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평가 (문단 편집) == 군사력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조선군)] 조선의 군사력 운용에는 분명히 문제가 많았지만, 타당한 수준 이상으로 조선군이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핵심적으로 조선의 대중적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문약한 나라였다는 것이다. 조선은 국가적으로 무를 천시하고 비생산적인 글 공부에만 전념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조선이 오히려 고려보다 무관에 대한 대우를 더 높였음을 생각하면 이는 잘못된 오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조선의 국방력 문제는 조선의 내부적 문제만이 아니라 외교적-정치적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조선은 과거와 달리 안정된 강대국들(명나라, 청나라, 통일 일본)에 둘러싸인 형세였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조시대와 금나라, 요나라, 송나라 등으로 중원이 분열되어 있던 전대왕조인 고구려, 발해, 신라, 고려에 비해 외교적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았고, 정복 전쟁을 펼치기가 여의치 않았다. 물론 그럼에도 조선은 통일 신라나 고려보다 국토는 더 넓었다. 또한, 세간의 인식과 달리 조선은 국방 문제를 등한시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에서 의병과 수군만 싸우고 조정은 방관했다는 것이 대중적 인식이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는 조선 조정이 정규군 전반을 지휘하며 필사적으로 일본에 맞서싸웠다. 그리고 군사의 규모는 축소되었지만 중앙 상비군의 질적 향상은 이루어졌고, [[비격진천뢰]], [[화차(무기)|화차]], 조총을 위시한 화약무기도 대거 도입되었으며 이후 호란을 거쳐 체계적인 조총병으로 편성된 중앙군도 창설하였다. 이는 확실히 전대왕조들에 비해 조선이 이룬 군사적 발전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정당한 수준 이상으로 비난이 과도할뿐, 조선의 군사 체계에 심각한 결함이 많았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특히 조선군의 폐해에 대한 모든 책임을 국제 정세 같은 외부 요인으로 돌릴 수는 없다. 분명 조선은 전대 왕조들에 비해 기술도 발전하고 인구 및 생산력도 증가하였다. 그러므로 군사력도 전대 왕조들을 능가해야 정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이 이전 왕조들보다 발전된 만큼 주변국들도 국력이 평균적으로 상향되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전 왕조와 달리 통일된 중원제국과 통일된 일본 열도의 국력은 한반도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적 이미지와 달리 건국 초기, 아니 넓게 잡아도 조선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간다고 할 수 있는 15세기까지는 조선의 군사력은 우수한 편이었다. 이는 초기에는 조선 조정이 군사력 강화에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태조 이성계 휘하의 고급 무장들과 정예병 수만이 남아있어 조선을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록에는 태조의 통치 기간에만 조선의 잠재적인 병력이 20만 이상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규모 못지 않게 내실도 우수하여 방패검병인 팽배수와 중기병 전력도 견실하게 편제되어 있었고 정예 궁병만 수만이었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이방원을 필두로 한 신하들이 대군을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는 것을 진지하게 추진하려고 했다. 명나라에서 이런 조선의 움직임을 경계하였기에 명나라 초대 황제는 군마 수천필을 조공하라고 압박하는 기록도 있고 세종때는 여진족과 왜구를 대상으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이렇듯 조선은 초기의 군사력이 분명 우수했으며 김종서, 윤관을 비롯한 명장들도 있었기에 그 잠재력이 폭발하여 고려도 실패한 [[4군 6진]] 개척 즉, [[함경도]]를 영구히 조선의 영토로 삼아서 통일신라와 고려보다 영토를 더 크게 늘린것을 통해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는 조선 초기의 군사력이 분명 우수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군사력이 건실했던 시기에 대규모 외침이 있었다면 의외로 조선도 [[고수전쟁]], [[여요전쟁]]처럼 통쾌한 승전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홍무제]]와 [[영락제]] 그리고 [[토목보의 변]] 이후의 조선 초중기에는 조선과 명나라 모두 안정기였고 북방의 이민족들도 잠잠해서 전란이 없었다. 그래서 정작 전성기의 조선군이 보인 전과는 4군 6진 개척을 제외하면 여진족 및 왜구들에 대한 소규모 토벌 정도였다. 그래도 실적이 없지는 않아서 세종대왕 치세에는 한국사의 마지막 북벌이었던 4군 6진까지의 확장을 이룩했다. 이는 고려시대에도 실패했던 [[동북 9성]]으로의 확장에 마침내 성공하고 현대 한민족의 국경선을 확립한 중요한 성과였다. 또한 화차가 정식으로 군제에 편입된 것은 문종 때였으며, 세조는 본인도 상당한 군재가 있었기 때문에 신숙주, 구치관 등을 통해 북방을 안정시키는 등 노력을 경주했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이만주]]를 잡아죽여 건주여진을 아예 멸망시킨 것도 세조 시기다.[* 간혹 15세기 여진족들을 나라도 형성하지 못한 부족민들이라며 그런 부족민들 토벌한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여진토벌의 의의를 과소평가하는 경우도 있는데 송나라시절부터 "여진족 1만이 모이면 당해낼자가 없다."는 말이 있었을정도로 동아시아에서 여진족들의 전투력은 높이 평가받았고 여진족들이 분열상태였던 15세기때도 명나라와 조선에서 여진족의 잠재력만큼은 매우 높이 평가받아 튀하면 정벌을 나가 여진족들을 짓밟았는데 훗날 [[정묘호란]], [[병자호란]]등을 보면 여진족들이 그들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을때 아주 큰 적이 되었을거라는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며 따라서 15세기 조선이 여러번 정벌을 나가 여진족들의 성장을 차단한건 매우 의의가 크다.] 군인에 대한 대우도 나름 괜찮은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징병제임에도 극단적으로 징병하지 않았고 [[군포]](일종의 [[국방세]])를 내면 현대의 예비군에 해당하는 [[속오군]]의 징집에서 면제되었고, 집안이 가난할 경우에는 아예 징집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런 군사력이 유지되었던 것은 초중기까지이고 이후부터 평화에 찌들고 정치는 문관중심의 붕당으로 인해 조선의 군사력이 갈수록 약화일로를 걷는다. 이는 고려와도 똑같은 케이스인데 고려도 초기에는 여요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이후에는 [[여몽전쟁]], [[카다안의 침입]],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홍건적]]의 침공 등 중-후기에는 처참한 군사적 굴욕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평화기에는 조정이 국방을 등한시하는 방향성에서 공통적으로 기인했다. 게다가 시간이 갈 수록 비리로 인한 부실했던 재정도 조선의 군사력이 약해진 중요한 원인이다. 이는 크게 두가지 이유였는데, 하나는 조정이 국가 운영에 충분하지도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낮은 조세 수준을 책정한 탓. 이런 조세 제도를 펼친 이유는 조정이 유교적 위민사상에 근거하여 백성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유교적 명분에만 집착하고 부족한 국가 재정을 충당할 대안을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군사력을 강화하고 싶어도 정작 세금을 충분히 걷지 않으니 군사력에 투자할 충분한 재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런 만성적인 재정 부족은 조선의 군사 규모는 물론이고, 무기의 질, 보급, 훈련 상태에까지 전반적으로 악영향을 끼쳤다. 이런 와중에 둘째 이유인 부정부패가 속출했다. 일단 세조 시기에도 [[훈구파]]인 [[한명회]] 등 [[계유정난]] 공신들의 폐단은 심각했는데, 이들은 세조가 싸고 돈 바람에 제대로 뿌리를 뽑지 못했고[* 세조는 명분없이 왕위를 찬탈한터라 정통성이 약해서 지지기반인 공신들이 필요할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쓸데없이 의리를 강조하며 자기 편을 들어준 공신들을 큰 일이 없으면 처벌하지 않았다.] 이는 장기적으로 왕권의 약화와 조선 고위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이어졌고, 청렴하고 능력있는 관리들보다 음서, 뇌물로 고위직에 오르는 관료들이 속출하니 자연스럽게 성리학의 기본인 청렴이 제대로 강조되지 않았다. 이에 확실하게 시스템의 붕괴를 이끈 것은 다름아닌 '''[[연산군]]'''으로, 왕이 직접 뇌물을 받아가며 흥청망청 노는데다 국고를 탕진했다.[* 이때문에 [[조광조]] 등 교조적인 성리학 원리주의가 대두되기도 했다. 타락한 관학파들을 비판하기 위해 반대로 극단적일 정도로 도덕성을 강조하게 된 것. 하지만 문제는 나중에 이게 지나쳐서 국가에 해가 된다.] 이러니 국방력을 키울 예산이 없어진 것이며 비록 국가에서는 세금부담을 많이 없애줬으나 중앙눈치를 덜 보는 탐관오리들은 각종 세금과 이자 놀이를 통해 민중의 고혈을 짜내는 바람에 중후기부터는 백성들은 세금감면 정책에 대한 체감을 못 하는 수준이었다. 조선 조정이 군축 정책을 펼친 것도 군사력이 약화된 원인이다. 이는 상기한 대로 재정이 파탄난 것도 있지만, 조선 중기까지 평화가 지속되어서 조정이 대군의 필요성을 경시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초중기를 거치며 열심히 때려잡은 결과 여진은 소수 세력으로 줄어들었고 몽골은 여진과 명에 가로막혀 올 수가 없으며, 왜구들도 토벌되었고 일본은 전국시대로 혼란한 시기라 조선의 주변국은 사실상 명나라만 남았다. 그러나 조선은 홍무제와 영락제 이후로는 명나라와 대립각을 세울 필요성 자체가 사라지다 보니 이마저도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결과를 선택하게 된다. 대신 그 덕분에 조선은 전란없는 안정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명나라가 쇠퇴하자 이민족인 여진족과 도요토미가 천하통일을 하여 전란이 소강상태가 되고 센고쿠시대 동안 상공업 발달로 국력이 강해졌다. 그렇게 평화기 동안 심하게 약체화된 조선의 군대는 이에 제대로 대응할수가 없었다. 즉, 평화기가 끝나고 전란기가 도래했음에도 조선은 재정악화와 붕당으로 동서인이 서로 정계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일본 침공은 없을것이라 하여서 이로 인해 필수적인 수준의 군비 증강과 대비도 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건국 후 200년에 달하는 평화기에 약체화된 군대를 재건할 역량이 조선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상술되었듯이 근본적으로 조선의 체제로는 대군의 양성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전란이후 인조반정, 이괄의 난이 터지고 얼마안가 호란이 터지는 바람에 조선 입장에서는 군비 증강은 커녕 전후 복구조차 끝낼 틈이 없기도 했다. 결국, 전란기가 도래하자 조선은 약체화된 군대와 국방 체계의 문제점을 낱낱이 드러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국토의 초토화와 삼전도 굴욕이라는 굴욕적인 패전이었다. 그나마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직전까지는 국방의 문제를 떠나서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쇠망의 길을 걷고 있을 때이니 논외로 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에서 보여준 속절없는 모습들은 당시 조선은 물론 역사적으로도 고려의 [[여몽전쟁]]과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홍건적]]의 침공 등과 함께 한민족에게 깊은 상흔으로 남았다. 특히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적을 상대로도 실책만 반복하다가 처참하게 패한 병자호란의 결과는 너무나 참담한 것이었다. 단, 조선만이 군사력의 약화가 특이하게 나타났다라는 주장은 성립이 안되는데 이는 바로 직전 왕조인 고려 또한 고려 중기 즉, [[무신정변]] 이후로는 국가의 파탄과 조정의 무능함이 겹쳐 [[여몽전쟁]] 당시에는 겨우 최대 3만명 미만의 몽골군들에게 온 국토가 수십년 동안 초토화되었고 이후에도 군사력을 회복하지 못해서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당시에도 비정규군인 왜구들에 의해 온 국토가 수십년 동안 초토화되는 등 이전 왕조인 [[고려]]에게서도 초기 이후의 중-후기의 국방력의 약화는 똑같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고려 말에도 공민왕 시절 10~20만의 [[홍건적]]이 침입하자 고려군도 20만 대군으로 물리쳤다는 반론이 있는데 홍건적도 사실 왜구처럼 규모만 컸을뿐 제대로 된 군대가 아니라 도적떼나 다름없었으며 당시 고려군 20만 역시 과장된 기록이거나 설령 사실이어도 대부분은 그저 급하게 머릿수만 채운 농민 징집병 즉, 오합지졸들이었을 가능성이 높은것이 자체적으로 20만 정예 대군을 양성할 수 있는 나라가 왜구[* 심지어 이 [[왜구]]들은 [[조총]]도 없고 [[센고쿠 시대|전국시대]]를 겪지않아 [[임진왜란]] 시절에 비해 훨씬 약한 편이었다.]들과 홍건적에게 국토를 그토록 유린당했을 리가 없다. 그저 머릿수만 채우는 것이라면 [[임진왜란]] 시기 조선도 [[용인 전투]] 직전 단기간에 수만 병력을 뽑았다. 또한 조선군의 문제점이라고 지적되는것들은 알고보면 조선이 영향을 많이 받은 [[명나라]]도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이라 조선에게만 뭐라하는것도 부당한 면이 크다.[* 대표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명나라를 다녀온 조선 사신이"일로 변두리의 연대(烟臺) 는 모두 무너지고 파수보는 사람조차 없으므로, 달적(㺚賊)이 마음대로 출입하여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고령(高嶺)·사하(沙河) 같은 오랑캐의 지경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서는 아이와 아낙네가 다 병기를 들고 스스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또 지난해에는 온 천하에 기근이 들었는데, 남쪽 변방의 왜구는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본 바로는 요동부터 고령까지 16일 길인데, 그곳은 길에서 굶어 죽은 사람이 이루 셀 수 없이 들에 깔려 있었으며, 굶주린 백성이 그 시체를 뜯어 먹었습니다. 해주위(海州衛)에서는 대낮에 성안에서 버젓이 사람을 죽이는데도 주장이 감히 막지 못한다고 합니다. 광녕(廣寧)·사령(沙嶺) 사람은 패하여 흩어져 죽을 것으로만 생각하여 생업에 안정할 마음이 조금도 없으므로, 그때 마침 2월이었는데도 밭에 거름을 나르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각 참(站)의 말까지 다 죽어 하나도 남은 것이 없으므로, 신이 서반(序班)에게 위소(衛所) 군사의 말을 내어 달라고 말하여 스스로 초료(草料)를 장만하여 먹이며 5∼6참을 가기도 하였으며, 수레를 끄는 소는 수레 1양(輛)에 겨우 2∼3마리를 메우는데 모두 비쩍 말라 제대로 끌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당시 명나라군이 얼마나망가졌는지 보고하는 기록이있을 정도이다.] 당장 조선을 비웃은 명나라만 해도 [[토목의 변]]에서 대군을 동원하고도 2만의 몽골군에게 참패하여 황제가 사로잡히는 굴욕을 겪었으며 16세기때는 일본 정규군도 아닌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가 유린당했을 정도로 처참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척계광]]이 [[원앙진]] 전법을 개발하면서 해결되었다는 반론이 있지만 척계광은 왜구에 특화된 전술을 이용해 척가군이라는 정예병을 양성했을뿐 당시 명나라군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참고로 [[삼포왜란]]~[[을묘왜변]]때 조선과 비교해보면 [[명나라]]에 비해 조선은 상당히 선전한셈이었다.] 게다가 명나라도 조선처럼 장군들에 대한 견제와 감시가 지나칠정도로 심했으며[* 이로 인해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이 [[웅정필]]과 [[원숭환]]이다.] 황제들과 대신들이 군사적 역량이 모자라는데도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장수들에게 무리한 전쟁을 강요했다가 토목보의 변, [[정난의 변]], [[송산 전투]]처럼 우세한 상황인데도 열세인 적군에게 참패하는 참사를 발생하게 만들었다.[* 특히 [[경술의 변]]에서는 수만의 몽골군에게 제대로 된 대항도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포로로 잡혀가며 약탈당하는 굴욕을 겪었고 [[만력 3대정]]도 반군을 초기에 진압못하고 참패하여 장기전이 되어 겨우 진압하게 되면서 많은 인력과 자금을 날려 버리는 사태가 터진다.] 특히 전면전이 아니라 조선군이 중점으로 뒀던 토벌전만 놓고 보면 명나라와 비교해도 조선군의 전과는 나쁘지 않았다.[* 당시 명나라는 비록 [[토목의 변]]이후 [[영락제]]시절에 비해서는 국가위상이 낮아졌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오늘날 미국 정도의 위상을 가진 강대국이었다.]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 여진 협공 당시 조선군은 1만 명이었는데, 총 286급을 참수하고 2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被虜人) 7명을 탈취하였다. 반면 명군(明軍)의 군세는 5만 명이었는데, 총 638급을 참수하고 25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 1,165명을 탈취하였다. 언뜻보면 조선군의 전과보다 명군의 전과가 월등해 보이지만, 조선의 동원 병력이 명군의 5분의 1이었다는걸 감안하면 오히려 조선군이 명군보다 병력대비 여진족을 더 많이 죽였으며[* 당시 명나라군은 1만명당 128명의 여진족을 죽였다.], 예상치 못했던 럭키샷이 터져 예전부터 골칫거리였던 건주여진의 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조선군이 직접 죽여 복수하기도 했다. [* 출처:[[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html?dbGubun=SD&category=Report&m201_id=10038483&local_id=10052878]]] 조선군이 건주여진 정벌에서 이만주를 죽인건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했는데 당시 명나라의 황제인 [[성화제]]가 [[세조(조선)]]를 칭찬하며 후하게 상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http://sillok.history.go.kr/id/kga_11404009_001|#]][* 하사품이 하도 많아서 [[세조(조선)]]가 "우리 나라는 작은 공(功)으로써 천은(天恩)을 우악하게 받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가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또한 왜구가 가장 활개를 치던 1555년 명나라는 '''고작 72명'''의 왜구들을 한명도 죽이지 못하고 900명이 전사하기도 했는데 동시기 [[조선]]은 제주도에서 벌어진 2차 을묘왜변때 '''70명으로 14배가 넘는 1000명의 적을 무찌른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당시 [[고려]]나 [[척계광]]의 [[원앙진]] 전법을 도입한 [[명나라군]]조차 14:1이라는 숫적 열세인 상황에서 이긴적은 없었다.출처:[[https://www.newsnjeju.com/news/articleView.html?idxno=60120]]] 이처럼 15세기때는 [[여진족]]들을 정벌할 때도 1만단위의 병력을 어렵지않게 모아 압도했고 [[이시애의 난]] 당시 수만병력을 어렵지 않게 동원한적이 있다.[* [[이시애의 난]]진압과정을 보면 [[용인 전투]]마냥 단순히 머릿수만 채운 오합지졸들로 보기도 어렵다.] 이는 개별전투에서 1만이상의 군대를 이끈 경우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그마저도 [[용인 전투]]같이 머릿수만 채운 오합지졸들이었던 [[임진왜란]]시기 조선의 모습과는 상당히 대조되는 모습으로 역사에서 가정이란 없지만 만약 이 시기 그저 국경부근에서 여진족의 난동이나 내부 반란정도가 아니라 국력을 총동원하여 막아야하는 임진왜란 수준의 대규모 외침이 있었다면 조선도 수십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아쉬워하는 의견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