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평가 (문단 편집) == 한국사적 의의 == [[서울대학교]]와 [[국정교과서]]가 받아들였던 시대 구분에 따르면 [[조선]]은 멀게는 [[통일신라]]부터 시작되어 [[고려시대]]까지 지속되었던 [[중세]]를 끝내고, [[근세]]를 열었다는 의의가 있다.[* 다만 [[연세대학교]]의 경우, '근세'란 표현을 쓰지 않고 조선시대를 중세 후반부로 본다. 그리고 [[고려대학교]]는 이와 같은 시대구분을 쓰지 않고, 왕조의 변천에 따라 구분한다.] 또한 [[한반도]]라는 국토와 [[한민족]]이라는 민족문화, 민족의식을 완성시켰다. 그 외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민간 경제(상업, 수공업, 무역)의 발전. 한국 역사상 최초로 조직적인 상인조합([[유상#s-4|유상]], 만상, 송상 등), [[어음]], [[계]]로 대표되는 원시적인 선물, 금융 거래가 태동했다. [[놋그릇]][* 한국은 전통적으로 ‘그릇’의 용도로 도자기가 아닌 [[놋그릇]]을 썼다. [[고려청자]]처럼 화려한 [[도자기]]가 적은 것도 역시 이 때문. 정교한 도자기 수요가 전멸해버리니 도자기 기술이 화려해지길 기대하기 어렵다.], 자개, 칠기 등의 생활 용품이 시장에 출시돼 대중화되었다. 교역 역시 이전 [[고려시대]]보다 큰 폭으로 늘어나 ‘민간에 의한 무역’이 이전 시기보다 유의미하게 활발해졌다. 인삼을 가공한 상품인 [[홍삼]]의 예처럼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간 주도의 무역 상품이 개발되었다. 한국사에서 [[화폐]]가 처음으로 대중적으로 쓰이던 시기 역시 조선시대다.[* 그러나 화폐가 대중적으로 쓰였다고 보기엔 조선 말기까지 삼베나 쌀등의 현물거래의 비율이 유럽뿐 아니라 중국,일본과 비교해서도 매우 높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정부에선 군사비로 군인들에게 은전을 지급하며 군사 식량의 일부를 전쟁터인 조선 현지에서 해결하라고 명령했는데 물론 전쟁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조선에서 화폐를 받는 시장이 거의 없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의 화폐는 [[상평통보]]로 불렸다. * 고급 문화의 활발한 발전, 수입. 조선시대에는 초강대국인 명나라와 활발히 무역했는데, 선진적인 문화를 수입하려는 욕구 역시 그 요인 중 하나였다. [[명나라]]가 누르하치 군대와의 전쟁에서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도 역시 지속적으로 문화를 수입했는데, 조선 후기의 기득권층이었던 서울 북촌에 거주하던 벌열가문 경화세족들이 그 주역이다. 당시 슈퍼갑 부자들 사이에서는 세련되고 화려한 청나라 문화가 유행해 활발히 선진 중국 문물을 수입하며, [[서양]]이나 [[중동]], [[인도]]의 문화 역시 부수적으로 수입되었다. 조선은 사치를 지양했다는 편견이 있지만, 조선 후기 [[여흥 민씨]], [[안동 김씨]], [[반남 박씨]], [[전주 이씨]] 등 가세가 하늘에 뻗치던 당대 명문가들이 향유한 문화, 양식은 그 수준이 매우 사치스럽고 정교하며, 우수하다. * 건축 기술의 발전. 조선의 건축은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해 평면적으로 더 복잡하고, 형태가 다양하며, 정교하다. 단순한 일자현 건축에서 탈피해 ㅁ, ㅂ, ㄱ 형태의 한옥이 보편화 되었다. 후기로 가면 만성적인 목재부족에 시달려 휘어진 나무 줄기마저 건축에 적용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상류층에서는 귀한 모과나무 등을 모양 그대로 집 기둥에 써서 자신의 부를 사치스럽게 과시했다. 왕궁, 사찰 같은 대형 토목 건축은 목재 부족으로 건축물의 규모가 작아졌으나[* 더이상 불교가 국교가 아니라 불교 사찰은 그 세가 움츠러 들었기 때문이며, 왕궁 역시 개별 건축물은 정전 같은 주요 건축을 제외하면 딱히 규모가 작아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간상 훨씬 더 크고 복잡해졌다. [[경복궁]]이나 동궐([[창덕궁]], [[창경궁]])의 규모를 보자.] 민간의 가옥은 더 발달한 기술과 큰 규모를 갖추었다. 당연히 2층 건물도 있었다.([[창덕궁 경훈각|창덕궁 징광루]], [[덕수궁 석어당]], 도시 지역의 상점 건축들) * 인구 급증. 오랜 평화와 낮은 세율, 농업 기술 발전(농업 생산량 증대)으로 인구가 증가했다. 조선의 인구는 건국 초기인 14세기 말 약 5,500,000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후기인 18세기에 가면 약 18,700,000명으로 전근대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무려 3배가 넘게 인구수가 말그대로 폭증하였다. 서기 2020년대가 된 지금에도 전 세계에서 국력의 펀더멘탈로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가 인구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당시의 인구란 농업이란 국가 기간산업을 지탱하고 군사력에 동원될 수 있는 인구란 개념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고급의 기술과 고도의 숙련된 인재들, 다시 말해 국가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인적 구성원의 개념을 통칭한다.], 굉장히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 밀도는 오스만 터키, 중국 중원, 이집트와 일본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제일 높았으며, 인구의 절대적인 수치 역시 순위권이었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높은 인구 부양력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특히 중국의 강남과 일본과 달리 지력이 약하고, 강수량이 극단적인 환경, 40도선 이북으로는 벼농사가 매우 어려운 환경에 조금씩 적응해가며 이룩한 업적이다. 중국의 강남과 일본은 기후가 온화하고 강수량이 풍부하여 쌀의 다수확이 가능한 환경이기에 인구 증가에 상당한 이점이 있었다. 즉 조선은 중국과 일본보다 거의 절반에 불과한 수확량으로 저만한 인구증가를 이뤄낸 것이다. * 통일신라, 고려 때 보다 더 안정적인 영토(영토의 확립). 1896년의 13도 체계를 기준으로 평안북도(평안남도는 고려시대때 가서야 완전히 고려의 영토로 정복되었다.[* [[태조(고려)|태조 왕건]]이 [[삼국통일전쟁]] 이래로 전쟁터가 된 [[평양시]]에 지금의 황해도 지방 백성들을 이주시켜 기반을 강하게 다졌고, 처음에는 평양 대도호부(平壤大都護府)로 명령했다가 이어 [[서경(고려)|서경]]으로 개편하면서 본격적으로 고려의 영토로 정복되었다. 그 이전에는 사실상 버려진 전쟁터였었다.])와 함경남도 그리고 함경북도는 모두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 이후 조선시대 때 [[4군 6진]]을 개척하고 나서야 다시금 한민족의 영토로 완전히 재정복되었다. 그 이전에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이들 영토들은 사실상 [[야인]]들이 정복한 영토였었다. 지금 현재 남북한의 영토를 완성했다는 점과 통일신라, 고려 때 보다 더 영토를 안정적으로 확립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영토 확립은 남북한의 영토로 계승되기 때문에 굉장히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 왕권과 신권의 조화(의정부서사제)와 [[성문법]] 국가체제의 완성. 다만 성문법이 있었다고 해서 [[법치국가]]인 것은 아니다. [[법치국가]]는 '법이' 지배하는 국가를 말하지만, 조선은 이념상으로는 국왕이 '법으로' 지배하는 국가였다는 데서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게 사헌부과 사간원이라는 존재였다. 국왕이 자신의 임의대로 명령을 내린다 해도 이들이 적법성을 따져 부당하다고 거부하면 국왕 역시 GG쳐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국왕은 [[전제군주제|법을 준수하는 자리]]였지, [[입헌군주제|법에 복종하는 자리]]는 아니였으므로 법치국가는 아니다. 그래도 왕권의 독주를 견제하는 장치가 동시대 어느 나라와 견줘도 잘 돌아갔다. 다만, 이는 동시에 조선 정치 시스템의 한계이자 모순이기도 하다. 법적으로는 국왕에게 무한한 권력이 주어지는 체제인데, 실질적으로 강한 신권이 왕권을 제약하는 형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군약신강]] 문서에도 있지만, 이는 왕권을 제약한 요소인 동시에 국왕권과 신권이 무한 충돌하는 계기가 된다.[* 특히 연산군으로 인해 발생한 중종 반정이후 왕권은 급격히 쇠락해졌는데 '왕권의 회복=절대권력의 인정=폭군화'란 논리로 신료들이 왕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마저 견제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왕위에 오른 중종은 좌절감을 겪어야 했으며 신료들은 왕의 왕권 수호 및 회복 시도를 '제2의 연산군의 출현'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어떻게든 막았다.] * [[문벌귀족]] 사회에서 [[양반|문무양반]] 관료제 사회로의 변화(신분차별의 완화). 문과에 합격하는 서민층의 비율이 많이 늘었을 뿐만 아니라 무과도 시행되어 양인들이 양반이 될 수 있는 기회가 크게 늘어났다. 그 덕분에 귀족적인 요소가 강했던 전대 왕조들에 비해 신분차별이 많이 완화되었으며, 또한 전대에 비해 훨씬 합리적인 관료체계가 완성되었다. * 철저한 [[문민통제]]를 통한 지방 군사 세력의 통제와 근대적인 행정체계와 정교한 중앙집권체제 완성. * 향촌자치강조와 농민통제책(호패, 오가작통법). * 근대적인 경찰제도와 소방제도의 빠른 도입을 통한 사회안전망 강화. 치안은 [[포도청]], 소방 전담 기구는 [[금화도감]]이라는 기관이 있었다. 이런 근대적인 사회제도의 구축은 대부분 [[세종(조선)|세종대왕]]시기에 완성되었다. * 국가가 지원하고 주도한 광대하고 체계적인 기록문화와 [[활자]], [[인쇄]] 기술의 발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등 굉장히 세분화되고 쓰는 방법이 체계화된 방대한 양의 기록물들을 편찬했으며, 거기다 기록자를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고 객관적인 있는 그대로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왕조차 볼 수 없는 비공개 문서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 한다. 또한 전대인 [[고려시대]]는 군사강국이었지만 전쟁만 하느라 인쇄 기술력에 그다지 집중하지 않았는데 조선시대때에는 더 발전한 인쇄 기술력을 바탕으로 서적 편찬 또한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조보]] 같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신문 또한 발행되었다. * 과학기술과 문예, [[의학]]의 발전. [[측우기]], [[자격루]], [[혼천의]], [[앙부일구]], [[거북선]], [[천자총통]], [[화차(무기)|화차]]와 [[신기전]] 등등 전대인 고려시대 때보다 한층 더 과학기술이 발전했으며 한민족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한글]] 창제와 [[홍길동전]] 같은 한글 소설의 발달 그리고 형태가 확립된 한국의 대표적인 정형시인 [[시조(문학)|시조]]의 발전과 궁중 악기인 [[편경]] 제작, 궁중음악인 [[종묘제례악]]과 악보인 [[대악후보]] 같은 문예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동의보감]] 같은 의학의 발전 또한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도 제작 기술 또한 계속 발전해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같은 당대 세계최고 수준의 세계 지도나 [[대동여지도]] 같은 훨씬 더 정확한 지도들이 제작되었으며, [[천문학]] 또한 발전해 [[칠정산]] 같은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이 만들어졌고 세계에서 2번째로 만들어진 전천(全天) 천문도이자 세계 최초의 고경도 석판 위에 새겨진 전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또한 제작되었으며, [[선조(조선)|선조]]대에는 인류 역사에 남은 [[우리 은하]] 마지막 초신성인 SN 1604(케플러의 초신성)을 관측해 실록에 기록했는데 이는 현대에 와서 이 초신성이 la형 초신성이었음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자료로 쓰일 정도로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 대에는 은광석에서 순수한 은을 추출하는 첨단 회취법인 세계최고 수준의 기술력인 [[연은분리법]]이 발명되는 등 여러 분야에서 계속 발전이 이루어졌다.[* 다만 이 연은분리법이 당시 세계최고 수준의 기술력인 건 맞지만 이 기술이 발명된 당시가 불행하게도 [[연산군]] 시대였는지라 이 연은분리법은 조선에서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연산군은 이 연은분리법을 발명한 기술자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다만 조선에 침투해있던 일본인 첩자들이 이 조선의 연은분리법을 탈취해서 일본으로 가져가는데, 일본인 기술자들은 이 연은분리법을 연구하여 [[은본위제]]로 진화시키는데 성공하고 14세기~16세기 일본이 세계 2위의 은 생산국으로 군림하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 게다가 일본은 이와미 은광에 이 은본위법을 적용시켜 전세계 3분의 1의 은을 생산해낸다.] * [[왕도]]정치를 표방하며 상류층의 검소함과 위민정치를 지향. 다만 너무 검소함을 추구하다보니 만성적인 재정 빈곤에 시달리고 대규모 국책사업을 시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게다가 후기로 가서는 세율은 낮아졌지만 재정의 수요가 대폭 확대되었기 때문에 이를 보충하기 위한 조세왜곡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러한 점은 조선시대의 문화유산에서 화려함과 웅장함을 찾아볼 수 없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청화백자]] 등 화려한 유물이 전무하진 않지만. * 서민들이 즐길 수 있는 [[전통문화]]의 발전. 오늘날 전해지는 [[한국전통문화]]의 대부분은 조선시대때 생긴 것들이 많고 특히 [[탈춤]], [[판소리]], [[풍물놀이]], [[종묘제례]], [[민화]] 등 서민들의 문화가 발달했다. * [[고려]] 때에 비해 크게 늘어난 [[농업]]생산량.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꾸준한 개간과 간척이 이루어진 데다가, [[농사직설]] 등의 농서 편찬과 [[감자]], [[옥수수]], [[고구마]] 등 해외작물의 도입으로 농업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 이는 동시대 주변국과의 영양상태 비교로도 확인된다.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01310821004100|#]][* 간혹 조선시대 농업생산량 증가를 시대의 흐름에 따른 당연한 발전이라고 폄하하는 경우도 있는데 고려 말기에는 1결의 수확량이 200~300두에 지나지 않던 것이, 세종 때에는 최하 400두에서 최고 1200두까지 올라갔다. 동시기 다른 지역의 농업 생산량증가와 비교조차 해보지 않고 몇십년 사이 수확량이 최대 4~6배까지 증가한것을 그저 시대의 흐름에 따른 당연한 발전이라고 주장하는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 화약무기의 발전. 그 당시 개발된 화약무기들 중 [[천자총통]]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큰 활약을 할 수 있게 해주었고, [[문종(조선)|문종]] 때 개발된 [[화차(무기)|화차]]는 [[행주대첩]]에서 큰 활약을 하였으며, [[비격진천뢰]]는 경주성을 탈환할 수 있게 해주는 등 조선시대 화약무기의 발전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비록 큰 피해를 입었지만 [[임진왜란]]에서 승전하여 왕조를 300년 더 유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