 있는 한 우익, 민족주의, 개신교, 중농 및 소상공인들을 대변하려고 노력하다 결국 공산당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도 사실이긴 하다. 뿐만 아니라 조만식 밑에서 조선민주당 부당수를 지내던 [[이윤영]]은 1946년 2월 소련군정에 의한 조만식의 감금 이후 월남하여 이승만 주도의 단독정부 출범을 지지하였으며 [[이승만]] 정부의 내각에도 입각하는 등 남한 내 주류 강경 반공 진영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만식을 마냥 좌익과도 타협적인 중도적 민족주의자로 묘사해 이승만을 위시한 반공주의적 우익 민족주의자들과 동떨어진 존재로 조명하는 것 역시 후대에 김구를 이승만의 안티테제로 묘사하며 미화하는 것과 유사하게 실제 역사에 별로 부합하지 않은 주장이다. * 조만식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지만 해방 이후 완고한 반탁운동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진보적인 역사학자들 중에서는 5년 이하의 신탁통치(또는 후견) 이후 통일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측면에 주목해서 무조건적인 반탁보다는 찬탁이 옳았다는 시각을 갖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규식]]이나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 [[안재홍]] 등 당대의 우익 인사들 중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취한 인물들도 있었다. 물론, 조만식이 찬탁을 하고 소련이 실제로 조만식을 남북한 통일임시정부 또는 북한의 대통령 자리에 올려줬다고 해도 얼굴마담으로 쓰이고 공산화 됐을 가능성이 더 높기는 하다. 다만 조만식이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은 더 늘어났을 것이고 이에 따라 북한의 역사도 어느정도 다르게 전개되었을 수도 있다. * 주로 해방 직후에 머리에 두건을 두른 모습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머리에 종기가 나서 가리기 위해 두른 것이다. 드라마 [[제1공화국(드라마)|제1공화국]]에서도 이 모습으로 등장한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제1대 부통령 선거/후보]][[분류:1883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창녕 조씨]][[분류:강서군 출신 인물]][[분류:조선의 유교 신자]][[분류:일제강점기의 장로회 신자]][[분류:대한민국의 장로회 신자]][[분류:북한의 개신교 신자]][[분류: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분류:숭실고등학교 출신]][[분류:메이지대학 출신]][[분류:건국훈장 대한민국장]][[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