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평가 (문단 편집) == 후대에 남긴 영향 == [[개항기]] 시장의 발전, 근대문명에 대한 이해의 확산·심화, [[근대화]]정책의 경험, 철도, 전신, 전보, 우체국, 전등, 전화, 사진, 수도, 신식 소총·대포 및 군함 등 근대적 문물과 근대적 시설, 기업의 출현 등은 식민지기 경제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실학사상의 기반 위에 개항 직후 출현한 개화사상은 식민지화의 위기 가운데 애국계몽운동으로 연결되어서 학교 설립을 위한 [[신교육운동]], 실력 양성을 위한 [[식산흥업운동]] 등을 낳았다.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식민지화 이전 조선사회의 성취가 일제시대의 변화와 성장을 뒷받침한 점을 인식할 수 있다. 1910년대에 성장률이 3% 이상으로 높아졌을 가능성이 있는데, 아무리 강하고 효율적인 식민지정부라도 전근대 경제를 접수한 지 10년 정도에 자신의 힘만으로 3% 이상의 지속적인 성장국면으로 진입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근대문명의 이식이 순조로운 것은 조선시대의 문화 발달과 개항 후 근대문명의 수용 성과와 무관하지 않다. 조선시대 [[토지소유제]]의 진전은 [[토지 조사 사업]]의 신속하고 비교적 원활한 수행을 가능하게 하였다. 조선시대 집약적 소농경영의 발전은 산미증식계획기에 일본식의 보다 집약적인 농법을 원활히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18세기에 이미 인구밀도가 높았고 노동력의 처분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일본자본이 노동력의 확보에 애로를 크게 느끼지는 않았다. 교육을 중시하는 조선시대의 문화는 일제시대 교육의 확대를 뒷받침하였다. 조선을 농업사회로 묶어두려는 회사령에도 불구하고 회사자본과 공업이 빠른 성장을 보였던 직접적인 계기는 10년대의 호홍국면과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이었지만, 식민지화 전에 구축된 기반이 없었더라면 그만큼 현저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조선인 중소공장이 우후죽순처럼 발흥하던 것도 식민지화 전 회사설립운동의 연장선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한국경제통사』]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한국전통문화]]는 현대의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전해지고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