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평가 (문단 편집) === 계급 === [[파일:52512339.1.jpg]] 일반적으로 조선의 지배 계급으로 생각되는 '''[[양반]]'''은 건국 초엔 계급이나 계층이 아닌 조정에 녹을 받고 일하는 '''관료'''를 지칭하는 용어에 불과했다.[* 양반이라는 이름 자체가 무신 관료를 일컫는 무반(武班)과 문신 관료를 일컫는 문반(文班)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사실 조선 초기의 계급은 전대 고려와 유사한 '''양천제'''(양인 + 천민)였다. 초기만 놓고 보면, 전대 고려의 귀족적 요소들[* 고려도 제도적으론 양천제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양인 내에 권세와 지위에 따라 귀족, 향리 등이 지배계층으로 존재했다.]이 상당부분 제거되었기에 '''고려를 포함한 전대 어느 시대보다도 신분간 편차와 차별이 많이 완화된 사회로 볼 수 있다.'''[* [[고려]]가 귀족 사회로 일컬어지지만 전대의 [[통일신라]]나 [[삼국시대]]처럼 귀족이라는 계급이 확고불변한 계급은 아니였다. 사실 고려도 그 이전 시대에 비하면 신분간 상하 이동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다. 자세한 건 [[고려]] 문서 참조.] 그리고 후기에는 신분간의 상하 이동도 전대에 비해 한층 '개방적'이 되었는데 몰락 양반이 많아지고 보다 좀더 자본주의적으로 바뀐 사회상 때문이다. 이 때 부터는 양반이 아니더라도 양인인 경우,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과거에 합격만 하면 양반이 되어 출세를 할 수 있었다.[* 이는 고려도 보장하긴 했으나 실질적인 면에서는 조선대의 유연성이 더 높았다. 고려의 지배층들(후대에 문벌귀족이라 불리는)의 결집도가 높았던 데다 고려의 직접적 행정력과 법제적 기반이 조선처럼 전 국토에 미치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과거 제도]]는 결국 양반층의 계급 세습을 합법화시킨 것이라는 통념과 다르게 조선대의 상민 출신 '''문과''' 급제자 비율은 초기 40% ~ 50%, 이런 초기 과거 급제자 출신들이 문벌을 짓기 시작한 중기에는 점차 낮아져 10% 후반대까지 이르렀으나, 양란 이후 다시 비율을 회복해 후기에는 다시 40% ~ 50% 비율을 유지했으며, 말기에는 60%에 육박했다는 최근 연구 결과도 있다.[* 조선사 전체로 확대하면 상민 급제자 수는 전 과거 급제자 중 1/3에 이른다.]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 연구) [[https://blog.naver.com/marich77/40201245403|출처]] [[http://news.donga.com/List/3/10/20130122/52512357/1?|기사1]] [[http://www.hankookilbo.com/v/9cda8a100f62479088857e71124c5f50|기사2]] 추가로 한영우 교수는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를 4권으로 완결지은 뒤, 4권 말미에 남긴 글 '나가면서'에서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장수한 비결은 지배 엘리트인 관료를 세습으로 보장하지 않고 능력을 존중하는 과거시험 제도로 부단히 하층 사회에서 충원했기 때문이라며 공부를 열심히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탄력적 사회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6706401|기사]] 아예 대한제국 시대에는 관직이라면 꿈도 못꾸는 서자들이나 하층민들도 대신급(품계로 따지자면 정2품 혹은 그 이상)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김가진]], [[이하영(1858)|이하영]], [[이용익]] 등이 있다. 이는 조선이 위기에 맞딱뜨리자 고종이 능력주의로 관료들을 뽑았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