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평가 (문단 편집) === 종교 탄압 === 대표적으로 불교 탄압([[숭유억불]] 정책), [[조선의 천주교 박해]]가 있다.[* [[도교]], [[무속|무교]] 등도 당시 교세가 불교나 후기의 천주교만큼 크지 않아 덜 부각될 뿐 조선왕조에서는 유교 이외의 사상은 유교와 동격의 주류까지는 절대 올라올 수 없는 대상임은 마찬가지였다.] 조선왕조는 기본적으로 유교([[성리학]])를 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못박고 그 외의 종교와 사상들은 억압하였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팔관회|종교행사 금지]]나 [[연등회|행사 축소]], [[산사|종교시설을 산으로 내쫓거나]] 종교인의 도시 출입을 금지[* 그래서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근대에 불교계가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이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우는 일이었다.]하는 등 간접적인 방법으로 꾸준히 배척했으며, [[진산 사건]]처럼 유교적 가치관과 충돌하는 경우 혹독한 탄압이 시행되기도 했다. 고려 이전까지 견지했던 [[삼교]] 균형의 미덕을 깨는 처사라 현대인들, 특히 탄압받았던 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부분이다. 이 당시 박해받았던 [[불교]], [[천주교]], [[개신교]][* 개항 이후 본격적으로 전파되어 조선의 직접적 박해는 거의 받지 않았지만 유교식 제사 거부를 사형으로 대응하는 등 당대의 주요 쟁점과 관련해서는 개신교 신자 역시 조선왕조 측을 교리적으로 옹호할 입장은 아니다.]는 현대 [[대한민국]]의 주요 종교가 되었고 유교는 교단 차원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 상황이 역전되었다. 규범이나 예의 등은 대부분 유교적 전례에서 기원하고 있지만, 조선 시대와는 달리 유교가 사회의 중심 원리로서 기능하지는 못하는 상태. 조선 건국과 함께 가장 먼저 가장 큰 탄압을 받은 불교의 경우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가 보기에 [[티베트 불교|몽골 제국 불교]]의 영향을 받아 고려시대 후기의 변질된 불교가 국가를 좀먹어 들어갔던 만악의 근원이었고, [[무속|무교]]는 뚜렷한 교리도 없는 [[미신]]으로 치부되어 조선의 사대부들은 건국부터 불교와 [[무당]]들을 극렬하게 멸시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와 미래에 대한 불안은 어쩌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 종교의 내세관에 대한 의존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는 모순 또한 보여주었다. 유교적 통체이념을 확립했지만 지배층들부터 불교를 버리지도 못하고 믿은 것이다. 당장 왕실부터가 틈틈이 불교를 비호했고 (대표적으로 [[세조(조선)]]이나 수많은 왕실의 여인들) [[광해군]]이나 [[명성황후 민씨]]는 아예 궐에 무당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궐 내에서 누군가를 저주하는 물품이 발견되거나 굿이 행해졌다는 기록도 빈번하게 나온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해서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불교 탄압은 줄어들었으며 이후 불교는 한반도 내에서 쭉 지속된다. 일례로 임진왜란 직후 왕실과 국가의 주도로 사찰 복원과 건립이 활발해진 것 등.] 다만 종교 탄압 역시 동시기 타지역서도 보여지는 현상이기에 조선만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당장 유럽은 기독교 일변도였으며 심지어 종교개혁이라고 그 기독교서 카톨릭과 개신교가 분리되자 서로 이단이라며 인정하지 않으며 상대방 신자들을 학살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