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평가 (문단 편집) === 쇄국 === 중국 대륙을 지배한 명나라, 전국시대로 넘어가기 이전의 무로마치 막부와 왜란 이후 에도 막부와는 그럭저럭 교류가 있었으며 초기에는 동남아나 중국을 통해 접촉한 아랍권과도 교류가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폐쇄적인 고립주의 고수했다. 다만, 조선 초기의 상황은 명나라의 해금령과 이미 그 이전부터 고려말 원나라의 극심한 혼란으로 인하여 바닷길과 무역이 완전히 막혀있었다는 사실은 감안해야만 하며 초기에는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다. 무엇보다 15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유럽권 국가들(동유럽 및 발칸 반도 일대 제외)의 신항로 개척으로 인한 '''[[실크로드]]'''의 의미 상실 등 무역 루트의 붕괴와 중원의 해금령은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조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생한 현상들이었다. 또한 한반도는 주변국에 둘러쌓인 폐쇄적인 지형으로 일본과 중국의 쇄국 정책에 영향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 '대체로 무해한 한국사'의 저자 김재호[* 이영훈과 같이 낙성대 학파이다.]도 이러한 지형을 폐쇄적인 조선 사회의 원인으로 꼽았다. 지형 외에도 호란과 명나라의 멸망 이후 조선 양반층과 집권세력들 사이에서 소중화사상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들은 명나라 즉, 한족문화를 전통적으로 이어받은 나라가 조선이라며 청나라를 비롯한 외국 문물들을 오랑캐의 문화라며 대놓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 결과 홍이포 등은 도입을 했으나 청나라에 유입된 서구문물을 전부 오랑캐 것이라며 멸시하며 발전을 거부했다. 이후 실학이 대두하긴 하였으나 실학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이론에만 그쳐 실용화되지 않았으며 집권세력들은 정쟁에만 관심있었지 실학은 그냥 개인의 취미 수준에 그쳤다. 그렇게 조선이 안동김씨부터 시작된 세도정치에 빠져 있을 동안 청나라는 서양 열강에서 시달리고 있었고 일본도 미국의 쿠로후네 사건으로 개화를 할 무렵 조선은 서쪽은 중국 대륙에 가려져있고 동쪽은 일본에 가려져 있는 지형때문에 서양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일을 어느정도 마치고나서 손을 댈 정도로 관심이 매우 적었다. 한편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차지한 이후 대대적인 개혁을 했으나 어디까지나 왕권강화라는 내부정치 개혁일 뿐이었고 흥선대원군 또한 청나라가 열강에 시달리는 것을 알고있어서 서양세력의 위험성은 알고는 있었으나 왕권강화에만 집착한 나머지 도외시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프랑스가 벌인 양요와 오페르트 도굴사건을 통해 흥선대원군은 원래 서양의 위험성은 알고 있었으나 외부의 적으로 시선을 모으고 단결력 강화로 이용하기 위해 서양에게 적대적으로 나왔고 쇄국정치를 고집하게 되었다. 이후 민비와 고종이 직접 국정을 운영했으나 이 둘도 권력에만 관심있었고 개화에는 적극적인 편이 아니었다. 그렇게 도외시 한 결과 명성황후 시해를 당하고 나서 고종은 그제서야 광무개혁을 시도했지만 너무 늦은 시기의 개혁이라 후일 [[을사늑약]]이라는 결말을 맞이하게 되고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역사로 넘어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