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평가 (문단 편집) === 약화에 대한 비판과 반론 === 국방력이 약화되었다는 인식 또한 존재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건국 이후 200년간 전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는 옹호론 또한 존재한다. >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평안도 도원수(平安道都元帥) 이극균(李克均)을 인견(引見)하였다. 이극균이 아뢰기를, > > "들으니, 올적합(兀狄哈)[* 만주어로는 우디거(숲사람)라고 하며 조선시대 두만강(豆滿江) 일대에 살던 야인 여진의 분파이다. 비록 명나라 아래 있었던 건주 여진이나 몽골에 가까웠던 해서 여진에 비해 문명 수준은 낙후되었으나 호전성만큼은 뒤떨어지지 않았다. 명나라 세력권에 속해 있어 조선이 공격할 땐 명나라 눈치를 봐야 했던 건주여진, 너무 멀어서 당시엔 부딪힐 일이 없는 해서여진과 달리 조선과 직접적인 충돌을 가장 많이 일으켰던 세력이었다.]은 항상, '''‘[[조선]](朝鮮)이 아무리 [[강대국]](强大國)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울지현(蔚地峴)을 넘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는데, 이번에 북정(北征)을 하며 깊숙이 들어가 위엄을 보이고, 또 고산리(高山里)에서 참획(斬獲)이 매우 많자[* [[https://www.fmkorea.com/5366988869]]] 오랑캐들이 서로 말하기를, '''‘올적합도 저렇게 제압당하는데, 우리들이 어찌 감히 당할 수 있겠는가?’'''[* 올적합은 당시 야인여진 중 가장 강하고 호전적인 세력이었으니 그런 올적합을 털어버린 조선군이 두만강 일대 여진 부락들에게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로 여겨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하면서, 이에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하기를, '''‘다시는 조선과 흔단(釁端)을 만들지 않고 영구히 신복(臣服)하겠다.’'''고 하고서는 그로부터 감히 강가에서 사냥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 > 평안도 도원수 이극균을 인견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403014_003|#]][* 여진족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이었는지 이후 해당 올적합 토벌에 대해 귀화한 여진족인 동청례가 강성하던 금나라도 못한 일이라며 여진족들을 회유했던 근거로 써먹은 기록이 있다."대금(大金)은 바로 우리 원조(遠祖)로 그 강성함이 더할나위 없었지만, 올적합(兀狄哈)을 치려 하되 마침내 얻지 못했습니다. 근년에 올적합이 우리 동북 변방을 침범하자 우리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 대군을 일으켜서 정벌하여 그 가옥을 불태워 탕진시켜서 편안히 살 수 없게 하니, 올적합이 사방으로 흩어져 제종(諸種)의 야인에게 종이 되고 말았소."[[http://sillok.history.go.kr/id/kja_10310007_002|#]]] 위와 같이 조선도 전성기인 15세기때는 직접 원정을 나가 강대국으로 인정받은 기록이 존재하기도 한다.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 일컬어졌는데 근래에 와서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초래한 것입니다. 지금 천조는 귀국을 금구 무결(金甌無缺)한 국가로 삼으려고 하는데 귀국은 이를 알고 있습니까?" >---- >선조실록 39권, 선조 26(1593)년 6월 5일 무자 5번째 기사, 명나라 사신 유원외 >"귀국의 강한 군대는 본디부터 천하에 소문이 났는데, 수(隋)ㆍ당(唐) 때는 어째서 그리 굉장했으며 풍신수길(豐臣秀吉)의 난에는 어째서 그리 심히 겁을 내었습니까? " >---- ><금계일기> 5월 20일자 기록 >"수나라와 당나라 때에는 일찍이 강국으로 불렸는데 지금은 어찌 이토록 나약한가. 당신들은 마땅히 돌아가 당신 나라에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고 自强에 힘써 나라를 보존하도록 하라." >---- >遼東巡撫 李化龍의 발언 하지만 임진왜란 때 오는 명나라 사신들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와 수-당을 언급하며 과거에는 강했는데 지금은 어찌 이리 문약해졌느냐는 비판이 엄청 쇄도한다.[* 근데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이전 왕조인 고구려는 국력이 강해지기 전 [[관구검]]이 이끄는 '''고작 1만'''병력에게 수도까지 털린 적이 있고, 고려 역시 [[카다안의 침입]]이 발생했을 때 [[여요전쟁]]에서 보여준 모습은 잃어버린 상태로 [[쿠빌라이 칸]]한테 "당태종도 고구려에게 패했고, "우리도 너희를 굴복시키는데 매우 큰 힘을 쏟았는데, 왜 지금은 그깟 도적떼에 쩔쩔매느냐?"는 식으로 디스 당한 적이 있으며, 조선 당시 명나라 또한 [[영락제]]이후 [[토목의 변]]을 시작으로 [[가정제]],[[만력제]]등 막장황제들로 인해 국력이 약해져 본인들 역시 만만히 보던 [[왜군]]에게 2차 [[평양성 전투]]와 [[벽제관 전투]]때 깨진 걸 생각하면 [[적반하장]]이니 적절한 비판은 아니다.] 물론 물론 당시 명나라도 [[조선군]]을 마냥 디스하기만한 건 아니고, '''[[이순신]]'''이나 [[행주대첩]] 당시 '''[[권율]]''' 등 [[조선군]]이 활약한 전투들에서는 조선군 장수들을 극찬했다.[* 적이 결국 패해 후퇴하면서 시체를 네 무더기로 쌓아 놓고 풀로 덮고 태웠는데, 그 냄새가 몇 리 밖까지 풍겼다. 우리 군사가 나머지 시체를 거두어 참획한 것만도 1백 30급이나 되었다. 다음 날 사대수(査大受)가 접전한 곳을 와서 보고 말하기를, "외국에 진짜 장군이 있다."하였다. 송 경략(宋經略)이 우리 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 위로하고 추장(推奬)하는 한편 비단과 은(銀)을 상으로 주고 황제에게 주문(奏聞)하였다. 황제가 홍려시(鴻臚寺)의 관원을 보내 우리 나라에 선유(宣諭)하기를,"조선은 본디 강국으로 일컬어졌는데, 지금 보건대 권율이 참획한 것이 매우 많으니 해국(該國)의 [[인민]]이 그래도 진작될 수 있겠다.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하였다. 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nb_12602001_008]]] 또한 두 차례 왜란 직후 여진정벌을 나간 기록이 있는데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이끄는 5천 명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정벌군이 출병하여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좌위, 중위, 우위의 3로로 나누어 진격해서 여진족 가옥 1천여 채를 불태우고 적 110명을 참수했다. 이번 원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당시 여진족'''들'''은 기병대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본군 공격대장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에서 여진족들과 노토부락에서 전투한 적이 있는데, 여진족 기병대들이 강력한 기병전술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완전히 [[개박살]]내었고 가토군은 더 이상 피해가 커질 것을 우려해 철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진족들은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겪은 일본군인들이 보기에도 엄청 강력한 적으로 여겨질 정도로 상당히 고평가를 받았다고 해석하는 게 옳다.'''[* 사실 "신이 평소에 올적합(兀狄哈)과 올량합(兀良哈)을 알고 있는데, 성질이 굳세고 사나워 싸움하기를 즐겨하며 죽고 사는 것을 따지지 않고 진중(陣中)으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한 곳에 모여 사는데, 3, 4백 명에 밑돌지 않습니다. 그러나 3, 4백명으로도 우리 나라의 1만 군사를 당해낼 수 있습니다."라는 [[성종(조선)|성종]]시기 기록을 보면 임진왜란 100여년전부터 여진족들의 전투력은 항상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심지어 조선 초기에는 무려 '''32만이 넘는 병력'''이 동원되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도성(都城)의 둘레가 9천 9백 75보(步)인데, 북쪽 백악사(白嶽祠)로부터 남쪽 목멱사(木覓祠)에 이르는 지름이 6천 63보요, 동쪽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서쪽 돈의문(敦義門)003) 에 이른 지름이 4천 3백 86보가 되며, 정동(正東)을 흥인문, 정서(正西)를 돈의문, 정북(正北)을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을 홍화문(弘化門) 【곧 동소문(東小門). 】 , 동남(東南)을 광희문(光熙門) 【곧 수구문(水口門). 】 , 서남(西南)을 숭례문(崇禮門) 【곧 남대문. 】 , 소북(小北)을 소덕문(昭德門) 【곧 서소문(西小門). 】 , 서북(西北)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태조(太祖) 5년 병자 봄에 각도의 민정(民丁) 11만 8천 76명을 모아 도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니, 번와(燔瓦) 및 석회군(石灰軍)이 또 1천 7백 59명이었다. 가을에 이르러 또 민정 7만 9천 4백 31명을 모아서 8월 13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였으며, 금상(今上) 4년 임인에 태종의 명으로 성을 수축하여 토성(土城)을 모두 돌로 바꾸었는데, 8도의 군사 총 32만 2천 4백 명을 모아,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에 마치었다. 성 동쪽에, 처음에 수문(水門) 3을 열었는데, 장마를 만나면 〈문이〉 막히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2문을 더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