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명록 (문단 편집) === 선군의 외교사절 ===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김정일과 함께 순안비행장에 나와 그를 영접했으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 때도 참석했다. 그가 국제적인 무대에서 제일 유명해진 순간은 2000년 10월, 김정일의 특사로 워싱턴을 방문하여 [[빌 클린턴]] 대통령과 접견한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과 북한 관계는 여러 악조건이 겹치면서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북한은 미국에 테러지정국 해제를 요구했으나 클린턴 행정부는 2000년 5월 1일 발표한 연례테러보고서에서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유지하였으며, [[2000년 프랑크푸르트 공항 사건|2000년 9월, 김영남이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으로 가던 중,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미국 아메리칸 항공의 보안검색에 항의하여 평양으로 돌아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북한으로부터 미사일 수출의 중단, 장거리 미사일 개발 계획 포기를 받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역시 소득이 없던 미국 정부는 몇몇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 미국 정부와 관계가 없음을 강조하였다. 9월 27일, 뉴욕에서 개최된 [[김계관]]-카트먼 회담은 북한이 미국 법률요건을 충족시키면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한다는 <국제테러에 관한 미북 공동성명>에 합의하고 조명록의 방미를 논의하였다. 김정일은 북미관계의 전환을 위해 2인자 조명록을 특사로 보내기로 결정하였고, 김대중도 클린턴에게 조명록을 만나줄 것을 부탁하였다. 미국이 승낙하면서 이 소식은 전 세계에 공포되었다. ||[[파일:attachment/67391289150989757.jpg]]|| ||2000년, 백악관에서의 조명록|| 1999년 페리 보고서를 발표 이후 주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매달리느라 북한 문제에 소극적이었던 클린턴 행정부가 조명록을 만나기로 한 것에 미국의 북한 전문가들과 아시아 언론은 다들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미국 쪽에서는 차기 미국 대통령 선거에 정신이 팔려 조명록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미국 정부 차원에서도 팔레스타인 문제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었고, 클린턴 회고록에서 조명록에 대한 얘기는 일언반구도 없다.] 조명록은 10월 10일,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만났다. 올브라이트와 회담할 때까지만 해도 양복을 입고 있던 조명록은 백악관으로 가기 전, 군복으로 갈아입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북측은 분명히 미국에 조명록은 군복을 입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한 상태였고 이 때문에 미국의 담당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특히 공화당에서 클린턴이 공산주의 독재자의 주구와 놀아난다고 비난할 것에 대해 우려했다. 올브라이트는 그와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국무부에서 나와 만날 때 조명록은 회색 양복 차림이었다. 하지만 30분도 채 안돼 백악관에 도착했을 때 그는 군복으로 성장하고 있었는데, 옷에 견장과 훈장(적어도 그중 하나는 베트남에서 미군과 전투를 벌이고 받았을), 그리고 기장까지 빠짐없이 달고 있었다. 그는 과장된 동작으로 김정일의 서신을 전달하며 대통령에게 평양으로 오라고 초청했다. 대통령은 이 제안을 검토해보겠지만, 어떤 방문이라도 그것이 성사되려면 사전에 조정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말했다. 조명록은 좀 더 명확한 답변을 요구했다. 대통령은 내게 사전 준비를 위해 먼저 가는게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조명록은 대통령과 장관이 함께 온다면 "우린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조명록은 클린턴에게 북미 관계정상화, 북한 로켓을 3국이 발사해주는 것에 대한 국제사회의 재정지원을 조건으로 내걸며 미국이 이를 받아들이면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포기할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다. 찰스 프리처드는 조명록이 클린턴의 방북의사를 받아내기 위해 거의 애걸조에 가깝게 말했다고 회고했다. 특사들이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 못해서 수령의 노여움을 산 것을 생각한다면 총정치국장을 미국까지 보낸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없을 시에 김정일의 분노가 클 것임을 생각한다면 조명록의 초조함은 논리적인 것이었다. 클린턴은 잠시 침묵했지만 매우 우호적인 태도로 조명록이 건내준 김정일의 친서에 대해서 "훌륭한 서한"이라고 높이 평가했고, 조명록을 비롯한 북한 대표단은 크게 안도했다고 한다. 클린턴과의 회담 후, 조명록은 올브라이트 장관,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과 회담을 재개하였고 이후 10월 12일, [[북미 코뮤니케]]가 발표되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북한은 사실상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포기할 것을 선언하여 미사일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음. * 2. 북미 양국은 상호 적대관계를 포기하고 경제 교류, 협력을 확대할 것이며 미국은 북한의 체제를 보장하고 경제를 지원할 것임. * 3. 정전협정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4자회담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방안을 활용할 것임. * 4. 클린턴 대통령의 북한 방문을 가능한 준비하기 위해 올브라이트 장관이 평양을 방문할 것임. 코뮤니케 발표 후 조명록은 올브라이트가 당황할 정도로 과격하게 술을 마셨다. 이후 올브라이트는 약속대로 10월 23~25일 사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2차례 회담을 가졌다. 조명록은 그때도 나와 올브라이트를 맞이하였다. 2001년 3월에는 중국 공산당 대표단 접견식에 참석하였으며, 2001년 9월 [[장쩌민]] 중국주석의 방북을 맞이했고, 2003년 4월에 중국을 공식방문하여 [[후진타오]] 주석과 면담했다. 그외에도 중국, 쿠바의 군사 관계자들과 면담하면서 군사외교를 수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