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왕조 (문단 편집) == 여담 == * [[파일:attachment/IE001602466_STD.jpg]]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마지막 권에 실려 있는 그림은 조선 국왕의 성향을 잘 묘사하고 있다. * 3대 [[태종(조선)|태종 이방원]]은 역대 조선 국왕 중 유일하게 과거(문과)시험(물론 태조 이성계가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인 고려 시대의 과거)에 급제한 국왕이다. 그것도 [[1384년|17세]]에 최연소로 급제하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이 [[고등고시|고시]]를 그것도 고등학생 재학 때 보고 당당히 합격했다는 얘기. 즉, 젊은 시절에 엘리트 코스를 밟은 공무원이 ~~쿠데타 일으킨 아버지 따라서~~ 대통령이 된 셈.] * 18대 [[현종(조선)|현종]]은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귀국자녀|외국(청나라)에서 태어난]] 임금이다. 부왕 효종이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태어났다. 그 외 [[조선]] 건국 이후 출생한 [[국왕]] 중 도성 [[한양]] 밖에서 태어난 국왕은 16대 [[인조]](황해도 해주). 반대로 최초로 도성 한양에서 태어난 국왕은 4대 [[세종(조선)|세종]]이고, 최초로 궁궐 내에서 태어난 국왕은 6대 [[단종(조선)|단종]]. 세종은 [[1397년]], 즉 [[1차 왕자의 난]] 전이라 아버지 태종이 그저 5남으로서 일반 왕자(정안공)였던 시절에 정안공 개인 사저에서 태어났고, 마찬가지로 [[문종(조선)|문종]]도 [[1414년]]에 아버지 [[세종(조선)|세종]]이 3남으로서 일반 왕자([[충녕대군]])였던 시절에 사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관점으로 보면 [[태조 이성계|태조]]도 [[원나라|외국]]에서 태어난 군주이기는 하다. 그러나 현대의 대한민국에서는 (북한이 명목상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점에서) 해당되지 않는 부분이다. * 한양에서 즉위하지 않은 국왕은 초대 [[태조 이성계]]와 3대 [[태종(조선)|태종 이방원]]. 둘 다 [[개성시|개경(개성)]] [[수창궁]]에서 즉위했다. 태조가 즉위할 때는 아직 [[한양]]을 수도로 정하지 않았을 때이고, 태종이 즉위할 당시엔 수도를 잠시 개경으로 천도했을 때였다. 나머지는 전부 한양에서 즉위했는데 [[정종(조선)|정종]], [[세종대왕|세종]], [[문종(조선)|문종]], [[단종(조선)|단종]], [[세조(조선)|세조]], [[성종(조선)|성종]], [[중종(조선)|중종]], [[명종(조선)|명종]], [[선조(조선)|선조]]는 [[경복궁]]에서, [[연산군]], [[효종(조선)|효종]], [[현종(조선)|현종]], [[숙종(조선)|숙종]], [[영조]], [[순조]], [[철종(조선)|철종]],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창덕궁]]에서 즉위했다. [[예종(조선)|예종]], [[인종(조선)|인종]]은 [[창경궁]]에서, 그리고 [[경종(조선)|경종]], [[정조(조선)|정조]], [[헌종(조선)|헌종]]은 [[경희궁]]에서 즉위했으며 [[광해군]], [[인조]], [[순종(대한제국)|순종]]은 [[덕수궁|경운궁(덕수궁)]]에서 즉위했다. * 조선 국경을 넘어 외국에 나갔던 경험이 있는 국왕은 태조, 태종, 세조, 효종, 현종, 순종이다. 태조는 애초에 출신이 동북면[* 현재 [[함흥]]으로 추정, 당시는 고려 땅이 아니었다.]에 공민왕 때 [[제1차 요동정벌|요동 지방을 크게 들쑤시고]] 온 적도 있고, 태종과 세조는 왕자 시절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경험이 있으며, 효종은 상술되었듯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다가 돌아왔고, 현종은 아버지 효종이 볼모로 있던 시절에 태어난 국왕이다. 순종은 역대 국왕들 중 유일하게 일본을 방문했던 국왕으로 대한제국이 망한 후인 1917년에 일본을 방문해 약 20여일 정도 있었다. 하마터면 선조도 조선 국경을 넘어갈 뻔 했으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효종의 경우에는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망하는 순간과 [[청나라]]가 중원을 접수하는 광경을 구경하기도 했으며 [[베이징]]에서도 수개월 체류했으니 가장 인상 깊은 경험을 했다 할수 있다. * 임금이나 세자의 자식이 아닌데 왕위를 이은 국왕은 태조, 선조, 인조, 철종, 고종이다. 선조는 명종의 양자가 되었고 인조는 자기가 국왕이 된 후 아버지를 원종으로 추증해서 임금의 자식이 되었고, 철종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이었으며 고종은 익종(뒷날의 문조)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양자로 들어가 왕위를 계승한 것이므로 이들 모두 어쨌든 사후적으로 임금의 자식이 되긴 했다. 선조와 철종의 아버지는 [[대원군]]으로 추존되었지만 국왕으로 추존되지는 않았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대원군들 중 유일하게 살아 생전에 대원군이 된 경우이다. * 세자의 자식으로 국왕이 된 사례는 의경세자의 아들 성종,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있다. 성종의 아버지 의경 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되었고 정조는 효장 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었는데 양부 효장 세자는 진종으로, 생부 사도 세자는 훗날 고종에 의해 장조로 추존되었다(이전엔 장종). 헌종의 아버지 효명 세자는 익종으로 추존되었다가 고종 때 문조로 재추존됐다. * 역대 국왕 중 형제끼리 세습한 국왕은 정종 - 태종, 연산군 - 중종, 인종 - 명종, 경종 - 영조이다. 조선 왕실은 부자 세습을 원칙을 하였지 이 형제 세습은 상당히 예외적인 유형인데, 역시 이 답게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 연산군 - 중종은 [[중종반정]]이란 특수한 유형이고 정종 - 태종은 사실상 태종이 주도한 [[무인정사]] 이후의 임시직을 정종이 맡았다가 태종이 도로 가져간 형태.[* 참고로 태종은 형식적이나마 정종의 양자로 있는 식으로 계승.] 인종 - 명종, 경종 - 영조도 각각 후사가 없자 물려준 것이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유혈 [[숙청]]([[을사사화]], [[신임옥사]], [[정미환국]] 등)이 발생했다. * 반대로 역대 국왕 중 삼촌-조카 혹은 조카-삼촌이 세습한 사례는 대체적으로 비정상적인 세습이다. [[계유정난]]을 통해 대신과 [[안평대군]]을 제거, [[생육신]], [[사육신]]의 난을 통해 소장파와 잔류 친단종파를 숙청한 뒤 조카 단종까지 죽인 조카 [[단종(조선)|단종]]-삼촌 [[세조(조선)|세조]], [[인조반정|반정]]을 통해 삼촌 [[광해군]]을 몰아낸 조카 [[인조]]. 다만, 단종-세조 뒤 삼촌 [[예종(조선)|예종]]-조카 [[성종(조선)|성종]]은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을 제치고 계승 순위 3위인 자을산군을 즉위시킨게 정통성 문제를 있기도 했지만, 피바람은 불지 않았다. 워낙 예종이 예기치 못하게 빨리 자연사해서... 삼촌 [[명종(조선)|명종]]과 조카 [[선조(조선)|선조]]도 있으나, 역시 같이 정통성 문제가 있는 성종이 공부를 열심히했는데, 이같은 문제도 없었다. 7촌 조카-7촌 아저씨인 헌종-철종은 예외.[* 물론 철종이 순조의 양자로 들어가 당시로썬 조카-삼촌이긴 했다.] * 상왕(上王)이 되었던 국왕은 태조, 정종, 태종, 단종, 세조[* 딱 하루 상왕 하고는 죽었다. 최단 재위 상왕. 최장기 상왕은 정종.], 고종이 있다. 이중에서 태종과 세조를 빼고는 전부 다 외압으로 상왕이 되었다. 양위 드립을 쳤던 국왕으로는 위의 국왕을 빼고도 다음과 같다. * 세종 - 끝내 대리 청정으로 합의를 봤다. 세종 24년부터 세자가 섭정을 했다. 따라서 세종 24년 이후의 업적은 실질적으로 아들인 문종의 업적으로 봐야 한다. --물론 그 와중에 훈민정음도 개발하시는 등 할 건 다 하셨다-- * 중종 - 죽기 직전에 인종에게 왕위 물려줄까?하고 한번 해보았으나 조정의 결사 반대로 무산되었고 어차피 얼마 안가서 죽었는지라... * 선조 - 세자인 광해군을 아주 가지고 놀았다. 광해군이 적장자로서 세자에 책봉된 것도 아니고, 서장자 임해군이 멀쩡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전시라는 특별한 사정으로 세자가 된지라 광해군은 선조가 양위 드립을 칠때마다 불충으로 몰리지 않으려 죽을 힘을 다해 사양했다. 나중에 적자 영창대군이 태어나 입지가 좁아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전쟁영웅이었기에 결과적으로 입지가 불안해진 적은 없었다. [[영창대군]]은 너무 늦게 태어났고 연배가 비슷한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 등은 범죄자에 정신병자 수준이라 별로 위협이 되지 않았다. * 영조 - 두세 차례 선위 파동을 일으켜서 세자가 통곡하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기절까지 했다. * 국왕이 되기 전에 대리청정을 해본 국왕으로는 태종, 문종, 예종(세조가 아팠을 때 잠깐), 광해군, 경종, 정조 등이 있다. 태종은 세자 시절부터 군사권을 지휘하는 등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했고 사도 세자, 효명 세자는 대리 청정은 했으되 국왕이 되기 전에 죽었다. 광해군의 경우에는 [[임진왜란]] 당시에 분조(分朝)를 이끈 경험이 있고, 소현 세자는 [[정묘호란]] 때 분조를 이끌었으나 국왕이 되기 전에 죽었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으로 단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력을 차지하여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했으나 수양대군은 단종의 숙부이므로 이것은 대리청정이 아니다. * 세는나이로 60세 이상을 맞은 왕 태조, 정종, 광해군, 숙종, 영조 5명뿐이고 70세 이상은 태조, 영조 2명으로 줄어들며 80세 이상은 오로지 영조뿐이다. 25세에 즉위해 24년 재위하고 49세에 죽은 정조가 가장 평균에 가까운 임금이다. 한편 영조는 83세까지 살았으니 엄청 장수한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시대 당시에도 영조보다 오래 산 인물들은 찾아보면 꽤 많다.[* 대표적으로 [[황희(조선)|황희]](90), [[효령대군]](91), [[송시열]](83), [[허목]](87) 등이 있다. 게다가 송시열은 자연사도 아니고 사약을 받아 죽었다.] 조선시대 평균수명이 짧았던 것은 영아 사망율이나 낮은 위생 수준 따위 때문인데 당시에도 생명력 강한 사람은 90대를 넘기기도 했다. 임금은 매일 보는 업무가 격한데다, 스트레스를 풀 수단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거기에 비해 식사량은 많았으니 대체로 비만이 될 확률이 높았다. 실제로 세종 대왕의 경우 당뇨병 때문에 사망하였을 정도. 다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조선의 왕실은 유난히도 장수하지 못하는 군주가 많고, 5살 단위로 끊어 최빈값으로 따질 경우 평균보다 훨씬 적은 30대 후반까지밖에 못 살았다. 장수는 유전자의 영향이 상당히 강한 만큼, 조선 왕실 자체가 장수하지 못하는 유전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반대의 경우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은 군주 중에는 광개토대왕을 제외한 대부분의 군주가 50대를 넘기고 60,70까지도 마구 살아남는 고구려의 고씨 왕조가 있다. * 영조[* 장수했던 만큼 그 식단과 식생활이 채식으로 이루어져서 아주 건강했다.]와 정종[* 원래 무인이었고, 격구를 즐겨하여 체력이 튼튼했다.], 고종[* 이때는 의학이 급성장할 때이다.], 순종[* 다만 이쪽은 전반적인 건강이 안 좋았다.]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임금이 [[종기]]를 앓았으며, 문종, 세조, 성종, 효종, 정조가 종기로 사망했다. 이는 당시 조선 임금의 생활 습관이 종기에 걸리기 딱 좋기 때문. 정무로 인한 과도한 스트레스와 피로, 지나치게 많은 식사량과 운동 부족은 종기가 발생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태조와 태종은 사냥을 즐겼고, 정종과 세종대왕은 오늘날의 골프와 흡사하다는 격구라는 것을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국왕의 몸은 국가의 안전과도 같다는 당시의 사고 방식 때문에 격한 운동이나 야외 활동은 금지되었으며[* 지금이야 [[대한민국 대통령]]의 어느 정도 격한 운동은 열량 소모 및 체지방 연소를 이유로 권장되고있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격하게 몸을 움직이는 활동은 부상과 같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국왕의 건강과 안위를 거의 국가 안보급으로 취급하던 조선 시대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국왕이 끼니를 거르기라도 하면 온 대궐 안이 발칵 뒤집어지는 대형 사고였다. 사극에서 국왕이 끼니를 걸렀다는 소식을 들은 왕비나 대비가 "주상께서 수라를 물리시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주상께서 수라를 마다하셨다는게야!?!?"라고 대노하는 장면이 괜히 나오는게 아니다. 영조와 같은 일부 국왕은 역으로 수라와 탕약을 일부러 거르는 일종의 파업을 행하기도 했다. '내 뜻대로 하기 전까지는 밥을 굶겠다!'는 선언이니 신하들에겐 엄청난 압박이었다[* 국왕이기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에 때로는 식욕이 없어 식사를 하지않을 때도 있지만 그랬다간 무슨 근심이나 걱정이 생겨서 식사를 안하는가 싶어 궁궐이 노심초사 하는 바람에 그조차 안된다. 어쨌든 이유없다. 그저 잘 먹어야 한다. 단지 아래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하루에 무려 5번이나 상이 들어오고 그 수준 역시 장난이 아닌지라..][* 만에 하나 이러한 일이 생기면 그 원인을 제공했던 신하는 왕비나 대비에게 호출되어 갈굼당할 각오를 해야한다. 뭐 왕비가 만만하게 보이니 실효가 없을것이라 생각한다면 대비가 직접 나서고 대부분 대비의 호령 하나로 교통정리가 끝난다.]. * 조선 국왕의 하루 끼니(수라)는 총 5끼였다. 초조반으로 죽과 미음, 동치미, 마른 반찬 조합으로 나온 것이 오전 7시 쯤 나온 상이었고, 아침상이 오전 10시쯤 나왔는데 9첩 반상[*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제후국 예법으로 9첩 반상을 받았음이 알려졌다. 12첩 반상은 대한제국 성립 후 바뀐 것.][* 물론 9첩이라고 해서 반찬 아홉가지 한정식 따위를 생각하면 안 되고, 하나하나가 연회요리급 정성이 들어간 수준이다. 위 사진은 오히려 실제에 못 미치는 수준일 수 있다는 것.]을 먹었으며, 점심 간식을 '낮것상'이라 하여 국수나 장국, 다과를 먹었다. 그리고 저녁은 오후 5시쯤 나와 역시 9첩 반상을 먹었고 야참으로 약과나 수정과, 식혜, 국수 등이 나왔다고. 즉, 정식 식사는 '조석(朝夕) 끼니'라는 단어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오전 10시 경의 아침상과 오후 5시쯤의 저녁상 2끼였으며, 나머지는 중간중간의 간식이었던 셈.점심이 정식 식사가 된 역사는 의외로 짧다. 사실 '점심(點心)'이라는 말 자체가 '아침 먹고 나서 꽤 시간이 흘러 해이해진 마음{{{[}}}心{{{]}}}을 다시 점화(點火)시킬 정도로 간단히 먹는 식사'라는 뜻이기도 하고... 본래는 조석 끼니 사이의 간식 취급이었다. 왠지 '대식가'의 이미지가 강한 [[세종대왕]]은 하루 4끼를 먹었고 [[영조]]가 5끼의 식사를 3끼로 줄였다. 두 사람은 식성 자체도 극단적으로 정반대였는데, 세종은 고기를 매우 좋아해서 고기 반찬이 없으면 밥을 안 먹는다고 부왕 태종이 걱정해 유언으로 상 중에도 고기를 먹게하라고 했을 정도였던 반면, 영조는 채소 반찬 서너가지로 소식하는 것을 좋아해서 당시 실록을 보면 영조의 식단을 주변에서 걱정했다고 한다. 영빈(영조의 후궁이자 사도 세자 생모)은 ‘스스로 먹는 것이 너무 박하니 늙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라고 걱정했다고. 이러한 식단은 건강에도 영향을 미쳐, 세종은 눈병, 피부병, 각종 성인병에 시달렸으나[* 단 세종은 엄청난 책벌레였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경연에서 신하들에게 역으로 질문까지 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임했을 정도였으니 그 학구열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것이다.] 영조는 즉위 52년간 잔병치레 조차 없었다. 영조의 식습관은 오늘날에도 장수 비결로 뽑힌다. [[파일:1561866740_1.jpg]] * 영조는 술을 매우 꺼려서 본인도 술을 거의 마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주령]]을 내려 술을 한동안 일절 금지시켰다. 사실 술을 만드려면 대량의 곡식이 필요해서 이를 절약하기 위해 금주령을 내린 사례는 영조 이전 및 이후에도 있었지만 일시적이고 단기간이었던 반면, 영조는 거의 재위 기간 내내 금주령을 유지시켰다. 금주령을 어긴 관료를 처형하도록 하고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처형장에 직접 올 정도. 이런 식으로 장기간에 걸쳐 금주령을 유지한 것은 영조 대가 유일하다. 아이러니한게, 그 다음 대이자 손자인 정조는 술을 즐겨서 즉위 직후 금주령을 폐지하였고 평소 술 버릇도 '[[술 강요|남에게 강제로 술먹이기]]'였다. * 자기 자식을 죽였던 국왕은 서장자 [[복성군]]을 사사한 중종과 [[임오화변|사도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영조가 있다.[* 다만 중종의 복성군 사사는 [[김안로]]의 압력 때문이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중종은 도승지 양연을 통해 [[김안로]]를 순식간에 처리해버렸다.] 인조 역시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강한 의심을 받고 있으나 확실한 건 아니다. * 형제를 죽인 국왕들은 은근히 많은데 이복 형제인 이방석, 이방번을 베어 죽인 태종 이방원부터 동복 동생인 안평 대군, 금성대군을 죽인 세조, 이복 형제들을 죽인 연산군, 이복 형제 견성군을 사사한 중종,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 이복 형제 은전군을 사사한 정조[* 영조도 간장게장으로 경종을 죽였다는 말이 있다.] 등이 있다. * 즉위하기 전 실무 관료 생활을 해 본 국왕으로는 고려의 무관 출신인 태조와 정종, 위에서 나왔듯이 유일한 과거 급제자 출신인 태종, 수양 대군 시절 잠시 영의정 자리를 맡아서 실권을 장악한 세조가 있다. 이후 성종 때에 종친 사환 금지법이라고 해서 왕실 종친들은 명예직 외에는 관직 진출을 금지해 버렸다. * '친정(親征)', 즉 국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실전에 참가한 형태는 [[조사의의 난]] 때 친정한 태종이 유일하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포위된 인조도 전장에 있었던 것은 맞으나 친정과는 거리가 있다. 국왕이 되기 이전에 친정한 사례로는 [[임진왜란]] 때 세자 시절의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참여한 적이 있다. * 역대 임금 중 '살해'된 국왕은 공식적으로는 폐위 뒤 살해된 [[단종(조선)|단종]]이 유일하다. 대중들 사이에서는 인종, 정조, 고종 등이 독살당했다는 [[조선왕 독살설|독살설]]이 알려져 있다. * 역대 국왕 중 미혼인 왕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으며, 추존왕까지 포함하여도 그렇다. 어린 나이에 죽어서 미혼이었다고 생각할 법한 [[단종(조선)|단종]]이나 [[효장세자]](추존왕 진종)도 실제로는 결혼했다. * 조선 국왕 27명 중 26명이 [[대한민국|남한]]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유일한 예외가 2대 [[정종(조선)|정종]]으로 현재 북한 땅인 [[개성시]](후릉)에 묻혀 있다. 정종은 한양에서 잠시 개경으로 환도했고 개성 지역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개성 부근에 묻힌 것이다. 정확히는 개성 시내에서도 꽤 떨어진 예성강 부근에 묻혔고 강 맞은 편이 고려시대 최대 무역항이었던 [[벽란도]]다. 한편 동구릉, 서오릉, 서삼릉 등 왕릉이 모인 곳이 대부분 [[한강]] 이북에 있다 보니 한강 이남에 묻힌 왕은 적은 편이다. 27명 중에는 태종·세종·단종·성종·중종·효종·순조·정조 8명, 추존까지 합치면 원종·장조가 포함. * [[흥선대원군|마지막 대원군]]을 제외한 대원군들은 인성이 안 좋거나[* 덕흥대원군과 정원대원군.], 일찍 죽거나[* 덕흥대원군, 정원대원군], 자식이 역모에 엮였거나[* 정원대원군, 전계대원군], 귀양갔다[* 전계대원군]. 흥선대원군도 청나라에서 유폐당했으니 왕들만큼이나 대원군들도 풍파의 삶을 살았다. * 조선의 초대 왕 태조의 키는 180cm로 현대 기준으로 보아도 장신에 속했다. 태조의 키가 커서인지 후손인 9대 왕 성종은 키가 컸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아들들인 연산군과 중종[* 정작 [[선정릉 도굴사건]]에서 정릉에서 발견된 중종의 것으로 보이는 시신이 키가 포백척으로 3척 2촌(약 149cm) 정도의 키를 가졌는데 이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는 확정되지는 않았다.]도 그를 닮아 키가 컸다고 하며 조선 후기 17대 왕 효종과 23대 왕 순조도 체격이 컸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말기의 26대 왕 고종은 키가 153cm에 불과했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키도 150cm 정도에 불과했다.], 마지막 왕 순종은 키가 162cm 정도에 불과했다. 다만 순종의 경우 당시 조선시대 남성 평균 키가 161cm 정도인 걸 감안하면 그 정도 키는 오히려 평범하거나 약간 큰 수준이었다. 조선 국왕은 태조와 중종[* 단 중종은 선정릉 도굴사건때 정릉에서 발견된 시신이 중종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중종도 사후에 키에 대한 측정 기록이 있는 국왕이 될 수 있다.], 고종, 순종을 제외하면 키에 대한 측정 기록이 없어서 평균키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적어도 평균보다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